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는 여성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패션경향… 캐주얼+레포츠의 ‘캐포츠 스타일’도 인기

“그렇게 입고 다녀도 회사에서 안 잘리냐?”
회사원 임은영(29)씨가 처음 ‘추리닝 패션’을 선보였을 때 부모는 혀를 찼다. 친구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슈퍼마켓 갔다 오는 거니? 일하고 오는 거니?” 하지만 옆단에 줄이 들어간 트레이닝 바지에 굽 높은 힐까지 신고 나서는 감각에는 두손 다 들었다. 임씨는 트레이닝 하의에 배꼽선 정도까지 오는, 달라붙는 웃옷을 걸치고 스포티한 핸드백을 들어 분위기를 맞춘다. 섹시한 스타일을 연출하고 싶으면 어깨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상의에 어깨끈이 살짝 보이는 색깔 있는 속옷을 입기도 한다. 지금까지 임씨가 하나둘씩 구입한 트레이닝 바지는 10벌이 넘는다. 몸을 조이면서도 편안히 달라붙는 스판 면바지, 발목 부분에 지퍼가 달려 신발에 따라 통을 조절할 수 있는 것, 조직이 듬성듬성 짜여 시원해 보이는 것, 반짝거리는 질감 때문에 고급스런 느낌을 주는 벨벳 트레이닝 등 색깔·소재별로 다양하다. 임씨가 트레이닝복을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몸도 마음도 편하기 때문에.” 그는 “몸을 억지로 옷에 맞춰 긴장시키지 않고, 활동성 있는 차림새를 하고 있으면 사무실에서도 저절로 능률이 오른다”고 말했다.
“몸도 마음도 편하기에…”

대학원 동료들 사이에서 옷 잘 입기로 소문난 이아무개(26)씨도 최근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를 한벌 샀다. 이씨는 본래 단정한 느낌의 정장을 주로 입어 어른스럽고 클래식한 스타일로 등교하곤 했다. 그러던 그가 빨간 줄 선명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게 된 것은 유행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트레이닝복에 맞춰 산 검은색 스니커즈에 모자 달린 점퍼를 입고 강의실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2003년 봄 대학가 풍경에서 조금도 어색할 것이 없다.

‘추리닝’이 변신했다. 운동할 때 땀만 잘 빨아들이면 되는 기능성 체육복이거나 집에서 뒹굴 때 입는 무릎 나온 홈웨어가 아니다. 집과 헬스센터 울타리를 넘어 사람들 북적이는 길거리에 나가도 아무런 문제없는 일상 패션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스니커즈나 낮은 굽 구두, 모자 달린 면티나 청자켓 등과 함께 입는 것은 물론이고, ‘패션 리더’들은 흰 줄이 2~3개 들어간 ‘명백한’ 트레이닝 바지를 아예 정장 자켓 아래 받쳐 입어 부조화된 느낌을 더욱 즐기기도 한다. 번쩍이는 비닐 질감을 위아래로 빼 입거나, 목선이 깊이 패인 알록달록한 나시 면티에 맞춰 입기도 한다.

이처럼 트레이닝복이 강세를 보이는 것은 여성들이 몸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하나의 트렌드로 등장한 까닭이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창 사이로 배꼽이 드러난 탱크톱과 하체 선이 잘 드러나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러닝머신을 달리는 모습은 많은 여성들의 이상적인 자기 관리 모델이 됐다. 이른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넓은 거실에서 러닝머신을 달리던 탤런트 이영애가 “○○가 나를 바꿨다”며 땀을 씻는 광고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몸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가냘픈 몸매를 넘어 적당히 붙은 근육과 활기 넘치는 태도, 당당한 삶의 자세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식이 조절을 통한 ‘굶는 날씬함’이 아니라 ‘운동하는 건강함’이 새로운 몸의 키워드가 된 것이다. 기계를 이용한 헬스, 에어로빅 말고도 요가, 다이어트 복싱, 복싱·태권도·가라테가 혼합된 콴도, 태권도·에어로빅이 합쳐진 태보 등 피트니스 산업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자신을 가꿀 수 있는 운동을 할 때면 어디든 입을 수 있는 옷들도 다양해졌다.
영화 에서 제니퍼 로페즈가 맡은 역할도 몸에 대한 여성들의 새로운 인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수년 동안 남편에게 두들겨 맞다가 아무리 도망쳐도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정정당당하게’ 힘으로 맞서 남편을 죽이는 슬림 역을 맡았다. 슬림은 이 ‘거사’를 위해 석달 동안 이스라엘 여군들의 격투술인 크라브마가를 배운다. 슬림이 다양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땀범벅이 된 채 고양이처럼 유연하고 표범처럼 맹렬한 크라브마가를 배우는 모습은 잘 다져진 팔다리 근육과 근사하게 어울린다.
여성이 주도하는 스포츠웨어 시장

