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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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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흔적] “각하, 휘호를 내려주소서”

등록 2005-02-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전국 각지에 친필 서예작품 1200여점 남긴 박정희… “서예가 소전에 지도받았다”엔 의견 엇갈려

▣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비행기편으로 급거 상경하던 박정희 2군 부사령관은 경북 구미 금오산 상공을 지나며 이런 글을 남겼다고 전한다. “영남에 솟은 영봉 금오산아 잘 있거라. 삼차 걸쳐 성공 못한 흥국일념. 박정희는 일편단심 굳은 결의 소원 성취 못하면 쾌도할복 맹세하고 일거귀향 못하리라.”

평소 메모와 기록을 좋아했던 그는 쿠데타 직전 피 마르는 상황에서도 섬뜩한 맹세를 글로 남긴 것인데, 이런 무서운 집념 탓인지 할복의 칼날 대신 승리의 칼자루를 쥐게 된다.

미국과 싸운 ‘신미양요’기념물까지

집권 이후에도 메모와 기록을 좋아하는 습관은 여전했다. 바뀐 것이 있다면 대통령으로서 남기는 기록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기억이나 다짐이 아니라 남들을 부리는 지시와 훈계가 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개인적인 붓글씨 취미가 더해져 ‘대통령의 글씨’는 비석·현판·액자 등으로 꾸며져 전국 곳곳을 장식하게 된다. 1989년 박정희 휘호집 <위대한 생애>를 펴낸 ‘민족중흥회’에 따르면 당시 총무처는 대통령의 일과와 행적을 기록한 <박정희 치적사>라는 문서를 만들었다. 이 치적사는 대통령의 글씨가 언제 어떤 장소에서 어떤 내용으로 씌었는가도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박 대통령은 18년 동안 전국 각지에 친필 1200여점을 남긴 것으로 돼 있다. 평균 어림잡아 계산해도 매년 66점 이상, 매주 1점 이상씩 쉬지 않고 글씨를 쓴 셈이다.

그의 글씨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당시는 무엇보다도 ‘싸우면서 건설하던 시대’. 쉼없이 망치 소리가 울려퍼지던 건설의 시대에 현장 방문을 유독 즐겼던 박 대통령은 시찰을 하거나 각종 기공식·준공식·기념식에 참여해 글씨를 썼다. 현장의 공무원들은 알아서 지필묵을 대령하고 각하의 글씨를 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진해공설운동장(1965), 언양~울산고속도로(1969)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1970·추풍령), 태릉국제스케이트장(1971)처럼 근대화의 표징이 되는 장소에는 빠짐없이 대통령의 글씨가 박혔다. 김재규의 권총이 발사된 1979년 10월26일 마지막 날에도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여해 ‘삽교천 유역 농업개발 기념탑’을 남겼다.

민족 중흥을 위해 혁명에 나선 거라고 신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그는 평생 ‘민족주의’를 부르짖었다. 수원 화성 복원작업, 경복궁 준공, 아산 현충사 성역화 사업, 경주종합관광개발계획, 강화도 전적지 정화사업 등을 펼치며 이곳에도 역시 글씨를 남겼다. 문화재청이 현판을 교체하기로 한 ‘광화문’, 이미 교체가 이뤄진 경기도 수원시 화령전(정조의 사당)의 운한각 현판, 서울 세종로에 남아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73), 강화도 용두돈대에 세워진 강화전적지 정화사업비 등이 그러한 맥락이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국난극복·호국·무인사상 등을 신봉하고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이를 기념하는 장소와 기념물들을 많이 만들었다. 특히 강화전적지 정화사업의 경우는 카터 집권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진 가운데 미국의 함대를 싸워 이긴 신미양요(1871)를 기념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고 풀이한다.

관공서를 방문하면 기관의 성격에 따라 글씨를 내리기도 했다. 해병대 사령부엔 ‘우리청룡만세’(1965)와 ‘출전준비’(1967)를, 농협중앙회엔 ‘과학하는 농촌’(1966), 전매청엔 ‘잎담배 수출증대’(1969), 민주공화당 중앙훈련원엔 ‘이곳을 거쳐나가는 자여 조국은 너를 믿노라’(1969), 문화공보부엔 ‘유신이념의 구현’(1973), 재무부에는 ‘저축은 국력’(1976) 같은 표어·구호성 문구를 내렸다.

