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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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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둘러싼 엇갈린 대화

등록 2004-10-07 00:00 수정 2020-05-03 04:23

첫 텔레비전 토론에서 나타난 부시와 케리의 대북정책…케리의 토론 승리로 지지율은 다시 원점

▣ 워싱턴= 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지난 9월30일 플로리다 마이애미대학에서 첫 미 대선후보 텔레비전 토론이 열리기 전, <cnn>의 한 정치 해설가는 두 후보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
“존 케리 민주당 후보는 불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케리는 너무 복잡하게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부시는 너무 단순하게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부시가 북한과의 대화를 뒤집었다”

동맹국, 특히 유럽과의 관계 회복을 기치로 내건 케리는 종종 부시 진영으로부터 “유럽 지향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케리는 외교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적도 있다. 이건 “미국 대통령이 안보를 지키는 데 유럽의 눈치를 봐야 하느냐”는 비판으로 연결됐고, 최고사령관으로서 케리의 신뢰성에 적잖은 상처를 입혔다.
부시 연설의 한 특징이 동어반복이다. 정치 전문 잡지 은 부시의 이런 습관을 지적하면서 “어쨌든 부시는 항상 토론에서 이겼다”라고 말했다. 동어반복은 부시가 어떤 사안을 자세하게 꿰뚫고 있지 못함을 뜻한다. ‘멍청하다’는 일부의 비판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런 습성은 부시의 친근한 태도와 맞물리며 단점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부시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강점으로 바뀐 적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첫 토론에서 케리는 <cnn>의 ‘충고’를 지켰다. 그는 불어를 전혀 쓰지 않았다. 말도 평소처럼 장황하게 하지 않고 또박또박 단문식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토론 직전 <cnn>이 케리 진영의 고위 보좌관 마이크 매커리(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백악관 대변인을 지냈다)를 텔레비전에 불러내 던진 질문이 이거였다. “케리가 발언 제한시간 2분을 지킬 수 있겠느냐.” 그러나 이날 케리는 발언 제한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부시는 이날도 동어반복을 계속했다. 이라크 침공이 ‘어려운 결정’(hard decision)이었다는 말을 줄곧 강조했다. 케리는 이라크전을 “잘못한 시간에 잘못된 지역에서 행해진 잘못된 전쟁이었다”(wrong war, wrong time, wrong place)고 표현했다. 부시는 케리의 이 말을 기회만 있으면 인용하며 케리 공격에 활용하려 애썼다. 유권자들이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를 부시가 또다시 반복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90분간의 첫 토론에서 두 후보의 가장 큰 쟁점은 이라크와 북한이었다. 특히 두 후보는 북핵 사태가 악화된 원인에서부터 해결방안에까지 분명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케리는 부시 행정부가 외교의 우선순위를 잘못 두고, 한국의 의견을 무시한 채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해 결국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상황까지 오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시 정권이 들어선 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북한과의 대화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부시가 한국 대통령(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는 자리에서 이걸 뒤집어 버렸다. 이게 (북핵 문제의) 진실이다”라고 비난했다.

