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은 대박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쟁점을 찾기 어렵다. 민주통합당 당 대표 경선 얘기다. 시민들의 참여 열기는 뜨거운데, 후보들의 경쟁은 싱겁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하다. 1월15일 최종 결과가 민주당의 혁신과 변화로 나타날 수 있을지 물음표가 던져진다.
70만 선거인단 흥행 예상
지난 1월5일 대전 서구 만년동 청소년문화센터에서 열린 합동연설회장. 몇몇 후보는 ‘충청도와의 인연’을 강조했다. 한명숙 후보는 “총리 재임 시절 세종시라는 이름을 제가 지었다”고 자랑했고, 박지원 후보는 “원내대표 시절 과학비즈니스벨트 충청 유치를 도왔다”고 말했다. 박영선 후보는 “4년 전 대선 때 충청도 와서 표 달라고 외치던 이 대통령, 지난 4년간 해준 게 뭐 있느냐”라며 지역 민심을 건드렸다. 다른 후보들의 연설은 전날 광주 연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각 후보 캠프에서 “정치적으로 쟁점도 없고, 후보 메시지도 없어서 실패하고 있는 경선이다. 한나라당에 밀리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쏟아졌다.
썰렁한 연설회장과 달리, 민주당 시민선거인단 모집은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다. 1월5일까지 44만7천 명이 등록했다. 1월7일 마감 때까지 당비 납부 당원(12만 명)과 대의원(2만1천 명)을 합해, 선거인단이 70만 명 가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예상 흥행치인 30만~35만 명의 두 배 수준이다. 모바일투표 덕분이다. 시민선거인단 93%가 모바일투표를 선택했다. 인터넷이나 전화로 간단한 인증 절차만 거쳐 선거인단으로 등록한 뒤, 휴대전화로 집이나 사무실에서 투표할 수 있다는 편리함 덕분이다.
모바일투표 도입으로 선거인단 구성이 크게 변했다. 1월5일 집계를 보면, 수도권 27만 명, 호남 9만5천 명, 영남 4만3천 명 등으로 수도권이 강세다. 공식 통계를 밝히지 않았지만, 당 관계자들은 39살 이하 유권자가 많다고 얘기한다. ‘호남 중·장년층’이 주력 부대였던 옛 민주당 지지층 분포와 다르다. 모바일투표가 경선 결과를 좌우할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전히 ‘한명숙 대세론’이 있지만, 모바일투표로 인해 지역위원장 줄 세우기와 대의원 오더(명령) 내리기 등 조직을 동원해 당권을 장악하려는 옛 방식이 좀처럼 먹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인2표제 방식에서 후보들끼리의 짝짓기 효과도 발휘되기 어려울 것 같다. 시민 지지층이 당권을 결정하는 새로운 정치의 출현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흥행 열기는 뜨거운데, 왜 경쟁은 싱겁게 진행되고 있을까. 1월4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범구 최고위원은 “뭔가 허전하다. 시민참여로 민주당을 바꾸자고 하는데,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가자는 것인지, 중요한 방향성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없다”고 말했다. 야권의 뜨거운 현안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폐기 후 재협상’이라는 총론만 밝힐 뿐, 후보들 사이에 구체적인 전략과 접근 방식에 대한 논의는 없다는 지적이었다. 진보신당 출신인 박용진 후보가 1월3일 국회 정론관에서 한 ‘공약 발표’는 색다르기까지 했다. 박용진 후보는 “당 대표 선거를 하면서 공약 발표도 안 하는 게 문제”라며 “제1야당, 수권야당의 대표를 뽑는데 이 당이 어디로 갈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대세론’에만 매달리는 선두권 후보들
각 캠프에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등의 두 차례 조문 정국에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시민선거인단에 대한 대응 전략을 짜느라 초기 전선을 만들기 어려웠다는 주장도 편다. 그러나 이는 핑계에 가깝다. 오히려 상위 후보들이 쟁점 형성을 회피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바탕으로 무난하게 당선되려는 전략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바라는 건 인기투표가 아니다”라는 박용진 후보의 말은 한명숙·문성근·박영선 후보 등 몇몇 여론조사에서 상위를 차지한 후보들을 겨냥한 것이다. 그는 “다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과 무슨 인연이 있다, 당시 정부에서 무슨 역할을 했다는 얘기만 하고 있다. 이게 국민이 원하는 얘기냐”며 “적극적으로 자기 정책을 내놓고, 훈훈한 선거보다는 치열한 논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선거인단은 무엇을 기준으로 표를 던질까. 대세론을 인정할까, 아니면 이변을 연출해낼까. 당의 한 관계자는 “시민선거인단이 어떤 기준으로 후보를 선택할지 감이 잘 안 온다. 정말 오리무중 선거”라고 말했다.
한명숙 후보 쪽은 시민선거인단의 규모가 예상보다 커졌지만 ‘대세론’을 유지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명숙 후보 캠프의 오영식 대변인은 “50만 명이 넘어가면 일반적인 여론조사 추세를 반영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캠프의 한 핵심 관계자는 “유권자들의 판단은 통합적 리더십을 누가 발휘하느냐가 첫째고, 그다음으로 변화와 혁신”이라며 “이번 경선 과정에서 주요 쟁점이 부각되지 않고 있는데,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명숙 대표’와 친노 그룹을 중심으로 당내 계파가 두루 섞인 ‘통합형 지도부’를 원한다는 얘기다.
다른 후보들은 “시민선거인단은 민주당을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진 적극적인 참여층이므로 일반 국민 여론조사 결과와는 크게 다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통합 명분을 내세우는 한명숙 후보와 좀처럼 대립각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중위권으로 분류되는 후보 쪽 관계자는 “검찰에 엄청 당하고 나온 한명숙 후보에게 ‘당신이 당 대표가 되는 게 무슨 변화냐’라고 공격하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시민선거인단의 성향 파악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직표마저 잃지 않으려는 눈치 보기 측면도 있다.
그나마 몇몇 후보가 ‘인적 쇄신’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한명숙 후보는 “공천 혁명을 하겠다”는 원론적 견해만 되풀이하고 있다. 4·11 총선 대구 출마를 선언한 김부겸 후보는 1월4일 대선주자 강남 출마론에 이어, 1월5일에는 “무능력한 과거의 인물은 물러나라”고 외쳤다.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온 이인영 후보는 1월4일 광주에서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이유로 서너 번 공천을 주는 낡은 정치의 종말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이학영 후보는 “호남 출신인 제가 호남 정치인들의 기득권 포기를 주문하겠다”고 말했다. 광주·전남 지역 유세와 TV 토론회에서 민주당 기득권의 핵심인 호남 물갈이에 대해 언급한 선두권 후보는 아무도 없었다.
지도부 경선이 공천 개혁 성패 가를 것
민주당의 이번 경선은 민심과 당심의 차이를 좁혀나가려는 정치 실험이다. 하지만 구체적 정치 쟁점을 놓고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되지 않으면 인기투표나 여론조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민주당 쪽의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민주당은 총선 공천에서도 모바일투표를 통한 시민참여경선을 도입하기로 했다. 이번 지도부 경선이 공천 개혁의 성패를 가늠할 잣대인 셈이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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