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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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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초엘리트’를 부른다

등록 2002-08-28 00:00 수정 2020-05-02 04:22

기업들마다 전략적으로 극소수 핵심인재들 특별관리… 5대95의 패러다임으로 급속 이행 중

LG화학 영업혁신팀의 전호진 과장은 1년6개월짜리 ‘글로벌 E-MBA’ 과정을 미국에서 마치고 지난 6월 돌아왔다. 연수비용은 1억원에 가깝다. 퇴직금과 집 판 돈으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떠나기도 하지만 그런 사례와 다르다. LG가 그룹 차원에서 중역급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었다. “회사에서 저한테 커리어를 쌓기 위한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큰돈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 회사의 기대도 클 겁니다. 앞으로 큰 프로젝트 등 여러 업무를 맡을 기회가 주어지겠죠.”

뽑힌 사원만 아는 'HP그룹'

지난해 LG그룹 전 계열사에서 전 과장을 비롯해 30여명이 E-MBA 과정을 다녀왔다. 굴지의 대기업이지만 뭔가 확실하게 믿는 구석이 없었다면 거액의 회삿돈을 들여 과장급 사원을 유학 보냈을 리 없다. 바꿔말하면 회사쪽에서 볼 때 전 과장은 ‘투자 가치’가 충분한 사원이다. LG화학 인력팀 안종찬 부장은 “글로벌 E-MBA 대상자를 선발할 때 개인 희망도 있겠지만 조직의 권유도 중요하다. 어쩌면 권유라기보다 조직의 ‘요구’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회사가 전략적으로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이는 전 과장의 말이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제가 회사의 ‘HPI’ 그룹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E-MBA 대상자로 뽑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HPI 그룹 안에서 다시 내부 선발과정을 거쳐 뽑힌 거죠.”

‘HPI’(High Potential Individual·높은 잠재력을 갖춘 개인)는 LG화학이 내부적으로 분류하고 있는 핵심인재그룹이다. 쉽게 말해 회사가 분류한 극소수의 ‘특별관리대상’ 인재들인데, 미래의 임원 또는 최고경영자(CEO) 후보클럽이라고 할 수 있다. 4천여명의 사무관리직 사원 가운데 155명이 HPI 그룹에 선발돼 있다. 이 클럽의 멤버는 대졸 임직원의 5% 이내로 제한된다. 물론 비공개가 원칙이다. 다만 HPI에 든 본인한테는 “회사가 주목하는 소수 핵심인재군에 당신이 포함됐다”고 알려준다.

기업들의 과거 해외연수 프로그램은 직원 복지차원에 그쳤다. 그러다 보니 일에서 몇 개월 빠져도 큰 문제가 없는 사람을 골라 연수를 보냈고, 연수를 갔다온 뒤에는 인사고과에서 형편없는 점수를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단 몇 개월의 교육연수라도 ‘조직의 요구’가 없다면, 즉 회사가 전략적으로 키울 핵심인재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연수기회를 얻기 어렵다. 회사의 연수 프로그램에 선발되는 것 자체가 극소수 핵심인재로 공인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해외연수 등을 통해 직장에서 성장하려면 우선 기업마다 몰래 따로 관리하고 있는 핵심인재클럽에 들어야 한다.

제일제당의 핵심인재클럽은 ‘HCL’(High Competent Leader·높은 경쟁력을 갖춘 리더)로 불린다. HCL에 드는 사원은 전체 임직원 4300여명의 5% 이내로 묶여 있다. 대부분 간부급 이상이지만 일부 고참 대리급도 HCL에 끼어 있다. 제일제당 최양기 상무는 “직원들한테는 이런 제도가 굴러가고 있다는 정도만 알려준다. 엘리트 인재군에 들어 있는 본인조차 그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회사로부터 “당신 한번 경영학석사(MBA) 과정에 갔다오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으면 그때서야 ‘아, 내가 회사에서 특별관리되고 있구나’ 하고 감으로 느낄 뿐이다. 삼성생명은 임직원 6500여명 중 1%에 해당하는 사람을 핵심인재 풀로 별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임원이 맨투맨 식으로 전담 관리

