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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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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떨지 마라’가 부른 재앙

등록 2003-04-10 00:00 수정 2020-05-02 04:23

태평하던 베이징 시민들, 뒤늦게 사스 공포에 빠져… 정부는 사태 수습보다 책임 회피에 급급

베이징에 사는 한국인들은 지난 3월25일께부터 1주일간 베이징 시민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한국 언론에서 중국에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돌고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면서 베이징 거주 한국인들은 심하게 동요했다. 주부들은 예방책으로 식초를 끓여 집안 구석구석을 소독하는가 하면, ‘반란건’이란 항생제를 사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베이징의 한국인 밀집지역인 차오양취 왕징에선 약국마다 반란건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가격 경쟁을 벌였다. 한국 사람들의 초조함과 달리 중국인들은 태연하기만 했다. 심지어 “왜 저리 유난을 떠나”는 식의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한국인들은 깔끔떤다

베이징 시내 중학교에 다니는 박아무개(17)양은 교사에게 “사스가 돈다고 하니, 일찍 하교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한국인들은 깔끔떤다”는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베이징에 사는 한국인들은 자구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한국국제학교는 학교 자체에서 소독을 하고, 감기에 걸린 학생들에겐 당분간 집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권유하고,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에게는 미리 항생제(반란건)를 먹게 하는 등 예방조처에 나섰다. 미국계 국제학교에서는 학교 전체 소독을 하느라 하루 휴교를 했다. 홍콩계와 싱가포르계 국제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사스 예방법을 알리고, 마스크를 나눠주고, 학부모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내 특별히 위생에 신경쓸 것을 당부했다.

사스에 대한 공포로 술렁이는 외국인들과 달리 일부 중국인들은 평이한 일상을 계속 유지했다. 오히려 불안감에 떨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한국 유학생들이 학기 도중 귀국하는 바람에 살림살이를 선물로 받아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이뎬취 한 아파트에서 만난 중국 여인은 급히 귀국하는 유학생에게 텔레비전을 얻었다며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태연했던 베이징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은 3월27일 사스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와 간호사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부터다.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다. 둥즈먼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가 사스 환자에게 감염돼 사망한 것이다. 의사들 사이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스가 베이징에 상륙했다는 사실이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이미 이전부터 외신에선 베이징에 사스 주의보를 연일 흘렸음에도 베이징 시민들은 이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스 공포가 번지면서 시민들의 불안감이 깊어지는 순간에도, 중국 정부는 사스 전염 상황에 대한 어떠한 공식발표도 하지 않았다. 3월30일과 31일 일부 언론에서 감염 예방책을 알리는 기사만이 실렸을 뿐이다.

4월1일 중국 정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세계 각국에서 중국 여행을 자제하라는 보도가 이어지고, 국제회의가 취소되는 등 중국에 경제적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하자, 세계보건기구 관계자들의 현장조사조차 거부하던 중국 정부도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중앙 위생부장 장원캉은 기자회견을 통해 3월31일 현재 중국 내의 사스 발병은 1190건이고, 934명이 치료를 받고 퇴원했으며, 46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현재 광둥·베이징·광시·쓰촨 등지에서 감염자가 발생했으며, 베이징에는 12명의 감염자가 발생해 치료 중에 있다고 밝혔다. 장 위생부장은 “더 이상 사스가 확산되지 않도록 효과적으로 통제하겠다. 전염병 전문학자들과 위생국 내 관련기관이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해 신속하게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베이징시 위생국 관련 책임자는 시민들에게 “사스는 예방치료가 가능하니 함부로 약물을 남용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는 또 “감염이 의심되면 바로 조기 진단을 받을 것”을 권유하면서 “현재 시 위생국과 질병예방통제기구가 이미 베이징시 전체에 효과적인 응급체계를 구축하고 수도 시민의 건강을 보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항생제와 식초가 동이 나고…

그러나 이런 정부 발표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정부 당국의 늑장 조처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사스가 베이징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나돈 지 열흘이 지나서야 겨우 “효과적인 통제를 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발표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다. 특별한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질병 통제 방법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안심하라니 ‘눈가리고 아웅’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중국이 사스의 발원지가 아니라는 식의 변명성 발언으로 일관하고 있다. 베이징시 사스 현황 발표에서도 “이번 사스는 베이징에서 발원된 것이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11월 광둥 지역에서부터 사스가 발생했음에도 중국 당국은 광둥이 발원지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홍콩에서는 광저우에서 발생해 홍콩으로 전염됐다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에서는 대륙이 근원지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중국 정부의 이 같은 무책임과 무사안일주의가 결국 괴질을 전체 중국 대륙으로, 전 지구로 확산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이징은 무사태평이었지만, 중국 대륙은 이미 두달 전에 사스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춘절을 맞아 일주일간의 긴 휴가가 끝나갈 무렵, 광둥의 수도 광저우에선 “전염병이 생명을 앗아간다”는 비보가 휴대폰의 문자메시지를 통해 급격히 확산돼 갔다. 유언비어라고 치부하기엔 이런 메시지를 받은 시민들이 너무 많았다. 광둥이동통신 집계에 따르면 2월8일 4000건, 9일 4100건, 10일 4500건의 문자메시지가 전염병의 비보를 알리고 있었다. 3일 동안 광저우에선 이 전염병을 놓고, 유행성출혈열이니 탄저병이니 하면서 시민들을 불안감에 떨게 했다. 슈퍼마켓의 식초가 동이 나고, 반란건을 사려는 행렬이 약국마다 줄을 잇고, 베이징·홍콩 등지에서 비행기로 약을 수송해오는 등 도시 전체가 전염병에 대한 공포로 두려움에 떨었다.

중국에서 최초 사스 감염자가 나타난 것은 지난해 말이다. 그는 광둥성 중산의 식당 주방장이었다. 올해 1월 초 중산시에서 10여건의 감염자가 나타났고, 1월 말께에야 광둥성의 몇몇 전문가들이 이 질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춘절 휴가를 가족과 함께 보내고 직장에 첫 출근한 광저우 시민들은 삽시간에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3일간 약과 식초, 식료품 사재기로 광저우 시민들이 난리를 치고 있을 때, 광저우시 당국은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약국에 약이 떨어져 불안감에 떠는 이들에게 먼 친척들이 약을 보내주고, 식초를 보내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시정부는 왜 묵묵부답이었을까. 광저우 시민들의 정신적 공황이 4일째 계속되던 2월11일 광저우 시정부는 드디어 얼굴을 드러내고 기자들을 만났다.

언제까지 발원지 논쟁만 할 것인가

광저우 시당국은 전염병의 이름은 감기증상과 비슷한 폐렴이지만 병인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발표하면서, 이미 한달 전부터 발병자가 나왔으나 지금까지 전체 광둥성 가운데 6개 시에서만 305건의 감염자가 나타났고, 전체 광둥성 1천여만 인구에 비하면 감염비율은 극히 낮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3월31일 현재까지 중국의 총감염자 1190명 가운데 911명이 광둥에서 발생했고, 그 중 40명이 광둥에서 감염돼 죽은 사람들이다. 1천여만 명의 광동성 인구에 비하면 40명은 아무것도 아니니 안심하라는 것이 정부 당국 지도자가 할 수 있는 말이었을까. 광저우 시당국의 이 같은 무사안일주의가 결국 베이징에까지 감염을 불러왔고, 전국을 사스가 휩쓰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중앙정부는 광저우에서 사스가 발생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국에 어떠한 비상방역대책도 내리지 않았다.

베이징=황훈영 전문위원 kkccjjh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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