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미사일 개발 둘러싸고 폭발 직전으로 걷잡을 수 없이 치달았던 1970년대 후반의 한-미 관계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혁명을 일으킨 목적은 혈맹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에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1심 최후 진술에서 뜻밖의 발언을 내놓는다. 김재규의 진술에 기댄다면 박정희는 어쩌면 미국과의 갈등으로 몰락을 자초한 최초의 한국 대통령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박정희는 미국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런 맥락에서 해방 이후 생겨난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자주적인 정권이었다는 평가까지 받는다. 그는 자주국방을 통해 미국의 내정간섭과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의 뿌리
박정희는 미국이 1971년 3월 제7사단을 빼내가고 ‘5년 내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를 내세우자, 그 뒤부터는 아예 작심하고 ‘자주국방’을 부르짖는다. 그가 생각한 자주국방의 의미는 1972년 7월20일 국방대학원 졸업식에서 행한 치사에 잘 담겨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 국민이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의연한 자세로 강력히 추진할 때, 그리고 미국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끝내 해낼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미국은 협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국방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자주국방을 국가적 과제로 공개적으로 제시한 이후 단 한 차례도 미국 땅을 밟지 않았다. 그는 18년간 장기 집권을 하면서도 미국을 세 차례밖에 방문하지 않았다. 1961년에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처음 만났고, 1965년에 존슨을, 그리고 1969년에 닉슨 대통령을 본 게 다다. 그가 장기간 집권하면서 미국과 부닥쳤던 가장 큰 현안들은 베트남 파병과 인권, 주한미군 철수 그리고 핵무기 개발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미간의 뜨거운 감자들은 엇비슷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집권 초기 경제적 자립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그는 한동안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의 요청을 이유로 베트남 전쟁에 5만명이라는 대군을 선뜻 보낸 것만 봐도 당시의 돈독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대미 외교는 철저한 실리에 바탕을 둔 전형적인 실용 외교의 모습을 띤다. 당시 북한의 군사력에 견줘 열세에 놓였던 상황이라 야당과 국민들의 안보 불안감은 적지 않았고, 파병 반대 분위기가 더 강했다. 그러나 1965년부터 전투부대가 보내졌고 1968년에는 그 인원이 5만명에 이르렀다. 당시 북한의 군비 지출은 한국의 2배를 넘었고, 휴전선에서 제한적 군사 충돌이 빈발했으며, 심지어 한국 내에서 게릴라전까지 펼쳐진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박정희의 결정은 참으로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도 한다. 당시 파병 결정은 겉으로는 돈독한 한-미 동맹의 과시였지만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파병과 경제원조의 교환’이라는 거래에 관심을 쏟았다. 경제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그는 파병에 따른 보상금으로 장병수당 1억3천만달러를 포함한 건설 및 용역업체 수입 등으로 10억달러를 미국으로부터 받아냈다. 이는 대일 청구권 자금 8억달러와 함께 한국 산업화의 주요한 물적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전후한 한-미간 밀월관계는 지금까지 공고하게 이어지고 있는 한-미-일 삼각 안보동맹의 견고한 뿌리인 셈이다. 박정희가 추진했던 산업화 정책은 한-미-일 동맹 체제의 형성과 이를 통한 자본 및 기술의 획득과 시장의 확보라는 정치·경제적 고리를 통해 가능했다.
그러나 미국에 반전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 불똥이 주한미군에 튀면서 한-미 관계가 급속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박정희·김일성 모두 위험한 인물”
박정희 정권 시절 한-미 관계에 안겨준 가장 큰 시련은 주한미군 철수와 인권정책이었다. 이 두 이슈는 한국의 안보와 국내 정치를 송두리째 흔드는 강진이면서 어쩌면 그를 파멸로 내몬 결정적 단서였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단군 이래 최대의 미국 정치인 상대 불법 로비 사건으로 일컫는 ‘코리아 게이트’가 불거져 미국 조야가 술렁거리면서 한-미 관계는 최악의 냉기류에 빠져들었다. 사실 코리아 게이트 사건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겨냥한 외교활동의 변형으로 과도한 의회 로비활동이 화근이었다.