교황의 성탄절 메시지나 고승들의 석가탄신일 법어처럼, 1월1일 새해 아침이 되면 ‘민족의 나아갈 길’을 밝히는 휘호를 내렸다. ‘혁명완수’(1962), ‘근검절약’(1965), ‘자립’(1966), ‘중단 없는 전진’(1971), ‘총력안보’(1972), ‘근면협동 총화단결’(1974) 등이 그것이다.

김우중씨 아버지가 첫 글씨 선생

박 대통령의 서예 취미는 대구사범학교 시절 습자시간에 붓글씨를 배우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 서예 선생인 김용하(전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씨의 아버지)씨가 처음 글씨 선생이었는데, 이러한 스승-제자의 인연으로 아들 김우중씨와도 각별한 사이가 됐다고 전한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1981년 작고)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전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박 대통령이 글씨 수업을 얼마나 제대로 받았는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훈수 정도로 가르침은 받았겠지만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다”(해청 손경식·해청미술관 관장)는 의견부터 “소문일 뿐 절대 수업받지 않았다”(우죽 양지미)까지 분분하지만, 박 대통령의 글씨가 소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소전이 광복 이후 남한 서예계의 핵심 인물로서 국전을 이끌며 대통령과 자주 접촉했고, 그의 작품이 화랑대·영빈관·애국청년기념비 등 국가적 예를 중시하는 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 대통령과 글씨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거나 한수 지도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과연 박 대통령은 ‘자주’ 쓴 만큼 ‘잘’ 썼는가. 서예가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서첩을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예가’의 수준은 아니다”라고 평한다. 다만 “배운 글씨는 아니지만 워낙 주관이 뚜렷하고 개성적인 사람이라 글씨를 보면 그의 야물딱진 성격이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무림 김영기·해청 손경식). 워낙 오랫동안(18년) 쉼없이 썼기 때문에 말년에 이르면 광화문 현판(1968)을 쓰던 초기에 비해 안정된 필체를 이루기도 했다.

사범학교 시절부터 이른 아침이면 마을 뒷산에 올라 기상 나팔을 불어 마을 사람들을 깨웠던 박정희 대통령은 붓글씨 말고도 시·그림 등의 취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엔 군인이 되기 전 3년 동안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그림·음악 같은 예능지도를 겸했던 이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팔 불기나 작시·회화 등의 취미에 비해 서예는 좀더 이데올로기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글 한줄이 금과옥조가 되어 국민들에게 읊어졌고 곧 각하의 글씨로 재현돼 어디를 가든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지필묵의 향기를 맡으며 글씨 쓰는 대통령이란 이미지는 매일 군대에서 배운 검도로 하루를 시작했던 ‘무인 박정희’의 이미지를 상쇄시키며 ‘인간 박정희’로 종합화됐다.

전두환 집권 뒤 모두 내려져

대통령이 글씨를 좋아했기에 정부의 고위 관료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서예 붐이 불기도 했다. 인사동 서실이 늦깎이 공무원 수강생들로 붐비던 시절이었다. 70년대부터 서울 인사동에서 우죽서실을 운영해온 양지미씨는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들한테 ‘유신’을 새긴 벼루를 선물했던 대통령을 따라 국회의원은 물론 비서실 직원까지 글씨를 배우러 왔다”고 말한다.

10·26이 일어나고 또 다른 독재자가 등장하면서 각하의 글씨도 그 영광이 한풀 꺾인다. 새 대통령 전두환씨의 명에 따라 공화당 방마다 붙어 있던 박 대통령의 글씨는 모두 내려져 창고로 보내졌다. 민족중흥회 강양식 국장은 “휘호집 편찬 때문에 현장조사를 나가보니 각 기관들에 내려졌던 글씨가 원본은 누군가에게 넘어가고 복사본이 걸려 있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워낙 양이 많기 때문에 그의 글씨는 역대 어느 명필·임금의 작품보다도 많이 남아 있다. ‘명필 성군’으로 회자됐던 영조·정조대왕의 작품은 각각 ? ? 점, 하다못해 천하의 명필 추사 김정희도 ? 점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전란·화재·관리 소홀로 유실된 것도 많지만 예로부터 글씨, 특히 비문에 새기는 금석문은 ‘임금도 함부로 쓰지 않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일제에 항거한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예산 사당이나 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 삼일문 같은 곳에 일본군에 자원 입대했던 사람의 글씨를 붙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한홍구 교수도 “광화문처럼 건물과 글씨의 품격이 함께 가야 하는 곳에 통치자로서의 권위 말고는 글씨의 격이 한참 떨어지는 것이 붙어 있는 곳은 하루빨리 교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미 생가, 방문객들의 흐느낌



