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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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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헌법을 사랑하리라

등록 2004-09-02 00:00 수정 2020-05-03 04:23

섣부른 ‘헌법개정운동’보다 ‘헌법계몽운동’을… 토론과 운동 통해 ‘해석의 현실’ 바꿔나가야

▣ 박홍규/ 영남대 교수 · 법학

국가보안법과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이 합헌이라는 최근 헌법재판소 결정을 보고 다시 절망한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헌재의 합헌 결정은 종래 태도의 답습이어서 놀랍지도 않으나 그것이 입법에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은 놀랍다. 또 양심적 병역거부가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아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더욱 놀랍다. 이러한 헌재의 태도는-마치 나처럼 헌재 결정에 반대하는 견해는-헌법에 국가보안법은 안 되고 양심적 병역거부는 된다고 규정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헌재는 쟁점이 되는 모든 문제는 헌법 개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 것인가? 그렇다면 헌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동안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은 또 무엇인가?

헌법은 단 하나뿐인 법칙이 아니다

헌재가 위헌이라고 결정한 법률은 물론 합헌이라고 결정한 법률도 개정된 사례는 교사노조의 경우를 비롯하여 많다.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나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도 헌재 결정과는 달리 논의돼야 한다. 헌재 결정은 헌법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 자체가 언제나 바뀔 수 있고, 입법에 의해 그 효력이 부인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헌법에 대한 이해는 다른 정치적 태도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다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극우, 보수, 진보, 극좌이다. 이러한 분류는 탄핵에 대한 논의나 의문사위원회의 최근 결정에 대한 다양한 태도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제대로 된 민주사회라면 극우와 극좌는 그야말로 극소수이고, 진보와 보수가 함께 대세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극우가 대세이고 극좌는 물론 진보와 보수조차 소수라고 본다.

우리 헌법을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국가주의로만 이해하는 극우나 그런 이유로 우리 헌법을 부정하는 극좌는 어느 것이나 헌법에 대한 옳은 이해가 아니다. 따라서 헌법에 대한 이해로 가능한 것은 극우와 극좌가 아닌 건전한 진보와 보수이다. 나는 헌법재판소의 판지와 헌법학의 통설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보수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을 비판하는 진보적인 견해도 우리 헌법에 대한 이해로서 가능하고, 그 진보가 보수와 함께 대세를 형성할 수 있어야 건강한 민주사회라고 본다.

헌법에 대한 증오로 법공부를 시작한 경험

내가 이해하는 헌법은 하나의 원칙이지 단 하나뿐인 법칙이 아니다. 그 원칙이란 보수부터 진보까지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그러나 극우나 극좌로부터는 보호돼야 하는 보편적인 원칙이다. 그러한 해석은 헌재를 비롯한 사법기관이나 행정부 또는 입법부에 의해서도 가능하고, 모든 국민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나는 헌재나 헌법학자들의 헌법 해석도 상당히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나, 그 점도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불만이 있다고 해서 헌법을 진보적인 입장에서 개정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행 헌법을 진보적으로 해석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고,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헌재를 비롯한 우리의 해석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헌법에 대한 증오로 법 공부를 시작했다. 바로 1969년의 3선 개헌이었고, 그 뒤 72년 유신헌법과 80년 헌법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졌다. 왜 이런 증오의 헌법을 공부해야 하는지 끝없이 회의하며 20~30대를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우울하게 허송했다. 그러나 그 참담한 세월은 87년에 민중의 힘으로 개정한 현행 헌법에 의해 일단 끝났다. 그 헌법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새 헌법에 애정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90년에 우리가 비준한 국제인권규약이 우리 헌법을 구성하게 되면서 그제야 법에 대한 심정을 고치게 되었다. 법학도로서, 시민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게 된 것이다. 비로소 분열되지 않은 정신을 갖게 되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아직도 법에 대해 불신감을 갖는 이유 중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 권력에 의해 끝없이 단절된 헌법의 역사가 있다.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를 현행 헌법의 하나로 지속하고 있는 영국의 예를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특히 우리에게 헌법의 지속성이란 법치사회의 기본으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우리 헌법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완전한 헌법이란 있을 수 없고 있었던 적도 없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현행 헌법은 아홉번이나 바뀐 헌법의 역사에서 최상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나마 최선의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해석 여하에 따라 최상의 것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어떤 헌법이든지 그런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한 헌법에 대한 믿음은 가히 물신적이라고 할 정도로 허망할 수 있다. 헌법은 종교적인 교리도, 학문적인 이론도, 정치적인 강령도 아니다.

19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이 ‘민중’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그러나 그 전의 여러 헌법이 독재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개정된 것에 비해 그것은 상대적으로 민중의 민주화 의지를 반영한 것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87년 이후의 사회변화를 겪으면서 가끔 나는 현행 헌법이 더욱 나빠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유신의 망령은 여전히 살아 있고, 더욱이 최근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악몽에서 깨어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유일한 희망으로 헌법을 찾는다.

1987년 이후에도 헌법을 개정하자는 주장이 끝없이 대두됐다. 그 중에서 정략적으로 내각제를 다시 주장하는 것이야 아예 무시한다고 해도 대통령제 중임이라든가 영토 규정 등을 개정하자는 주목할 만한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저 더러운 권력욕이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현실에서 나는 대통령 단임제를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영토 규정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또 헌법의 핵심인 인권 규정에도 문제는 있다. 나도 인권 조항에 생명권이라든가 사상의 자유 같은 것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비준한 국제인권규약이 우리 헌법이 되고 있으므로 그런 미비점은 충분히 보완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제인권규약에서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며, 반대로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거부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번 헌재의 결정이 이미 우리 헌법의 일부인 국제인권규약을 무시한 위헌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국제인권규약 계몽운동 절실하다

우리나라는 물론 북한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비준한 국제인권규약이 우리 헌법의 일부라는 점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특히 보수적인 언론이나 사법기관은 물론 헌법학자들까지 그 중요성을 모르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세계 보편의 인권법으로서 국내외에서 너무나도 중요하다. 거기에 규정된 상세한 인권목록은 우리의 산적한 악법 문제 해결에도 우리 헌법보다 더욱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나는 헌법 개정 자체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보수적이고 심지어 반민주적인 세력이 존재하고 그들에 의한 개정 논의가 무성한 가운데, 개정 논의에는 신중해야 하며 현행 헌법의 내용을 그 해석을 통해 확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해석의 현실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현실을 바꾸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힘겨운 토론과 운동을 통해 꾸준히 바꾸어가는 것이야말로 헌법에 대한 어떤 급진적인 개정 작업보다 중요하다. 필요한 것은 헌법계몽운동이지 섣부른 헌법개정운동이 아니다. 현행 헌법과 그 일부를 이루는 국제인권규약에 대한 범국민적 계몽운동이 급선무이다. 그것만이라도 모든 국민의 뇌리에 뿌리내린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더욱더 발전하리라.

헌법에 대한 정신분열적 악몽은 다시 없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겨우 그것을 벗어났다. 헌법에 대한 경시가 여전히 일반적이고, 헌법에 대한 극우적 농단이 더욱 강해지는 현실에서 헌법에 대한 사랑은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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