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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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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기업, 그 기회의 바다로

등록 2004-03-18 00:00 수정 2020-05-02 04:23

인도네시아 코린도그룹에서 땀흘리는 한국인들… 올 땐 무서워 울고, 떠날 땐 가기 싫어 운다

자카르타= 글 · 사진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3월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는 한여름처럼 푹푹 쪘다. 무더위를 뚫고 자카르타에서 차를 타고 보고르쪽으로 1시간 남짓 달렸을까?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에 접어들기도 하면서 한참을 가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곳이 소도시 찔릉시다. 이곳에 코린도그룹(회장 승은호)의 계열사 중 하나인 아스펙제지공장이 있다. 20여만평에 이르는 부지 곳곳에 세워진 공장 창고에는 폐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스펙제지공장은 폐지를 100% 재활용해 신문용지 등을 생산한다.

아스펙제지공장 생산관리부서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이윤용(37) 과장은 ㅅ대 화공학과를 졸업한 뒤 1999년 2월 코린도그룹에 입사했다.

한국 제지업계보다 임금 많다

코린도는 국내 원목수입업체인 동화기업이 1970년에 인도네시아에 세운 현지법인을 발판으로 삼아 설립된 그룹으로, 목재합판생산·컨테이너생산·신발제조·물류·금융(증권·보험)사업 등에 걸쳐 인도네시아 전역에 3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연간 매출 약 1조원)이다. “졸업 뒤 국내 한솔제지에서 일했는데 회사가 외국 자본에 넘어가면서 인력 감축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냥 알아서 그만두고, 동종업체인 이 회사로 옮겨 해외취업을 했죠.” 이씨는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금리가 폭등해 집 사는 데 무척 고생했다”며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해외로 나가는 게 낫겠다고 작정했다”고 말했다.

물론 물설고 낯선 해외에 취업해 생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외국 생활은 한 2년이 고비라고 해요. 저도 처음엔 흔들렸어요. 한국 생활과 전혀 달라서 적응하는 데 고생 좀 했죠. 가족이 아플 때나 명절 때가 가장 힘들죠.” 언어는 학습하는 것과 실제 사용하는 것이 꽤 다르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직접 부닥치면서 배워나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씨는 “최근 우리 공장을 인턴십으로 방문한 서울의 대학생들한테 ‘나와서 일해보니 비좁고 들어갈 틈조차 없는 한국보다 여기는 기회가 더 많은 땅’이라고 말해줬다”며 “한국에서 회사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다들 불안해하는데, 인도네시아는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에 울면서 왔다가 갈 때는 또 가기 싫어서 울면서 가는 곳”이라고 웃었다.

이윤용씨보다 나이는 두살 적지만 코린도그룹 입사경력으로는 선배인 이영범(35)씨가 옆에서 따라 웃었다. 이영범씨는 ㅎ대 마인어과를 졸업한 뒤 잠깐 백수생활을 하다 1995년 여름 코린도그룹으로 취업 이민을 왔다. 그는 “대학시절 어학연수도 한번 안 가봐서 그런지 해외취업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다”며 “하지만 여기 온 지 3년쯤 되니까 마음이 허전하고 향수병 같은 것도 생겨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도 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코린도기업에 첫 입사한 뒤 4년 동안 보르네오섬의 목재합판공장 인사관리부서에서 ‘잘 버티다’ 자카르타로 돌아왔다고 한다. 잘 버텼다는 건, 코린도그룹에 들어온 한국 청년들 중 자카르타가 아닌 오지 현장으로 발령받은 일부 직원들이 고비를 못 넘긴 채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이영범씨는 “내가 받는 임금은 한국의 제지업계보다 1.5∼2배 정도 더 될 것”이라며 “이제는 한국에 들어가 재취업하기도 어렵고 여기서 기회를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결혼해서 현재 공장부지 한쪽에 마련된 50∼60평짜리 널찍한 가족 숙소에 살고 있지만, 한국에 잠깐 들어가 짧은 기간 안에 결혼 상대를 구하기 어렵다는 게 해외 취업한 청년들이 안고 있는 고민 중 하나다. 또 다른 고민은 재외 국민으로서 겪는 설움이다. 이윤용씨는 “지난 2002년 한국 대선 때 우리도 이곳에서 격렬한 토론을 했는데, 다들 ‘그럼 뭐해, 우리는 투표권도 없는데…’라면서 허탈하게 돌아섰다”고 한숨을 쉬었다.

