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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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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다’를 뛰어넘어라

등록 2004-09-09 00:00 수정 2020-05-03 04:23

‘경실련 · 참여연대’의 양대 프리즘 해체될 21세기 시민운동… 진정성 획득으로 의구심 씻어내야

▣ 하승창/ ‘함께하는 시민행동’ 사무처장 chang@action.or.kr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창립된 지 15년, 참여연대가 창립된 지 10년이다. 시민운동은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고, 이 두 단체가 사회 변화에 기여한 공적은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눈부시다.

1990년대 한국의 시민운동은 대변형 운동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 2만여개가 넘는 시민단체가 있지만, 막상 시민들은 참여연대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일부 시민단체만을 한쪽 손으로 꼽을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시민단체는 자신의 정체성이 성이든, 환경이든, 부패든 담론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대변형’ 단체로 상징됐고 실제 활동도 그렇게 전개됐다.

이름 없는 수많은 단체들을 기억하라

이들 단체의 급속한 사회적 영향력의 획득은 시민사회 공간을 넓히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했고, 수많은 단체들이 그 넓어진 공간에서 시민사회의 새로운 가치를 공동체의 것으로 하기 위해 활동하고 성장했다. 분명 오늘날 시민사회의 성장은 이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동시에 시민운동은 이들 단체의 모습과 동일시되는 현상을 일으켰다. 시민운동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이들 단체의 모습으로 굴절됐다. 어느새 ‘주요 단체’의 공헌 뒤에서 성장한 시민운동이 전혀 다른 성격의 시민운동을 생산하고 있음에도 아직 우리의 사회적 인식에 포착되지 못하고 있다. 시민운동을 여전히 경실련과 참여연대라는 프리즘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시민운동이 오늘날 지닌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이 두 단체 외에도 수많은 단체들의 활동이 뒷받침된 결과물이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단체들이 곳곳에서 우리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나가고, 우리가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영역에 자리해 우리 사회의 빈구석을 촘촘히 메워나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4월 총선은 그간 시민운동에 드리워졌던 제한된 프리즘을 걷어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2000년 총선시민연대라는 90년대 시민운동의 최정점 이후 프리즘을 걷어내는 과정이 계속돼왔다면, 지난 4월 총선은 그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17대 총선은 근대적 정치에 대한 요구와 시민사회의 새로운 사회적 가치에 대한 요구가 함께 병행됐다, 비로소 정상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근대적 정치·사회 개혁의 의제와는 다른 요구들을 ‘새로운 사회적 의제’로 표현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생활정치 영역’이나 ‘급진적 요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90년대 시민운동이 부쩍 성장하면서 다른 사회적 의제들이 분출되고 있었다. 이미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었지만, 후진적 정치 지형으로 인해 중심적 의제로 보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시민운동 역시 경실련·참여연대라는 프리즘에 갇혀 그같은 시민운동의 변화, 시민운동의 성장이 만들어낸 스스로의 변화를 보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대변형 단체들의 생명이 마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 대변형 운동이 90년대처럼 운동의 전부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90년대식 운동은 자기역할을 마감할 뿐이다.

2000년대식 시민운동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야당과 언론에 의해 ‘친노무현 성향’이라고 비판받는 시민운동은 사실 이미 곳곳에서 노무현 정권과 대립하고 있다. 과거청산이나 국가보안법 등의 문제에서 노무현 정권과 인식을 같이하고 있기도 하지만, 파병과 새만금, 부안 방사물폐기장 등의 문제에서는 평화와 생태라는 새로운 사회적 의제에서 노무현 정권과 대립하는 시민운동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앙’은 없다, 중심이 있을 뿐!

시민운동의 정치적 중립은 지역과 보스에 기반한 정치 지형에서, 같은 이념적 성향의 정당들이 다툴 때 그 현실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진출로 상징되듯 정상적 정치 지형 아래서 ‘정치적 중립’은 허상에 불과하다. 90년대 시민운동이 가지고 있던, 우리가 흔히 공공선이라 부르던 공정성·투명성·형평성이라는 가치의 추구라는 점에서 여전히 기존 정치집단들과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겠지만, 생태·평화·인권·성이라는 영역에서 기존 정치집단들과 시민운동이 동일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오히려 시민운동이 그간 대립점을 분명히 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생태적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라는 식의 추상적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동체가 가져야 할 제도와 룰을 제시하는 것은 시민운동이 새롭게 부여받은 숙제다. 시민운동이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90년대 시민운동의 주요한 가치 지향으로 드러났던 어젠다에 머문다면 정치적 편향에 대한 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1997년 '김현철 비디오테이프 파동'으로 사퇴하는 유재현 전 경실련 사무총장.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의 국정 개입 증거가 될 비디오테이프가 '비정상적' 방법으로 경실련에 입수됐고, 이를 경실련이 은폐하려 한 의혹이 제기됐다. 이 사건으로 시민단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운동 방식에서도 변화는 시작됐다. 기존 시민운동이 자신의 방식대로 관성적으로 활동하는 사이에 인터넷을 매개로 대중적으로 확산된 시민운동은 90년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2002년과 2004년의 촛불시위는 동원전략에 기초한 시위문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인터넷의 다양한 카페, 게시판, 블로그를 매개로 한 시민들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참여였다. 서클과 개인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네트워크는 때로는 지역과 이슈를 매개로 오프라인에서 ‘단체’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 거대한 시위가 조직되는 과정은 과거처럼 중앙이 있어서 방침을 정하고 이 방침이 전달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인터넷의 특성 그대로 ‘중앙’은 없다. 다만 여러 중심이 있을 뿐이다. 그 중심은 때로는 시민단체나 서클이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이기도 하다. 이 특성은 이제 서울과 지역의 단체간의 관계도 변화시킬 것이다. 더 이상 단순히 중앙조직의 지부조직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민-민중운동 함께 미래 모색해야

그동안 시민운동의 문제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민중운동과의 연대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민운동 진영에서도 민중운동 진영과의 연대는 당위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위의 문제는 아니다. 시민운동이든 민중운동이든 새로운 사회적 과제에 대한 상호간의 인식 통일 없이 연대는 일회성에 그칠 것이다. 노동운동의 87년 체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제기하는 김동춘·김종엽 교수의 지적은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연대란 기존 두 운동의 기계적 연대가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 90년대와는 다른 운동의 창조를 예지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 진정성이 담기지 않는다면 누구도 운동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는 교훈을 삼보일배를 통해서 LG노조의 파업 실패에서 얻어야 한다. 시민운동에 대한 여러 비판 중에 정치적 편향에 대한 의구심을 씻는 것은 결국 시민운동이 진정성을 획득할 때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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