“21세기는 인재확보 전쟁(War for Talents)의 시대”(매킨지의 굽타 회장)라는 말처럼 기업마다 치열한 인재유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탁월한 인재 한명이 천명, 만명을 먹여살린다”며 계열사 사장단한테 인재의 글로벌 아웃소싱을 주문했다. 이런 치열한 인재확보 전쟁은 외부 인재 스카우트뿐만 아니라 기업 내부에서의 핵심인력의 발굴·육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내부 인재육성은 LG화학의 ‘HPI 클럽’이나 제일제당의 ‘HCL 클럽’이 보여주듯 ‘선택과 집중’의 논리가 지배한다. 전 세계가 ‘20 대 80’의 부익부 빈익빈 사회로 가고 있듯 회사 내부는 ‘5 대 95’의 패러다임으로 급속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재경영 방식에서 ‘5%’에 드는 핵심인재에게는 CEO 및 임원급으로의 성장 기회가 전사적으로 부여되지만, 나머지 95%의 ‘보통인재’는 철저히 소외된다. 바야흐로 ‘기업 내 초엘리트 계층’의 탄생이라고 할 만하다.

핵심인재클럽에 든 직원한테는 연봉에서의 보상뿐만 아니라 해외연수 및 다양한 직무순환 등 각종 혜택이 집중적으로 부여된다. 해외연수로 글로벌 역량을 키우고, 여러 직무를 순환시킴으로써 커리어가 한 분야에 치우치는 것을 막다. 장래의 임원 및 CEO로 키우기 위해 길을 터주려는 것이다. 삼성생명 박영세 상무는 “핵심인재로 분류된 사람은 회사 차원에서 지원해준다. 임원이 맨투맨식으로 전담 관리하면서 회사의 미래를 끌고갈 리더로 키워준다”고 말했다.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팍팍 투자하면서 회사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배려해주는 것이다. 이런 극소수 핵심인재 위주의 인사 시스템은 ‘1%가 회사 전체를 먹여살린다’는 논리가 뒷받침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최병권 연구위원은 “미국의 거대 다국적기업인 콜게이트사 쿡 사장은 ‘나는 500여명의 핵심인재 후보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개개인별로 어떻게 육성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기업에서도 장래의 사장감으로 키울 인재들을 조기에 발탁해 핵심인재 풀을 구축하는 작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기업의 성패는 인재에게 달려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SK그룹은 최근 인재확보·유지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손질하고 있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했던 기존의 낡은 시스템은 폐기처분하고, 대신 핵심인재군 선발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인재경영 체계를 짜고 있다. SK그룹의 사례에서 보듯, 극소수 핵심인재 위주의 경영은 누가 하라고 해서 따라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라고 말한다. SK(주)는 최근 새로운 인재양성 프로그램을 짜는 과정에서 126개 팀, 10개 사업부 가운데 향후 2∼3년간 회사가 보유해야 할 핵심 우수인재를 전체 인력의 5% 수준으로 잡았다. 이런 소수 핵심인재 전략은 ‘키 탤런트(key talents) 확보’로 이름 붙였다. SK(주) 인력팀 송상훈 과장은 “우리는 2004년을 목표로, 부족한 핵심인재 확보 전략을 전사 차원에서 고민하고 있다. 전 임직원 중 몇%를 핵심인재군으로 잡을지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입사 2∼3년차 때부터 조기 발굴

그렇다면 소수 핵심인재클럽에 드는 사람은 어떻게 선발되는 것일까. 흥미로운 건 몇년간의 성과 및 인사고과만으로 핵심인재가 선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전 임직원의 5% 이내를 핵심인재군으로 잡고 있는 LG CNS는 이른바 ‘도전과제’를 던져 개인별 잠재력을 평가하고 있다. LG CNS 김진구 채용팀장은 “도전과제는 당장의 능력을 넘어서는 어려운 과제인데, 이 과제를 통해 핵심인재 풀에 편입할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릴 수 있다”고 말했다. LG화학은 ‘시련과정’을 통해 핵심인재 풀 대상자를 추려낸다. 예컨대 평소 그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120∼130에 해당하는 ‘스트레치 골’(Stretchy Goal·확장 목표)을 던져본 뒤 ‘HPI’ 풀에 넣을 것인지를 판단한다. 사업부별로 대상자를 뽑아 올리지만 최종 선발은 임원급으로 구성된 경영위원회에서 이뤄진다.

