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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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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포로, 럼즈펠드!

등록 2004-05-12 00:00 수정 2020-05-02 04:23

미 정치권 힘겨루기로 비화된 이라크인 포로 성학대… 부시는 어떻게 세계인의 분노를 누그러뜨릴까

워싱턴= 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미국의 방송이 10여장의 이라크인 포로 성학대 사진을 보도한 것은 4월28일 저녁 8시30분(워싱턴 시각)이었다. 사진들은 끔찍했다. 이라크 주둔군사령부 대변인인 마크 키미트 준장은 앵커 댄 래더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우리도 경악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뒤흔든 사건은 그렇게 시작됐다.

워싱턴의 분노와 당혹감

그 다음날 워싱턴은 의외로 조용했다. 저녁에 방송이 나갔으니 이튿날 조간신문들은 충분히 이 기사를 크게 다룰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가 상자기사로 방송 내용을 다룬 게 거의 유일했다. 그것도 1면이 아니라 국제면 한 귀퉁이에 실었을 뿐이다.
등 케이블 뉴스 방송들도 차분했다. 미국에서 사건의 중요성은 케이블 뉴스 방송들의 보도를 보면 대충 알 수 있다. 24시간 뉴스만 내보내는 등은 얘기가 되는 사건이다 싶으면 거의 하루 종일 그 사건으로 전체 프로그램을 채우다시피 한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전쟁 상황에서 미군의 치부를 헤집는 일을 미국 언론들은 내켜하지 않았던 것 같다.
파장은 의외로 백악관에서부터 커지기 시작했다. 4월30일 부시 대통령이 “(사진들을 보고)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며 관련자 엄벌 방침을 밝혔다. 이미 이때는 아랍 방송·신문들이 머리기사로 이 사실을 전하면서 국제적인 분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부시 발언을 기폭제로, 그날 오후부터 케이블 뉴스채널들이 이 사건으로 화면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등 거의 모든 신문의 1면 머리기사엔 이라크인 포로 성학대 사건이 올랐다.
사건을 바라보는 워싱턴의 분위기는 ‘분노’와 ‘당혹감’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데 대한 정서가 ‘당혹감’이라면, ‘분노’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에게 쏠리는 것이었다. 특히 의회의 분위기가 험악했다. 의 한 리포터는 의회의 반응을 전하면서 “의원들은 국방부가 이런 사실을 전혀 의회에 알리지 않은 데 대해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내 여론의 흐름은 의 5월4일과 7일 독자투고란에서 어느 정도 짚어볼 수 있다. 는 4일과 7일, 이례적으로 독자투고란의 3분의 2를 털어 이 사건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을 실었다. 4일치 독자투고란의 주된 흐름은 조지 부시 대통령이 아랍국가들과 전 세계에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시는 6일 공식적으로 “미안하다”(sorry)고 말했다.
7일치 독자투고란의 주요 이슈는 부시가 이틀 전 백악관 집무실에서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강하게 질책했다는 내용이었다. 의견은 다양했다. 상당수 독자들은 럼즈펠드 장관의 경질을 주장했다. 자신을 ‘보수적 공화당원’이라고 소개한 한 독자는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럼즈펠드 장관을 질책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시가 고위관료를 질책한 사실이 공개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현 내각의 실세 중 실세로 통하는 럼즈펠드를 질책했다니 당연히 언론과 세인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의회와 행정부에서 럼즈펠드 책임론이 커지는 상황에서, 백악관 고위관리들이 이런 사실을 언론에 공개한 것 자체가 의미심장했다.
럼즈펠드 장관의 진퇴 문제가 핵심 이슈로 떠오르는 데엔 사건 보도 이후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에서 럼즈펠드가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었다. 그는 딕 체니 부통령과 함께 부시 정권의 강경 노선을 떠받쳐온 핵심 실세였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두 차례 전쟁이 모두 그의 ‘선제공격론’에 근거해 이뤄졌다. 전술적으론 적은 병력으로 신속하게 전쟁을 수행하는 기동전의 개념이 도입됐다.
럼즈펠드가 강경파인 건 분명하지만, 그가 이른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인지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그와 딕 체니 부통령,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 3명을 부시 행정부 내의 대표적인 ‘네오콘 3인방’이라고 규정한다. 이들 3명이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정책을 밀고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네오콘 이론가인 발행인 윌리엄 크리스톨의 시각은 좀 다르다. 전 세계에 미국의 가치를 확산시키려는 네오콘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라크 상황이 악화되자 어떻게든 발을 빼려는 럼즈펠드는 진정한 네오콘이 아니다. 크리스톨에게 현 정부 내 네오콘은 중동 민주화를 줄기차게 부르짖는 폴 울포위츠 한명뿐이다.


