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과 폭력이 판치는 오늘, ‘실수투성이’ 그리스신들이 만든 조화의 세계를 돌아보며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그리스 작가에게 재미있는 일화를 들은 적 있다. 영문학을 강의하던 미국인 교수가 강의 도중, 갑자기 당시 미국 영어에서 최고급으로 분류되던 영어 단어 하나를 칠판에 적고 학생들에게 뜻을 물었다. 단어는 ‘metamorphosis’(변형)였는데 미국 학생들은 하나같이 침묵했다. 그러나 그 강의실에서 유일한 외국인이던 작가는 “그리스에서는 일상대화에서 평범하게 쓰는 말인데 당연히 이해하지요”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당황해 얼굴을 붉히더니 그날 강의를 일찍 마쳤고, 그 뒤로 한번도 영어 단어를 학생들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세계를 제패한 영어의 많은 단어들이 라틴어에서 오고, 또 라틴어의 많은 단어들이 그리스어에서 왔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그리스어의 영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이 농담 삼아 “그리스말이 영어에서 없어진다면 영어권 사람들은 반벙어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많은 이름들의 뿌리는 그리스
서구문명의 뿌리를 추적해보면 대부분 고대 그리스 시대로 돌아간다. “이곳(백악관)의 많은 것들이 학교에서 배운 그리스를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았다. 건물 정면에 서 있는 기둥들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미국의 한 초등학생이 백악관을 견학한 뒤 적은 일기의 한 부분이다. 사실 전 세계인들이 날마다 TV에서 보는 백악관의 건축양식은 고대 그리스의 전통 건축양식이다. 또한 미국 연방대법원 건물은 그리스의 고대 신전이라고 할 정도로 똑같이 지어졌고, 미 의회 의사당 건물은 그리스-로마 양식이다.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의 일부도 고대 그리스의 신전양식이듯, 유럽에서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으로 지은 건물을 들라면 끝이 없을 정도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은 지금까지도 권력기관의 건물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지금도 신화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약한 부분’이란 뜻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아킬레스의 건’이란 표현을 들 수 있다. 또한 거인이란 뜻의 ‘타이탄’이란 말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타누스의 영어식 발음이다. 이 밖에도 ‘조화’란 뜻의 ‘하모니’는 신화에서 전쟁의 신 아리스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티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이다. 그리스에서는 죽었다는 말을 ‘아디스에게 갔다’란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염라대왕에게 갔다’는 말과 같은 뜻이 있다.
특히 그리스인들의 이름은 신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 남성들의 흔한 이름 가운데 ‘디오니시우’는 ‘디오니소스’란 이름이 조금 변형된 것이다. 땅의 여신 디미트라는 그리스에서 아주 흔한 여성의 이름이다. 아르테미스나 아티나도 여성들 사이에서는 흔한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장사인 이라클리스도 그리스 남성의 대중적 이름이다. 2천년 전 기독교가 들어온 뒤 그리스인들도 성서에 나오는 이름으로 많이 개명해왔지만, 여전히 고대 신화에서 나오는 이름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밤마다 경외심을 품고 바라보는 별자리 이름인 피가소스와 돌핀(돌고래), 안드로메다 성운 등은 모두 그리스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지명들이 그리스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아시아·유럽·에티오피아·리비아·파리 등 중요 지명들은 모두 그리스 신화에서 나왔다. 그리스 신화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그리스 거리 이름이 신화의 이름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옴모니아에서 아크로폴리스로 향하는 길은 아티나 거리다. 아티나 거리가 거의 끝나는 곳에 이르러 왼쪽 넓은 길로 따라가면 아테네의 명동이라 일컬어지는 에르무 거리가 나온다. 에르무는 통신의 신인 에르미스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스정교 의식도 신화에서 나왔다