특정분야의 전문인력과 핵심인재 풀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전문성을 갖고 해당 업무에서 큰 성취를 이룬 사람한테는 성과에 따른 보상을 해주는 것으로 끝이다. CEO로 키워갈 부류는 핵심인재군인데, 당장 큰 성과를 냈다고 해서 꼭 핵심인재 풀에 들어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큰 성과를 낼 만한’ 자질과 잠재력을 갖고 있는지가 핵심인재 풀에 드느냐 못 드느냐를 가른다. 제일제당 최양기 상무는 “도전정신만 보더라도 이제는 패기 그 자체가 아니라 분명한 ‘사업가적 기질’을 갖고 있는지가 인재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말했다.

핵심인재 풀에 드는 사람은 중간관리자급 이상일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대개 입사 2, 3년차의 초급사원 단계부터 회사는 소수 핵심인재를 조기 발굴하기 시작한다. LG화학 안종찬 부장은 “HPI에 들려면 2년간 인사고과에서 A등급 이상을 받아야 한다. 입사 2∼3년차부터 능력과 잠재력을 평가해보면 ‘HPI’에 넣을 인재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번 핵심인재 풀에 뽑혔다고 국회의원처럼 자리가 보장되는 건 아니다. 제일제당은 엘리트 집단에 들었더라도 나중에 ‘이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판단되면 즉각 탈락시킨다. LG화학 역시 HPI로 분류된 150여명 중 20∼30명을 해마다 퇴출하고 새로 선발하고 있다. ‘특별관리대상’ 인재를 끊임없이 교체하는 방식으로 엘리트 풀의 자유로운 진출입을 보장함으로써 직원들 간의 경쟁을 확대하는 것이다.

전략적으로 키워주고 있다는 비전!

그동안 기업들은 핵심인재가 딴 데로 옮기려 들면 그때서야 회사에 남는 조건으로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해 붙잡곤 했다. 그런 점에서 요즘의 핵심인재군 분류는 인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체계적인 관리의 성격도 띠고 있다. LG화학은 “외부 스카우트 제안을 받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시절이어서, HPI 그룹에 속한 사람한테는 회사가 전략적으로 키워주고 있다는 비전을 끊임없이 심어준다. 그러면 다른 곳으로 떠나려는 유혹을 떨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회사와 직원의 관계가, ‘회사가 책임져줄 테니 복종하라’는 형·아우 관계에서 배반을 밥먹듯 하는 ‘동거’ 관계로 바뀐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누구누구가 핵심인재 풀에 들어 있는지를 공개하는 회사는 아직 없다. 대부분의 기업은 다른 동료의 연봉을 비밀에 부치듯, 핵심인재 풀의 명단도 내부적으로만 관리한다. 핵심인재그룹의 존재가 완전히 공개되면 조직의 응집력 훼손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SK(주) 송상훈 과장은 “우리 기업의 정서상 핵심인재 명단을 공개하는 건 부담스럽다. 어떻게 회사가 ‘너는 핵심인재고, 너는 그저 그런 범용적 인재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대다수 ‘보통 인재들’은 거액 연봉을 받고 온 외부 스카우트 인재에 눌리고 있는데, 내부에서 또다시 핵심인재그룹에 밀리면서 소외감이 더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SK(주)에 다니는 ㄱ씨는 “한번 뽑은 직원을 회사가 끝까지 책임져주는 시대가 아니라고 하지만 핵심인재 풀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도대체 일할 맛이 나겠느냐?”고 되물었다. 비록 평생직장 개념이 깨진지 오래지만 다니고 있는 회사는 여전히 생계의 보루다. 그렇지만 정작 회사는 한솥밥 먹는 직원들을, 전사적으로 키워갈 극소수의 초엘리트와 떠나도 그만인 대다수 보통사원으로 확연히 가르고 있다.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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