럼즈펠드 경질은 곧 부시의 외교노선 실패를 인정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지난해 8월 이후 이라크 상황이 계속 악화돼도 정책 실패를 단 한번도 인정하지 않은 부시였다. 이번에 성학대 사건을 사과한 것도 자존심 강한 부시에겐 매우 뼈아픈 상처였다. 그가 어떤 일이 있어도 럼즈펠드를 경질하지 않을 거란 관측은 여기서 나온다. 또 딕 체니 부통령이 아직까지 든든하게 럼즈펠드의 보호막이 돼주고 있다. 평소의 부시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럼즈펠드를 바꾸지 않을 것이란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아직까지 부시 행정부는 럼즈펠드를 보호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다. 부시는 5월6일 “럼즈펠드는 내각에 계속 남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바로 그 다음날 가 사설을 통해 럼즈펠드 퇴진을 강하게 요구하자, 딕 체니 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나서 “럼즈펠드는 역대 가장 뛰어난 국방장관”이라고 옹호했다.
그러나 올 11월의 대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 변수다. 부시의 현 백악관 진용은 정책보다는 ‘정치 라인’으로 통한다. 11월 대선 승리보다 더 중요한 고려사항은 이들에게 없다. 부시 행정부 내의 럼즈펠드 경질론과 보호론 모두 “11월 대선에서 어느 게 유리한가”라는 정치적 판단과 맞닿아 있다.

럼즈펠드 물러나면 그 다음은 부시?

부시 대통령의 정치참모들은 대체로 ‘럼즈펠드 경질’이란 카드를 계속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부시가 럼즈펠드 지지를 표명한 직후, 는 백악관에 가까운 공화당 인사들의 말을 빌려 “앞으로 새로운 사실이 공개돼 더 큰 타격을 입게 되면 럼즈펠드 경질은 여전히 하나의 선택 방안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도 “일부 대통령 보좌관들은 럼즈펠드 퇴진이 부시와 이번 사건을 분리하고, 재선운동을 다른 이슈에 집중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전했다.
럼즈펠드는 5월7일 상원 청문회에 나와 “나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 국방장관직 유지가 사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 즉각 사퇴하겠지만, 정치쟁점화하려 한다면 사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지금의 사퇴 요구를 민주당의 정치공세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 조사결과에 따라 거취를 결정짓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실 부시 행정부에겐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는 수순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문제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를 관할했던 재니스 카핀스키 준장까지는 이미 처벌선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걸로 전 세계적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는 없다. 205 육군 정보부대장 등 일부 계선상의 지휘관을 문책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이미 공론화된 사실이다. 그렇다고 지휘책임을 물어 이라크 주둔군사령관인 리카도 산체스 중장이나 존 애비자이드 중부사령관을 문책하기도 힘들다. 이렇게 되면 이라크 지휘체계가 무너져버린다.
계속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일선 미군의 지휘체계를 보호하면서 국내외 여론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은 역시 민간인 출신인 국방장관을 바꾸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거듭된 지지 표명에도 럼즈펠드 퇴진론이 가라앉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시에게 럼즈펠드는 이제 계륵과 같다. 민주당이 거당적으로 럼즈펠드 퇴진을 몰아세우면서, 그의 퇴진 자체가 대선을 앞둔 공화-민주당간 힘겨루기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럼즈펠드를 바꾸면 그건 민주당 정치공세에 밀리는 게 된다. 보수적인 은 “럼즈펠드가 물러나면 그 다음은 부시 차례”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미국 내 여론이다. 5월8일 공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 국민의 69%는 럼즈펠드 경질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럼즈펠드는 5월7일 열린 상원 청문회에서 “더 많은 사진과 비디오가 존재한다. 이것들이 공개되면 문제가 더욱 악화한다”고 토로했다. 앞으로 공개되는 사진과 비디오에 세계 최강대국 국방장관의 운명이 걸려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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