현재도 그리스 신화 시대의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하는 곳은 다름 아닌 그리스정교다. 교회에서 진행되는 의식의 많은 부분들이 신화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전통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았거나 아니면 조금 변형한 것이다. 특히 기독교의 성찬식은 신화시대의 종교적 의식과 무척 비슷하다. 신화시대에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던 신도들이 포도주를 디오니소스의 피라고 선포했고, 포도주를 마시면 죽음에서도 부활한다고 가르쳤다. 이와 마찬가지로 같은 시대에 땅의 신이자 수확의 신인 디미트라를 숭배하는 의식에서는 빵을 서로 나눠먹는 행사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디미트라의 몸인 빵을 먹으면 질병도 사라지고 건강해지며 죽음도 물러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스의 신화학자들은 디오니소스와 디미트라를 섬기던 고대신앙이 예수의 피와 살을 나누는 기독교 성찬식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그리스의 종교문화가 유대교에 전파됐을 가능성도 있다.
신화학자들의 또 다른 흥미로운 주장은, 현재 그리스정교회 신부들이 입는 예복이 신화시대 때 델피나 올림피아에서 종교의식을 진행한 제사장들의 복장과 같다는 것이다. 사실 현재 정교회 신부들이 입고 있는 복장이 여성적인 까닭은 신화시대 때 제사장들이 모두 여성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또한 신화학자들은 정교회 건물의 문이 세개인 이유도 고대 그리스 문화에 기원을 두었다고 본다. 당시에는 극장 문이 세개였는데, 가장 큰 가운데 문을 통해 주인공이 등장하고 조연배우들은 다른 두 문을 통해 들어왔다. 고대극장을 본떠 만든 교회에서도 큰 문으로 신부가 들어오고, 예배를 돕는 다른 두 사람은 작은 두 문으로 들어온다.
기원전 5세기께, 고대 그리스가 고도의 문명사회를 이루고 살아갈 무렵, 지금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영국·프랑스·독일 민족들은 모두 숲에서 야만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들을 ‘미개인’이라고 했다. 당시 그리스와 지리적으로 가장 근접한 로마는 그리스 문명의 가장 큰 수혜자였지만 나중에는 그리스를 정복해 로마제국에 복속시켰다. 역사가들이 그토록 높게 평가하는 고대 로마 문명도 사실은 고대 그리스 문명을 모방해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 신화만을 보더라도 그리스 신화의 모방이지 독창적인 신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을 바꾸고 내용을 더 풍부히 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것 때문에 독창적인 로마 신화라고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리스의 고대 문화가 다른 유럽의 민족들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이었다는 사실은 14세기에 시작된 르네상스가 증명하였다. 르네상스는 터키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자 그리스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베니스와 피렌체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기독교의 절대 권위가 무너지면서 다시 부활한 것이 고대 그리스 문화였다. 메두사 목을 벤 자리에 아름다운 피가소스가 날개짓하며 올라오는 것처럼 어두움을 뚫고 르네상스라는 희망의 빛이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유대의 신과 그리스신들의 차이점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신은 전지전능한 절대자며, 숭배의 대상이자 심판관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신들은 실수투성이에 어떤 경우에는 인간의 도덕적 수준보다 더 뒤지는 행동을 보였다. 유대의 신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통해 인간세상을 심판했다면, 그리스신들은 인간세상에 조화와 균형을 통한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이런 자유로운 토양 위에서 그리스의 고대철학이 꽃필 수 있었고,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 이제 고대 그리스가 이룩한 인류의 정신문화는 전쟁과 폭력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판도라의 상자’ 신화를 되새겨본다. 조화와 균형이 지배하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빌면서 그리스 신화의 연재를 마친다.
아테네=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유시민 “민주당 뭐 하는지 모르겠다…굉장히 위험”
![이재명 ‘감옥 문턱’까지 갔던 날의 비밀이 밝혀졌다 [논썰] 이재명 ‘감옥 문턱’까지 갔던 날의 비밀이 밝혀졌다 [논썰]](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13/53_17655824504471_20251212503120.jpg)
이재명 ‘감옥 문턱’까지 갔던 날의 비밀이 밝혀졌다 [논썰]

조은석 특검, 15일 윤석열 계엄 동기 직접 발표…6달 수사 마무리
![[단독] 윤석열 부부 변호인 구실한 박성재…석달 동안 ‘명태균 보고서’ 10건 작성 [단독] 윤석열 부부 변호인 구실한 박성재…석달 동안 ‘명태균 보고서’ 10건 작성](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14/53_17656936569596_20251214501533.jpg)
[단독] 윤석열 부부 변호인 구실한 박성재…석달 동안 ‘명태균 보고서’ 10건 작성

“반지의 제왕도 역사냐?”…이 대통령 ‘환단고기’ 언급에 야권 비판 쏟아내

“대통령 말대로 검색하면 공항 마비”…이학재, ‘이 대통령 해법’ 이틀 만에 반박

대통령실 “이 대통령, 환단고기 동의하거나 연구 지시한 것 아냐”

경호처 “청와대서도 낮은 경호…‘댕댕런’ 코스도 유지”

내란재판부가 불러올 역풍…열정보다 지혜가 필요한 때

“어이없는 리얼함”…94만명 ‘깜놀’한 대형 전복의 정체는



![[단독] 전학, 침묵, 학폭…가해자로 지목된 고교 에이스 [단독] 전학, 침묵, 학폭…가해자로 지목된 고교 에이스](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0815/53_17551955958001_20250814504074.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