운동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남성 중심이던 스포츠웨어 시장은 여성이 주도하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스포츠 브랜드인 푸마코리아만 해도 2000년까지는 전체 고객 중 여성이 25%에 불과했으나 2001년에는 60%, 2002년에는 80%로 늘어나 여성 파워를 실감케 하고 있다. 푸마코리아의 김은정 대리는 “월드컵 이후 여성들이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했고 주5일 근무로 주말에 레포츠·스포츠를 즐기는 여성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외모를 중시하는 다이어트 열풍으로 운동을 통해 밝게 자신을 표현하려는 여성들이 당당하게 스포츠를 즐기기 시작한 것도 이런 변화를 부채질했다”고 분석했다. 푸마코리아는 올해도 역시 고객의 80%를 여성으로 잡고 있다. 주 소비층이 여성이다 보니 기능성과 더불어 패션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다양한 스타일이 쏟아져 나오고, 그 결과 일상생활 속에서 입어도 아무런 부담 없이 편안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옷들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스포츠 브랜드들은 이런 변화를 때로는 선도하고 때로는 따라잡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기능성을 살리면서도 섹시하고 아름다운 스포츠룩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푸마코리아는 지난해 가을 ‘피트니스 라이프 스타일’을 내세우며 면과 혼방으로 된 탱크톱과 긴 바지 스타일을 선보여 시장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에 힘입어 올봄엔 탱크톱 위에 덧입을 수 있는 간편한 점퍼와 밑단이 갈수록 넓어지는 트레이닝 바지를 출시했다. 이후엔 좀더 다양한 톱과 길이가 남성용으로 주로 인식돼온 나이키는 브랜드 이미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3월부터 여성을 겨냥한 광고를 내놓았다. 매장에 들어서면 바람을 가르며 새벽길을 달리는 근육질의 여성이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가을에는 현장에서 개발·시험한 여성용 피트니스웨어를 본격 출시할 계획이다. 수영복·에어로빅복 등으로 ‘고기능성’ 스포츠웨어 브랜드 이미지를 쌓아온 국내 브랜드 레노마짐도 2000년 피트니스웨어를 시작할 때는 몸에 쫙 달라붙는 레깅스 위주였다가 점차 운동 영역을 넓히면서 공공 장소에서 덧입는 바지, 스포츠 브래지어 위에 덧입는 짧은 티셔츠 등 다양한 개념의 옷들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아디다스 역시 평상시에도 쉽게 입을 수 있는 옷들로 구성된 ‘아디다스컬러스’로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아이다스컬러스는 농구공의 오렌지색, 테니스공의 노랑, 잔디의 초록, 복싱 글러브의 빨강 식으로 여러 가지 스포츠를 다양한 색감으로 표현했다.

