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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중 6명이 ‘소수의견’

등록 2004-08-12 00:00 수정 2020-05-03 04:23

뜨거웠던 김재규 재판의 법률논쟁… 변호인들 부당함 항의하다 퇴정당하기도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김재규 전 부장은 1980년 5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최종 확정됐다. 군검찰이 기소한 대로 내란목적살인죄가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 15명의 대법관 중 6명이나 소수의견을 낼 정도로 대법관들간의 법률 논쟁은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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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문기·양병호·임항준·김윤행·서윤홍·정태원 대법관은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의 소수의견을 냈다. 민 대법관은 “10·26은 유신 체제를 강압적으로 변혁하려는 의도에서 저지른 것이긴 하지만, 10·26 이후 유신헌법을 개헌하자는 게 국민적 합의였음으로 (김 전 부장이)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 양 대법관은 “헌법기초위원회를 설치해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하려고 했다는 (김 전 부장의) 진술 등을 종합해볼 때, 10·26은 헌법 개정 절차를 무시하고 헌법을 파괴하려는 의도에서 저질렀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6명의 대법관은 모두 ‘괘씸죄’에 걸려 유죄 판결을 내린 다른 대법관들보다 일찍 옷을 벗어야 했다. 정태원 대법관을 제외한 5명은 1980년 8월9일자로 사표를 냈고, 정 대법관은 81년 4월 대대적으로 단행된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김 전 부장에 대한 1, 2심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1심인 보통군법회의가 79년 12월4일 시작돼 같은 달 18일 끝나는 등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재판은 김 전 부장에 대한 심문을 비롯한 대부분의 심리가 비공개로 진행됐고, 변호인들의 재판기록 열람과 복사가 불허되기도 했다.

이 재판이 군사법정에서 진행된 것도 ‘불법’이었다. 10·26은 계엄령 선포 이전에 한 행위인데, 재판이 진행된 기간이 계엄 상황이었다는 이유로 군사재판으로 진행됐다. 무료로 변론에 나선 변호인들은 내란죄의 부당함을 입증하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변호인들은 재판 절차의 부당함을 항의하다 강제로 퇴정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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