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삶이 일치하는 헌법체계를 위해 ‘대통령 4년 중임제’등 민주주의 지혜 모을 때
▣ 박명림/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 정치학
2004년 3월에서 5월까지 진행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사태는 헌법 및 헌법주의(constitutionalism) 문제를 한국 정치의 핵심 문제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 분수령이었다. 쿠데타나 혁명, 전쟁이 아닌 평상의 시기에 분출된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헌법적 충돌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최대의 사건이었다. 민주적 헌법 체계와 민주주의 현실 사이의 거리를 이처럼 잘 보여준 것도 없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준 이 사태는 한국 정치의 거시적·제도적 문제들이 응축된 축도였다.
정치 갈등이 클수록 헌법 문제로 귀결
초점은 우리 사회에서 헌법과 헌법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면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헌법은 제도와 법률을 넘어 한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철학과 비전의 문제인 동시에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삶의 문제이다. 한국에서 헌법 이해는 전혀 다른 두 갈래를 갖는다. 하나는 현실정치에서 헌법을 일상적으로 무시하는 헌법과 정치의 분리 관행이다. 평시 헌법은 우리 사회를 규율하는 합의이자 준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행동의 근본 규범으로 전혀 내화(內化)돼 있지 않다. 다른 한편 한국 현대정치의 주요 격변은 전부 헌법과 헌정 체제를 둘러싼 것이었다. 이승만·박정희 시기의 주요 정치변동들은 물론, 오늘의 민주주의를 정초한 6월항쟁 역시, “호헌선언” 대 “호헌철폐-독재타도”라는 대결 구도가 보여주듯 헌법(체제) 변경 문제가 핵심이었다. 정치 갈등이 크면 클수록 사태의 핵심은 항상 헌법 충돌을 야기하며 궁극적으로는 헌법 문제로 귀결돼왔다.
한국에서 ‘일상정치’와 ‘헌법정치’는 이렇듯 커다란 괴리를 갖는다. 그러한 이중조건에서 최근 우리는, 탄핵 사태와 행정수도 이전을 포함해 국가·사회·행정·인권의 주요 이슈를 가능한 한 헌법 문제로 끌고 가 ‘헌법적 결정’에 의지하려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일상의 사법화’ 흐름을 목도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축시키는 동시에 권리의 보장을 증대하는 정치와 일상의 이중적 사법화 경향을 통해 이제 헌법 체계는 일상적 정치와 삶을 좌우하는 문제로 자리잡아가고 있고, 사법부와 헌법재판소의 ‘사법적 힘’이 아니라 ‘정치적 힘’이 날로 커지고 있다. 민주화와 사법화의 동시진행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산물인 근대 법률 체계가 거꾸로 정치 전반과 민주주의를 규율하는 단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법치는 민주주의와 일치하지 않으며, 양자는 원칙적으로 충돌한다.
복합 상황에 직면한 한국의 민주주의와 헌법 체계는 이제 우리 정치와 삶이 유리된 부분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 문제를 먼저 하나 살펴보자.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왜 ‘모든’ 민주화 이후 정부들은 항상 중간평가 약속, 3당 합당, 내각제 개헌 약속, 재신임 약속, 탄핵 파동과 같은 ‘(초)헌법적’ 사태에 예외없이 직면하였느냐 하는 점이다. 동시에 정당정치의 파괴나 헌법적 약속, 탄핵 파동이 아니고는 여소야대-분할정부 상태를 정상적으로 극복한 정부가 민주화 이후 왜 한번도 없었느냐는 점이다. 이러한 반복은 그것이 이 대통령들의 무능과 정략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일관된 반복은, 국민주권과 대표의 중복과 충돌이라는 헌법 체계의 문제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 대통령 선거와 의회선거의 ‘선거주기’ 충돌 문제를 해소한 가운데, 대통령 임기 사이에 국민주권을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계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통령 선거 이후 국민들이 다음 대선 때까지, 국회의원 선거를 제외하고는, 주권을 행사할 제도적 계기가 존재하지 않을 때 두 헌법기관을 구성하는 주권의 직접대표(대통령)와 간접대표(의회)라는 국민주권 사이의 중첩과 충돌, 그리고 직접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사회의 열정은 제어되기 어렵다. 따라서 다른 수준 사이의 교차적 행사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통령 선거와 선거 사이의 헌법정치의 등장은 해소되기 어렵다. 하나의 대안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임기는 4년 중임으로 변경한다, 대통령 선거와 지역대표 국회의원 선거를 일치시킨다, 비례대표 의원을 지역대표의 2분의 1 수준으로 증가시켜 ‘중간평가’로서 이들 비례대표 선거를 정당명부제를 통해 대통령 임기 중반에 실시한다. 임기, 분할정부, 정당발전 문제를 동시에 접근하여 주권 중복과 충돌, 책임성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인권기구 등을 제4부로 독립시켜야