케리는 양자·다자 협상 병행 밝혀

반면에 부시는 “내가 집권하기 전에 (빌 클린턴 전 행정부의) 정책은 북한과의 양자협상이었다. 그리고 북한과 협정을 맺었지만 북한은 그걸 존중하지 않는다는 게 드러났다”고 말했다. 약속을 어긴 북한과 함께 양자협상에 나섰던 민주당 정권을 싸잡아 비판한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 방식에서도 두 사람의 의견은 갈렸다. 부시 대통령은 “(지금의 6자회담과 같은) 다자회담을 계속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케리는 “(다자와 양자) 둘 다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정전협정과 경제문제, 인권 문제, (재래식) 대포 배치 문제, 비무장지대 문제와 핵 문제를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놓겠다”고 강조했다.
물론 북한과의 양자협상 역시 어려운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방적인 북한의 양보를 요구했던 부시와 달리, 케리는 북한과 ‘주고받기’를 할 용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의 한반도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은 “빌 클린턴 행정부 역시 처음엔 북한에 강경했지만, 대화를 하면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케리 역시 그 길로 가겠다는 뜻이고 이 점에서 북한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부시와 다르다”고 말했다.
케리는 최대 쟁점인 이라크 문제에서, 그리고 북한 핵 문제에서 부시와 뚜렷한 선을 그었다. 그는 미국이 대테러 전쟁에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는 게 왜 중요한지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케리 역시 미국의 선제공격론을 옹호하긴 하지만, 선제공격은 동맹과 국제사회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시는 그 다음날 “케리의 선제공격론은 미국의 안보를 국제사회에 아웃소싱하는 것”이라고 맹비난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는 “부시의 이런 반격은 토론 준비자료에 있는 것이었을 텐데, 막상 토론장에선 흥분해 그걸 잊어버린 것 같다”라고 평했다.
토론 태도에서도 케리는 부시를 압도했다. 케리는 꼿꼿이 선 채 흐트러짐 없이 사회자인 짐 레러를 보고 발언했다. 부시가 얘기할 때엔 미소를 띠며 경청했고 가끔 메모를 했다. 부시는 연단에 기대 몸을 앞으로 내민 채 발언을 했다. 이건 부시가 선거유세 때 자주 쓰는 포즈다. 청중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이런 모습은 격식을 차리지 않는 친근감을 대중에게 선사한다. 그러나 유세와 토론은 달랐다. 키가 큰 케리가 화면을 꽉 채운 데 반해, 키가 작은 부시는 앞으로 몸을 숙임으로써 더 왜소하게 보였다는 게 현지 언론들의 평이다. 여기에 케리가 발언하는 동안 부시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짓는 모습이 계속 카메라에 잡혔다. 부시는 내용과 이미지 모두에서 케리에게 완패했다.
케리는 단번에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텔레비전 토론 직후 첫 공식 여론조사인 조사에서 케리는 47%의 지지율로 45%의 부시를 오차범위 내에서 앞섰다. 거의 한달 만의 지지율 역전이다. 이걸 ‘케리의 우세’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최소한 부시의 우세가 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


민주당 지지층, 이제 결집하나

모든 선거에선 계기(momentum)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선거는, 특히 정권을 놓고 겨루는 대선은 어느 한 후보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누구에게나 도약의 기회는 온다. 누가 이걸 잘 활용해 지지율 상승으로 끌어올리느냐에서 승패는 갈린다. 케리는 이미 한 차례 그런 기회를 놓쳤다. 지난 7월 말 민주당 전당대회는 케리로선 확실하게 선거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기회였다. 나흘 동안 텔레비전들이 온통 민주당 전당대회만 비춰줬다. 그러나 전당대회가 끝난 뒤 케리의 지지율은 거의 오르지 않거나 일부 조사에선 오히려 가라앉았다.
케리는 전당대회에서 부시를 공격하기보다는 자신의 베트남전 참전 경력을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걸로 민주당 지지층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엔 미흡했다. 여론조사 전문가 존 조그비는 케리의 가장 큰 취약점으로 “민주당 지지층을 제대로 결집하지 못한다”는 점을 꼽는다. 민주당의 텃밭인 흑인과 여성, 진보 계층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케리가 민주당 후보란 간판만 달아도 45%의 지지는 얻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만큼 반부시 정서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몇%의 지지율을 더 보태는 건 후보 개인의 능력이다. 케리는 여기서 실패했다. “케리가 부시와 뭐가 다른가”란 질문에 케리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조그비는 “만약 케리가 선거에서 진다면 그건 부시가 잘해서가 아니라 케리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옥토버 서프라이즈’ 소문 무성