인권 개선 요구라는 정치적 압력 아래 진행된 카터의 철군정책은 응징의 효과를 자아낸 탓에 그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카터는 한국 인권과 철군의 연계에 대한 당시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의 우려 섞인 건의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밴스의 조언 속에도 박정희에 대한 카터의 못마땅함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푸에블로호 사태 해결의 특사로 갔을 때)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박의 북침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박·김(일성) 모두 위험한 인물이다. 박·김이 있는 한 통일은 어렵다. 그러나 철군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두 나라의 문제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정치 문제로) 남한에 대한 군사·경제적 제재 조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박정희는 한국민의 감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미국의 태도에 분노하면서 자주국방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한국은 당시 베트남전에 미군 다음으로 많은 5만여명의 전투병력을 파견해 함께 피를 흘렸으나 미국은 일방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밀어붙였다. 박정희는 중화학공업 육성책의 하나로 방위산업을 적극 지원하면서 국산화와 양산화를 다그쳐 자주국방의 기틀을 어느 정도 닦는다. 몇 발짝 더 나아가 비밀리에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에 나서는 한편, 1974년부터 1차 율곡사업(1974~1981)을 시작해 탄탄한 군비증강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같은 질주는 미국과 되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한다. 미국의 안보공약에 강한 의심을 품게 된 박정희는 1976년 10월 한국원자력기술공사, 11월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을 세워 핵연료의 국산화 및 방사성 동위원소 이용 기술 개발에 착수했고, 1978년 9월에는 장거리 유도탄 시험발사에 성공해 바야흐로 세계에서 일곱 번째 미사일 생산국이 되었다. 화들짝 놀란 미국 행정부는 장거리 유도탄 생산을 유보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카터가 선거에서 공약한 주한미군 철수를 더욱 세게 밀어붙이려 했다. 당시 미국은 인권 문제를 박정희 정권 압박의 수단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핵·미사일 개발을 둘러싼 심각한 갈등이 문제였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그가 1979년 10월26일 피살되기 직전까지 한-미 관계는 폭발 직전의 꼭지점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치달았다. 당시 극도로 불편했던 한-미 관계로 말미암아 박정희 피살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하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1976년 코리아 게이트 사건을 시작으로 연이어 터진 미국의 청와대 도청 사건, 1977년 1월 인권외교를 표방하고 출범한 카터 행정부의 인권 개선 압박과 주한미군 철수 논란, 10·26 발생 20여일 전에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국회 제명 사건에 대한 항의 표시로 미국 정부가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까지 소환하면서 양국 관계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의 대미외교를 ‘자주’라 평가할 것인가
자주국방을 매개로 한 박정희의 대미 자주외교에 대한 평가는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이런 평가를 정교하게 다룬 관련 논문도 찾아보기 어렵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스스로 핵개발을, 뒤이은 노태우 정권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통해 핵주권마저 포기했다. 자체 미사일 개발도 사정거리 180km 이내로 못박힌 상황이다. 이런 까닭에 박정희의 과도한 자주국방 추구가 되레 미국에 미운털만 박히고, 남북 관계도 더 악화시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진단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그가 한국의 잠재력을 과시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이 그나마 미국으로부터 대접받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당시 청와대에서 군수산업을 담당했던 한 비서관은 “박정희의 장거리 유도탄 개발의 성공과 핵무기 개발의 집념이 역설적으로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를 막는 데 기여한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가령 1979년 1월에 나온 미 상원 군사위원회의 ‘샘넌 보고서’는 ‘한국 정부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주한미군의 철수를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서울대의 조동준 정치학 박사는 ‘자주의 자가당착’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1970년대 박정희 행정부의 자주국방은 동맹 상대국인 미국의 방기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평가하면서도 “1970년대 한국의 자주국방은 북한의 군사화를 초래해 1980년대 초반 한국의 대외안보가 약화되었고 북한의 핵무기 추구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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