1월26일 오후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생가 앞, 초로의 사내가 안내문을 한자 한자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충북 옥천에서 왔어요, 육영수 여사 고향~. 일이 있어 근처에 왔다가 박 대통령 생가 보려고요.” 구석구석 꼼꼼히 돌아보던 한창기(56·운수업)씨는 박 대통령이 호롱불 켜고 공부했다는 사랑채 방 온돌을 쓸어보며 “어이~ 차갑네” 외마디소리를 냈다. 마치 며칠 집을 비운 도련님 방에 군불 땔 걱정하는 듯한 품새였다. 그를 존경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 못해 눈물까지 고였다. “아~ 그립죠. 지금이야말로 필요한 사람인데. 보릿고개를 없애줬으니까요. 새마을운동 하고 근대화운동 하고. 요즘 정치인들이야 다 도둑놈이지.” 그는 방명록에 “박 대통령이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적은 뒤 분향소에 들러 향을 피우고 곱게 절까지 올리고 나서 집에 돌아갔다.
1917년 태어나 37년 대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박정희가 살았던 이 집은 한국전쟁 때 본채가 불탄 뒤 60~70년대 여러 번 신축·개축됐다. 박 대통령이 공업단지를 시찰하거나 성묘를 하러 고향에 자주 들렀기 때문에 관리인을 두었다가 80년대 중반부터는 이웃 주민 김재학씨가 자원봉사로 근무하고 있다. 김재학씨는 “10·26 직후엔 분향소가 설치돼 조문객들이 많이 왔고 이후엔 한동안 발길이 뜸하다 97년께부터 다시 북적이고 있다”고 전했다. 외환 사태로 경제가 거덜난 상황에서 ‘자립경제’를 일군 박 대통령에 대한 흠모 분위기가 일었던데다, 정권교체로 소외감과 충격을 먹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이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요즘엔 하루 200명(평일) 정도가 꾸준히 찾고 있으며, 학교 숙제 때문에 들른 초등학생부터 중·고등 수학여행단, 아줌마 관광버스부대까지 방문객의 연령층도 다양하다. 특히 중년여성들은 육영수 여사 사진을 보며 흐느끼다 돌아간다고 했다.
구미시는 98년부터 생가 근처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해왔다. 생가 옆 구릉과 야산 2만3580명을 기념관 터로 확정하고 42억원을 들여 1만7502평을 사놓았다. 2001~2008년을 사업기간으로 잡고 이미 10억원을 들여 생가 들머리에 정자와 화장실, 주차장도 지었다. 하지만 총예산 280억원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구미시는 박정희기념사업회에 희망을 걸고 있다. 지난해 10월 서울 상암동에 기념관을 지으려고 했던 기념사업회 계획이 모금액 부족으로 사실상 중단되면서 기념사업회가 정부 지원금으로 미리 받은 208억원을 다시 토해내야 할 지경이다. 기념사업회는 LG·대한상의 등으로부터 모금한 102억원과 정부 지원금을 구미의 기념관 건립에 쓰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행정자치부는 본래 상암동 기념관 계획에 지원한 돈이기 때문에 사업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했다고 보고 환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단, 보조금법에 따라 이미 집행된 예산은 인정해줘야 하기 때문에 실사를 거쳐 나머지는 법적 절차를 거쳐 환수할 계획이다.
생가에서 돌아나오는 길, 한적한 도로에 난데없이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울렸다. “여러분, 여러분, 많이들 오세요. 신장개업 ‘박통 칼국수’입니다.” 트럭에 탄 내레이션걸들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박정희의 고향, 구미엔 그가 이렇게 살아 있었다.
구미=이유주현 기자, 신승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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