두 번째는 권리 체계와 권력분립의 체계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고전적 헌법주의에 바탕한 3권분립 체계는 국민국가 형성의 시기에 군주 체제의 독재성과 민주주의의 중우성을 동시에 극복해보려는 서구 자유주의적 헌법공학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참여와 민주의 측면보다는 질서와 안정의 측면에 무게중심이 놓인 틀이다. 이런 체제가 거꾸로 안정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민주화 이전과 이후의 한국의 헌정사가 뚜렷하게 방증하고 있다. 시민·다중·대중의 정치적 진출이 급증하는 현실에서 이들의 참여를 억압하는 기제로는 민주주의와 정치안정 둘 모두를 확보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혁신적 이중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는 요건과 절차의 명확화를 전제로, 국민소환이나 입법청원을 비롯해 입법·사법·행정 체계에 대한 시민참여를 제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대표체계-시민사회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3권분립 개념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참여가 시민사회의 사적 이해관계의 과도한 침투나 공공화를 보장하는 체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는 입법-행정-사법의 3권분립 체계를 넘어 21세기형 4권분립 체계를 도입한다. 즉, 검찰, 감사원, 선거관리위원회, 금융 및 경제감독기구(공정거래위원회 등), 인권기구 등 권리·권력과 이익 체계의 구성·감시·감독기구들을 제4부로 독립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들에 대한 의회통제나 시민통제 역시 보장돼야 한다.
세 번째로 분단·영토·군대역할·평화 관련 헌법 조항들에 대한 심도 깊은 철학적·헌법적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 헌법과 현실, 의무와 권리, 헌법규범주의와 헌법현실주의의 공명 없는 대립 속에 진행돼온 이 문제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공격과 방어가 자주 바뀌는데서 볼 수 있듯 매우 이중적이며, 한국에서 헌법주의의 양면성을 잘 보여준다. 병역의무와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최근의 ‘인권’ 논란 역시 근본은 헌법제정 논리와 영토 조항으로부터 발원한다. 이라크 파병 논란 역시 국가범위·국토방위·국군의 역할에 대한 헌법정신과 규정에 직결된 것이다. ‘특수한’ 영토 문제가 국가 정체성, 나아가 ‘보편적인’ 인권과 평화 문제에 직결되는 이러한 상황은,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타당성과 사실성, 규범과 현실을 둘러싼 헌법정신과 조항에 대한 본격 성찰이 없다면 앞으로도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어떤 방식을 통해 바꿀 것인가
끝으로 남은 중요한 문제는 논의 시기와 참여 범위이다. 먼저 헌법 수정은 선거가 임박하여 몇몇 권력구조 조항을 바꾸는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한 사회의 발전철학과 비전에 직결된 것이다. 선거가 임박할수록 이해대립은 첨예해지고, 때문에 지난 수차의 개헌 역사가 보여주듯 임박한 개헌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헌법 체계를 가질 수 없다. 인간들은 사안에서 멀어질수록 특수이익·당면이익이 아닌 보편이익과 가치를 제도화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지금부터 당장 개헌 논의를 시작해도 사실은 다음 대선 이내에 우리가 이상적인 헌법 체계와 사회질서를 빚어내기에는 우리의 지혜 수준에 비추어 턱없이 부족하다. 다음으로는 새로운 헌법질서 창출의 주체와 관련된 것이다. 즉, ‘어떤 대표들로’ ‘얼마만 한 규모로’ ‘어떠한 방식을 통해’ 헌법 제정(개정)의 주체(기구)를 구성하느냐는 문제이다. 지난 시기 우리는 항상 구헌법 체제의 해체 주체와 신헌법 체계의 창출 주체가 다르다는 특성을 보여왔다. 4·19와 6월항쟁에서 보듯 시민사회는 구헌법 체제 해체에는 앞장섰지만 신헌법 체제 건설에서는 배제, 의회만이 미래 헌법 체제를 독점적으로 창출해왔으나 그것은 당면 이해의 교환으로 그쳐 많은 헌법 문제를 후대에 유증해왔다.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시민사회·학계·전문가 집단들은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이상들을 미래의 우리 삶을 규정할 헌법 체계에 반영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헌법 제정(개정) 시민·사회연대기구의 구성은 그 한 시작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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