부시는 재선에 도전하는 대통령치곤 취약한 상대에 속한다. 모든 이슈에서 부시에게 이로운 게 별로 없다. 이라크에서 미군 전사자 수는 1천명을 넘어섰다. 부시 집권 기간 중 일자리가 200만개 이상 사라졌다. 부시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50%를 간신히 넘나들고 있다. 대선에서 부시의 재집권을 바라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바뀌길 원하느냐는 질문에 항상 ‘바뀌길 원한다’는 응답이 약간 많이 나온다. 부시가 9월 초 공화당 전당대회 이후 케리를 최고 11%포인트 차까지 앞섰지만, 워싱턴의 정치 분석가들이 여전히 ‘접전’이라고 평가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부시가 케리에 대해선 강하지만, 부시의 국정 운영에 대해선 염증을 내는 유권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이런 정도의 국정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은 없다.
첫 텔레비전 토론 이후 케리가 부시를 얼마나 따돌릴 수 있을지는 아직 점치기 힘들다. 여전히 판세는 박빙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토론 직후 미국의 뉴스전문 채널 <msnbc>는 “부시가 토론에서 이겼다면 게임은 끝났을 텐데, 이제 마지막까지 승부를 점치기 어렵게 됐다”라고 평했다. 미국 사회가 워낙 당파적으로 분열돼 있어 부시의 지지율이 쉽게 빠지진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케리가 첫 토론에서 부시와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건 사실이다.
케리의 토론 성공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부동층에 미칠 영향뿐 아니라, 민주당 지지자들의 재결집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처럼 유권자 집에 투표용지가 자동 배달되지 않는다. 투표권을 얻으려면 직접 행정기관을 찾아가 투표자 등록을 해야 한다. 또 미 대부분의 지역에서 투표에 참여하려면 차를 타고 투표장을 찾아가야 한다. 그런 만큼 누가 자기 편을 많이 등록시키고, 이들을 투표장까지 끌어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케리의 선전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투표를 해야 할 중요한 이유를 제공했다.
1차 텔레비전 토론을 지켜본 시청자는 미 전국에서 6250만명으로, 1992년 대선 이후 최고 수치다. 이렇게 높은 시청률을 보인 건 마침 그 시간대에 다른 경쟁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번째 토론(10월8일)과 마지막 세 번째 토론(10월13일)은 메이저리그 야구경기와 채널 경쟁을 해야 한다. 시청률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부시는 첫 토론의 실패를 어떻게 만회할 것인가.
요즘 워싱턴 정가엔 ‘옥토버 서프라이즈’가 심심치 않게 떠돈다. 옥토버 서프라이즈란 11월2일 대선을 앞두고 선거에 영향을 미칠 큰 사건이 10월에 터진다는 일종의 음모이론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선이 있는 해에 ‘9월 대란설’ ‘10월 대란설’ 등이 떠도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 언론들은 이걸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하면서도, 민주당쪽이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4년 전 ‘옥토버 서프라이즈’에 놀란 건 부시쪽이었다. 선거를 얼마 앞두고 부시가 젊었을 때 음주운전을 하다가 체포됐다는 사실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옥토버 서프라이즈’는 현실화하지 않는다. 1968년과 1972년 대선을 앞두고는 “곧 베트남전이 끝난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졌지만 그냥 소문으로 끝났다.

부시에겐 정면승부밖에

올해의 ‘옥토버 서프라이즈’는 단연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다. 부시가 이미 빈 라덴을 체포해놓았고 공개 시기만 저울질하고 있다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인터넷을 통해 퍼지고 있다. 또 딕 체니 부통령이 돌연 사퇴를 선언하고, 그 자리를 인기 높은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메울 것이란 소문도 나돈다. 모두 부시에게 유리한 시나리오들이다. ‘옥토버 서프라이즈’가 기승을 부린다는 건 그만큼 현직 대통령의 재선이 불투명하다는 얘기다.
선거 판세란 항상 물 흐르듯 변하게 마련이다. 부시가 강점을 지닌 외교·안보 분야 토론에서 이변이 일어났듯이, 두 번째 세 번째 토론에서 어떤 이변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다만 임기 중의 정책 실패를 타고난 친화력과 카리스마로 메워온 부시에게 첫 토론의 실패, 그것도 이미지에 상처를 입히는 실패를 한 건 뼈아프다. 부시는 이제 도전자 케리보다 더 도전적인 자세로 정면승부를 걸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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