스포츠웨어가 이처럼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패션계에선 몇년 전부터 일군의 디자이너들이 예감해왔던 것이다.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는 3년 전 파리 컬렉션에서 아디다스를 원용한 스타일로 패션계에 충격을 던졌다. 그는 아이다스의 상징인 삼색선만 살리고 클래식하고도 섹시한 코드를 가미해 새로운 스포츠룩의 세계를 열었다. 독일 브랜드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질 샌더도 정장 바지에 푸마 신발을 신는 등 푸마를 콘셉으로 내세운 옷들을 보였다. 하지만 스포츠룩이 ‘찻잔 속의 태풍’을 넘어 실제로 돌풍을 일으킬는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패션 전문 광고대행사 나명 이사는 “2001년부터 국내 기업들도 스포츠룩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지만, 월드컵 때 ‘붉은 악마’가 그처럼 선전할 줄 몰랐던 것처럼 스포츠룩 역시 이처럼 놀랍게 약진할 줄 예상하지는 못했다. 구제금융기 이후 침체됐던 패션 시장을 스포츠룩이 기세를 올리며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스포츠 걸’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스포츠 브랜드가 세련된 색상과 디자인으로 일상을 파고드는 경향과 더불어, 캐주얼웨어에선 스포티즘이 가미된 캐주얼과 레포츠가 혼합된 ‘캐포츠 스타일’도 인기를 얻고 있다.
A6, C.O.A.X., BNX, MF, EXR 등은 외출할 때나 운동할 때나 두루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을 내놓았다. ‘캐포츠 스타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바짓단에 띠를 두르거나 옆단에 세로로 긴줄이 나 있는 ‘드로 스트링’ 바지, 아랫단·소매·옆선 등을 끈으로 조절할 수 있는 ‘스트링 점퍼’, 경주용 자동차대회에 나오는 레이서들이 입는 것 같은 ‘라이더 재킷’, 발한·방수 기능을 갖춰 땀복과 비슷하면서도 색깔이 다채로운 재킷류 등이다. 이런 캐포츠 스타일은 편안함, 자유로움을 넘어 자유롭고 섹시하고 낭만적이고 때로는 엽기적이다. 가령 축구복처럼 번쩍이는 질감에 선수 번호를 크게 써 붙여놓고는 어깨선을 깊이 파고 허리 부분은 고무줄로 조르게 돼 있어 몸매의 굴곡을 더욱 강조한다거나 원피스에 등산 가방이 덧대어 있는 듯한 그물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한때는 70㎏이 넘었다가 지난해 요가와 힙합 댄스를 배우며 15㎏을 감량한 김아무개(33)씨도 캐포츠룩을 패션 테마로 삼기로 했다. 운동을 통해 몸 만들기의 중요성을 깨달은 김씨는 “몇년 동안 누군가에게 뺏겼던 자신의 스타일을 되찾은 느낌으로 개성 없는 큰 옷들을 집어 던졌다”고 말했다. 그가 자주 연출하는 코디는 보드복 모양의 바지에 허리선까지 내려오는 짧은 청자켓. 자켓 안쪽엔 목선에 가위질을 한 듯한 면티를 받쳐 입어 자연스러운 느낌을 더한다. 여기에 청두건까지 머리에 두르면 ‘스포츠 걸’의 패션은 완성. 매장을 자주 들러보며 최근 경향을 ‘점검’하고 감각을 익히는 김씨는 “활동이 편안하면서도 옷의 색깔, 질감에 있어서는 이제까지 보았던 캐주얼웨어와는 차원이 다른 옷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흡족해 했다. 그는 “그렇잖아도 봄이 되면 옷 사고 싶어 마음이 들뜨기 마련인데 너무 마음에 드는 옷들이 많아 카드 들고 다니기가 겁날 정도”라고 말했다. C.O.A.X 홍보팀 방희경 대리는 “이제 소비자들은 평범하고 무난한 ‘이지 캐주얼’ 대신 과감하고 독특한 스타일을 원한다. 밝고 활동적이면서도 뭔가 나만의 것을 추구하는 ‘감성 캐주얼’ 시대에 스포티즘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좋은 밑천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과 함께 변신을 거듭하는 추리닝 패션. 올봄 이 바람이 어디까지 갈지, 거리의 멋쟁이들은 끝을 모르는 것 같다.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재명 ‘감옥 문턱’까지 갔던 날의 비밀이 밝혀졌다 [논썰] 이재명 ‘감옥 문턱’까지 갔던 날의 비밀이 밝혀졌다 [논썰]](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13/53_17655824504471_20251212503120.jpg)
이재명 ‘감옥 문턱’까지 갔던 날의 비밀이 밝혀졌다 [논썰]

법원, 대전 중앙로지하상가 새벽 기습 강제집행…상인들 “어떻게 이러나”
![한강 돌풍, ‘사장님’ 박정민의 실험…작은 출판사·젊은 독자들 통하다 [.txt] 한강 돌풍, ‘사장님’ 박정민의 실험…작은 출판사·젊은 독자들 통하다 [.txt]](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13/53_17655846340415_20251211504554.jpg)
한강 돌풍, ‘사장님’ 박정민의 실험…작은 출판사·젊은 독자들 통하다 [.txt]

이 대통령 “딴 데 가서 노세요?”…인천공항공사 사장 질타

일요일 전국 눈·비…5도 이상 떨어져 영하권 추위

롯데백화점 “손님 그런 복장 안 됩니다 ‘노조 조끼’ 벗으세요”

박수현 “정청래, ‘친명친청’ 대군 앞에 홀로 선 장판교 장비 심정”

배우 변요한·‘소녀시대’ 티파니 열애…“결혼 전제로 만나요”

영하 40도 북극 견디는 5㎝ 나무…비밀은 제 안에 품은 ‘부동액’

BBC, 한국 수능 ‘불영어’ 소개…“고대 문자에 비유, 풀어보세요”

![[단독] 전학, 침묵, 학폭…가해자로 지목된 고교 에이스 [단독] 전학, 침묵, 학폭…가해자로 지목된 고교 에이스](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0815/53_17551955958001_20250814504074.jpg)


![[단독] ‘세운 재개발 총괄’ 서울시 1급 출신, 한호에서 3억6천만원 자문료 받아 [단독] ‘세운 재개발 총괄’ 서울시 1급 출신, 한호에서 3억6천만원 자문료 받아](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11/53_17654583299495_20251211504295.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