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중심의 금융정책으로 기반붕괴 위기… ‘방카슈랑스 확대시행 철회’가 최대현안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전날 뿌린 늦가을비로 기온이 뚝 떨어진 11월2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 맞은편의 ‘열린시민공원’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공원 한 모퉁이에 차려진 천막을 걷어내려는 이들과 말리는 쪽 사이의 실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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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연맹 위원장과 부위원장의 단식투쟁
공원의 천막에서는 11월1일부터 무려 25일 동안 단식 농성을 벌인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연맹) 곽태원 위원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박조수 부위원장(전국손해보험노조 위원장)이 이틀째 단식을 진행하고 있던 터였다. 종로경찰서의 지휘를 받은 10여명의 철거반원은 연맹쪽의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불법’ 시설인 천막을 걷어냈다. 박 부위원장을 비롯한 연맹의 노동자들은 바람막이를 잃고, 속수무책 허허벌판으로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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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과 부위원장이 바통을 주고받으며 줄기차게 단식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연맹쪽의 요구는 “은행 중심의 금융정책을 폐기하고, 제2금융권과 균형발전을 꾀하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2금융권 중심의 상급 노조단체인 연맹은 생명보험, 손해보험, 증권, 증권유관기관, 투자신탁, 신용카드, 상호저축은행, 협동조합 등 380여 단위노조 8만 조합원을 아우르고 있다.
김창희 연맹 기획실장은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은행의 안정을 위해 막대한 공적자금을 지원하고 은행의 국제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분에 따라 은행의 고유 업무는 지켜주면서 제2금융권의 고유 업무는 은행의 부수 업무로 편입하는 ‘은행 중심의 금융산업 개편 정책’을 펴왔다”고 진단한다. 김 실장은 “이런 금융산업 정책에 따라 보험, 증권, 투신, 카드, 상호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은 기반 붕괴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으며, 대량 실업과 구조조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금융권이 은행 중심으로 재편됐다는 주장은 대체로 사실에 가깝다. 정부가 금융정책의 깃발로 ‘대형화, 겸업화’를 내세웠던 만큼 덩치나 업무 영역의 다양성으로 보아 은행이 비은행을 압도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는 통계치에서 잘 드러난다.
금감원에 따르면, 일반은행(시중은행 및 지방은행)의 평균 자산은 1999년 말 33조1천억원에서 올해 6월 말 57조8천억원으로 무려 74.8%나 늘어났다. 반면, 증권사와 보험사의 평균 자산 규모는 같은 기간 각각 5.4%와 25.2% 증가에 그쳤다. 은행에 견준 증권사와 보험사의 상대적 규모(총자산)는 99년 말 각각 3.7%, 10.9%에서 올해 6월 말에는 2.2%, 7.8%로 줄었다. 미국의 경우 2002년 말 기준으로 증권사와 보험사의 자산 규모가 상업은행에 견줘 각각 53.1%, 67.4%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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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2금융권의 위축세는 구조조정 한파로 이어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직후에는 은행권이 상대적으로 더 혹독한 감원 바람을 겪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2금융권쪽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금감원 집계 결과, 금융회사 전체 직원 수가 6월 말 현재 21만2351명으로 1년 동안 5103명(2.4%) 줄어드는 동안 은행 종사자는 8만8460명에서 9만49명으로 1589명(1.8%) 늘었다. 같은 기간 2금융권에서는 그만큼 추가적인 감원이 이뤄졌다. 권역별 감축 규모를 보면, 증권업계 종사자 2193명(6.5%), 보험업계 155명(0.6%), 신용카드업계 2157명(21.4%) 등이다. 이런 감원 바람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높다. 특히 증권업계의 경우 장기간에 걸친 증시 침체로 한계 상황으로 내몰린 중소형 증권사들을 중심으로 구조조정 바람에 휩쓸릴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방카슈랑스(은행 창구에서 보험 상품을 판매하는 것) 도입에 따라 잉여 인력으로 치부되고 있는 보험설계사들도 감원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1년동안 5103명을 자르다
사무금융노조연맹을 중심으로 한 2금융권쪽에서는 “은행을 중심축에 둔 정부의 금융산업 재편과 이에 따른 은형의 2금융권 영역 침투에서 이런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며 금융 정책의 궤도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보험산업 종사자들의 대량 실업을 촉발하는 방카슈랑스 확대 시행 철회 △증권산업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제도 개선과 증권거래세 및 유관기관 수수료 인하 △상호저축은행에 대한 국제결제은행(BIS) 비율 적용 재고를 비롯한 서민금융 활성화 대책 등이다. 이 가운데 최대 현안은 방카슈랑스 논란이다.

내년 4월부터 보장성보험과 자동차보험으로까지 확대되는 방카슈랑스 2단계 시행을 둘러싼 중심 대립축은 은행권과 보험업계다. ‘예정대로 시행하자’는 은행권에 맞서 보험업계에선 ‘연기 또는 철회’를 주장하고 있으며, 이는 연맹 차원의 최대 과제이기도하다. 2단계 방카슈랑스 연기 또는 철회에 관한 한 2금융 내부의 노사가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된 1단계 방카슈랑스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은행들의 보험꺾기(대출 기업에 대한 보험 가입 강요), 무자격자 판매 등 변칙 사례가 상당수 드러나는 바람에 2금융쪽의 방카슈랑스 연기 또는 철회 주장에 점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보험설계사 5만~10만명이 추가로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추정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우제창 열린우리당 의원을 비롯한 여야 의원 73명이 지난 11월17일 2단계 방카슈랑스 시행을 연기하는 내용의 보험업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은 이런 분위기의 반영이다. 금융감독위원회를 비롯한 금융당국에서도 연기 요청을 받아들이려는 뜻을 비치고 있다. 이 때문에 2단계 시행의 철회까지는 몰라도 연기는 가능할 것이란 관측이 차츰 우세해지고 있다. 연맹을 중심으로 한 2금융권쪽의 요구가 일정 부분 수용되고 있는 셈이다.
‘국민경제적 의미 획득’이라는 숙제
금융권역별 균형 발전을 깃발로 내건 2금융권의 금융정책 궤도 수정 운동은 이처럼 일부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지속적인 ‘동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은행과 2금융권 사이의 ‘영역 다툼’ 또는 ‘출혈경쟁 피하기’라는 인상을 넘어서는 ‘국민경제적 의미’를 획득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같은 노동계인 은행 중심의 ‘전국금융산업노조’에서 사무금융노조연맹을 보는 눈길이 탐탁지 않다. 김문호 금융산업노조 정책본부장은 “외환위기 이후 정부 금융정책의 중심은 직접 금융시장(주식·채권)을 육성하는 것이었지 은행 중심의 정책이었다고 볼 수 없다”며 “정부 정책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금융의 공공성과 안정성을 해치는 쪽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힘을 합쳐야 할 노동계에서조차 금융산업의 위기 진단에서 근본적인 시각차를 드러낸 것이다.
1단계 방카슈랑스 시행 과정에서 일부 부작용이 드러났지만, 보험료가 약간이나마 내려가고 상품 개발력을 갖춘 중소형 보험사가 시장점유율을 높여가는 순기능을 거두고 있다는 점도 2금융권의 주장에 힘을 빼고 있다. 방카슈랑스 철회 등 2금융권쪽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으려면 금융 소비자, 나아가 국민경제에 어떤 이로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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