꼭 필요한 자리에는 한국인 기용

코린도그룹의 직원 수는 2만5천여명으로, 이 가운데 한국인은 230여명에 이른다. 코린도그룹 김동환 부회장은 “한국인 1명을 쓰는 인건비 갖고 인도네시아 현지인 30∼40명을 쓸 수 있다”며 “글로벌 경쟁하려면 한국 청년들을 무턱대고 많이 쓸 수도 없는 처지이지만, 우리 동포기업으로서 말도 통하고 정도 통하고 믿음도 가는 한국 청년들을 되도록 많이 고용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는 기업 시스템이라서 각 계열사의 ‘총무’ 등 꼭 필요한 자리에는 한국 청년들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2001년 이후 코린도그룹에 입사한 27∼31살의 한국 청년은 총 12명인데, 지난해에 7명이 새로 입사했다. 7명은 서울대·고려대·한국외대·동국대·중부대·전북대 등 여러 대학 출신으로, 생산관리·총무·경리·기획부서에 배치됐다.

코린도그룹은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재외동포 상공인들이 국내 청년실업 해소에 어떻게,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탁경태(31) 대리는 자카르타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코린도그룹 본사 신문용지 판매팀에 근무하고 있다. 탁씨의 사무실 책상은 국내 기업의 웬만한 부장급 자리만큼 널찍하다. 지난 99년 ㅎ대 마인어과를 졸업한 탁씨는 졸업하자마자 인도네시아의 한 가발공장에 취업했다. 한국 동포가 운영하는 업체였다. “학교 다닐 때 외환위기가 터져 국내 취업은 아주 어려워졌어요. 차라리 인도네시아로 가겠다고 졸업 무렵부터 작정했죠.” 가발공장에 혼자 다닐 때는 가족도 없고 외로움도 많이 타 한국으로 되돌아갈까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잘 풀려서’ 2000년부터 코린도로 직장을 옮겨 자카르타에 눌러앉았다. 탁씨는 “한국에 가봐야 여기만큼 임금을 받기 어려울 것이고 적응이 다 된 상태”라며 “이곳 인도네시아 현지인 친구들도 여럿 사귀었다”고 말했다.

비용과 현지인 고용 요구 부담

탁씨와 같은 또래인 정재훈(31)씨는 코린도그룹이 최근 새로 사업 진출한 ‘동남아한인방송’(oktn)에서 일하고 있다. 2000년 ㅅ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뒤 국내 한 벤처기업에 취업해 말레이시아 지사로 파견나왔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코린도기업과 인연을 맺게 돼 자카르타에 왔다. 정씨는 “공부만 하던 젊은 사람이 해외에서 회사를 잡는다는 게 두려운 일일 수 있지만, 나는 학교 다닐 때 동남아와 유럽, 미주, 이집트 등에 해외 배낭여행을 많이 다녀서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싱가포르·홍콩 등 동남아 다른 국가로 가는 건 몰라도 한국으로 나중에 돌아가 재취업할 생각은 없어요.” 정씨는 한국에 있는 여자친구와 1년 뒤에 결혼해 인도네시아에서 함께 살 생각이다.

물론 코린도기업이 동포기업이라고 해서 청년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청년들을 무턱대고 고용할 수는 없다. 한국 청년을 채용하면 임금 외에도 주거비 및 차량 지원 등 여러 가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현지 정부의 고용 규제도 무시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외국 기업체에 대해 사업 분야 및 생산 규모별로 외국인 채용 비율을 일정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 비율에 맞춰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취업비자(노동허가서)를 해마다 받아 한국 청년을 고용해야 한다. 코린도그룹 안근효 차장은 “인도네시아의 청년실업도 심각한 상태라서 현지 정부가 코린도에 (한국 청년보다는) 현지인 고용창출에 기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금 우리한테 한국 청년을 쓸 여유가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필요한 사람은 거의 한국인으로 채우고 있다”며 “우리가 앞으로 정보기술(IT) 등 다른 사업 분야로 진출한다면 한국 청년들을 더 흡수, 고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상(韓商)이여, 청년을 구하라

동포상공인들이 국내 청년실업 해소에 기여할 수 있는 실천 방안 모색

코린도그룹 승은호 회장은 현재 ‘동남아 한상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코린도그룹처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 동포상공인(한상)들이 국내 청년실업 해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어서 관심을 끈다. 이런 구상은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2차 세계한상대회’ 리딩최고경영자(CEO)포럼에서 처음 제기됐다.
당시 포럼에 참석한 해외 동포 기업인들은 자발적으로 각종 인턴 프로그램을 활용해 국내 청년실업 해소에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리딩CEO 포럼 참석자 가운데 이런 뜻을 밝힌 한상은 이종문 암벡스벤처그룹 회장, 홍성은 레이니어그룹 회장, 허승회 파커듀란트 사장, 릭이 STSC 회장 등이다. 홍성은 회장은 호텔경영 및 리조트 운영분야에서 인턴 프로그램을 확대할 계획을 내놓았고, 릭이 회장은 STSC뿐만 아니라 미국 내 네트워크를 활용해 국내 청년들이 해외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뉴욕에 있는 홍성은 회장은 이와 관련해 “우리 회사가 운영하는 미국의 호텔과 골프장에 3∼6개월짜리 인턴십 프로그램을 만든 뒤 1999년부터 해마다 한국의 대학생을 10여명씩 데려와 숙식도 해결해주고 월급도 줘왔다”며 “그런데 우리 회사가 보증을 서줘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취업이 가능한) F1비자를 받고 들어온 인턴 중 2명이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불법 체류하고 있어서 현재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홍 회장은 “미국은 현지에서의 인턴 경험같은 기록이 있어야 나중에 취업 허가를 받는 데 도움이 된다”며 “비록 어렵더라도 단 한명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동포 기업인들이 인턴십을 활성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한상대회를 주관하는 재외동포재단의 안내형 경제부장은 “지난해 제2차 한상대회에서 서너명의 동포 기업인이 청년실업 해소에 우리가 기여할 부분을 찾아보자고 했지만, 그런 방안을 생각해보자는 수준이었지 아직 실천으로 옮긴 기업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한상대회 제3차 리딩CEO 포럼에서 이 문제가 다시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상들은 오는 10월의 제4차 리딩CEO 포럼에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각자 만들어오기로 했다.


“인턴이라도 와서 배우고 가라”

코린도그룹 이병기 전무의 충고…한반도를 벗어나면 다 죽는 걸로 생각하나

코린도그룹 이병기 전무는 “해외에 나가 기업하거나 취업하고 있는 재외 동포들을 아직도 ‘외국으로 도망간 놈들’이란 식으로 보는 데서 빨리 탈피해야 한다”며 “한반도를 벗어나면 다 죽는 걸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대에 운동장을 넓게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취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수준이 아직 낮은 것 같다. 좁아터진 한반도에서 아귀다툼할 때가 아니다. 또 해외에 취업해 있는 청년들이 웬만해서는 다시 국내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해외 취업자나 재외 동포 상공인들한테 참정권을 준다든지 여러 가지 조처가 있어야 한다.”
그는 “한상(韓商)들을 민족기업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그래야만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갖고 세계 각지에서 거대 자본으로 활동하고 화상(華商)들이 중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것처럼, 한상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드는 데 적극 나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전무는 “코린도가 한국 청년에 대한 고용계획을 미리 세워 채용하는 건 아니고 필요할 때마다 충원하는 시스템”이라며 “쓸 만한 젊은이들이 별로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아무리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코린도그룹 역시 회사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청년을 채용하면 아파트 주고 자동차 사주고 아이들 교육비·의료비 다 대주기 때문에 우리도 생산성이 높은 사람만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곳 인도네시아에서 활동 중인 한국의 ㄱ대 동문 기업들이 5년 전부터 같은 대학 경영학과 학생 30여명씩을 해마다 인턴으로 데려와 숙식을 제공하면서 신발공장 등에 연수시키고 있다”며 “월급을 많이 주는 큰 기업은 아니지만, 우선 작은 기업이라도 실제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곧바로 취업하는 건 어려움이 많다. 여기 현지에 와서 그렇게 한 10주라도 인턴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곳 물정도 알고 나름대로 각오도 할 수 있고,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뽑을 때도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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