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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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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소송 원고 승소는 세계적 흐름이다

불법행위에 ‘국가면제’ 불인정 흐름에 한국도 전쟁범죄 국가 책임 인정… “이 판결로 피해자들에 온전한 시민권 부여”
등록 2023-12-30 15:08 수정 2024-01-01 12:06
2023년 12월27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에서 한 주민이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 앉아 시름에 잠겨 있다. AP 연합뉴스

2023년 12월27일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에서 한 주민이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 앉아 시름에 잠겨 있다. AP 연합뉴스


2022년 7월5일 이스라엘 대법원은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주민이 2016년 이스라엘 국방부와 의회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적 영토’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선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로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이 벌이는 모든 살상 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 면죄부를 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사건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반인도적 범죄행위는 ‘국가면제’ 예외

 

원고(피해자)는 2014년 11월 이스라엘 경계선에서 500m가량 떨어진 가자지구 내부에서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당했다. 사건 당시 그는 불과 10살이었다. 당시 목에 총상을 입은 원고는 이스라엘군 헬리콥터가 원고를 후송해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원고 쪽은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잘못된 행동’으로 피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반면 피고(이스라엘) 쪽은 사건 당시 원고가 경계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며, 경고사격 이후 조준사격을 했다고 주장했다. ‘정당한 방어행위’란 얘기다. 또 2005년 병력을 전면 철수시켰기 때문에 가자지구는 더 이상 이스라엘 점령지가 아니며, 가자지구 주민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군사행동은 ‘전쟁행위’와 마찬가지란 주장도 덧붙였다. 여기에 개정된 2012년 이스라엘 민사소송법에 따라,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장악한 2007년 이후엔 ‘합법적인 목적’으로 ‘과도하지 않은 대응’을 하는 것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2023년 12월17일 낸 자료에서, 10월7일 개전 이후 12월26일 0시까지 이스라엘군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주민은 적어도 2만914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희생자 가운데 70%가량은 여성과 어린이다. 부상자도 5만4918명에 이른다. 무너진 건물 더미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는 실종자는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버겁다. 유엔 인권이사회(UNHRC)가 12월21일 성명을 내어 “각국 정부는 반인도적 범죄를 막을 책임이 있다”고 호소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쟁의 포연이 걷히고 나면, 희생된 가자지구 주민들은 이스라엘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까? 2023년 11월23일 서울고등법원 민사33부(재판장 구회근)의 판결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날 재판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5) 선생과 사망한 피해자 유가족 등 16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심 법원의 각하 결정을 취소하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앞서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34부(재판장 김정곤)도 2021년 1월8일 같은 취지의 판결을 선고한 바 있다. 판결의 핵심은 일본 정부의 불법행위에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있느냐다.

국가면제 또는 주권면제는 ‘주권국가를 다른 주권국가의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국제관습법이다. 주권을 가진 모든 국가는 평등하고 독립적이므로, 이른바 ‘대등한 자는 다른 대등한 자에 대해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2023년 12월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일본 정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 선고 결과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원고로 참여한 이용수 선생(왼쪽 셋째)이 축하 꽃다발을 받으며 웃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2023년 12월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일본 정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 선고 결과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원고로 참여한 이용수 선생(왼쪽 셋째)이 축하 꽃다발을 받으며 웃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국가면제 이론이 처음 등장한 19세기만 해도 특정 국가의 행위에 다른 나라 법원은 일체의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절대적 면제주의가 대세였다. 하지만 국가가 국영기업을 설립해 무역하는 등 비주권적 행위(사법행위)가 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주권적 행위에만 국가면제를 인정하는 제한적 면제주의가 확립됐다.

 

브라질 최고재판소 서울중앙지법 판결 인용

 

21세기 들어 인권침해 등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국가면제의 예외로 인정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2004년 3월 이탈리아 대법원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자국민이 독일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제범죄에 해당하는 국가의 행위에는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고 원고 승소 판결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 들어 비슷한 판례가 쌓이고 있다. 2021년 8월23일 브라질 최고재판소(대법원 격)는 2차 대전 때인 1943년 자국 영해 안에서 독일군의 잠수함 공격으로 침몰한 어선 피해 유족들이 독일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독일군의 행위가 “국제인도법의 일반원칙을 위반한 것”이며, “인권을 침해하는 불법행위는 국가면제를 누리지 않는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당시 브라질 최고재판소는 근거 판례의 하나로 일본의 국가면제를 부인하고 ‘위안부’ 피해자의 손을 들어준 2021년 1월 서울중앙지법 판결을 인용했다.

우크라이나 대법원도 2022년 4월14일 러시아군과 전투 중 사망한 피해자의 유족이 러시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러시아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국가면제는 국제관계의 주체로서 국가의 법적 지위 특징이며, 이는 ‘대등한 주체 간에는 상호 권한이나 사법적 관할권을 갖지 않는다’는 국제법의 일반원칙에 기초한다”며 “그러나 이 원칙을 준수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국가주권의 상호인정이므로, 러시아 연방이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부정하고 이에 대한 침략전쟁을 벌일 때 이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고 준수할 의무는 없다”고 판시했다.

서울고법의 판단도 다르지 않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가면제에 관한 국제관습법은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 법정지국(한국)의 영토 내에서 법정지국 국민에게 자행된 불법행위의 경우에는 그 행위가 주권적 행위로 평가되는지 여부를 묻지 않고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재의 유효한 국제관습법이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어 “원고들(피해자)은 대부분 대한민국 국민으로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고, 대한민국 민법에 근거해 피고에게 불법행위 책임을 묻고 있다”며 “이 사건에서 원고들은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해 피고의 불법행위 책임을 묻고 있으므로, 피고의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이 성립하는지 여부는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해 판단하기로 한다”고 덧붙였다. 국가면제에 해당하지 않는 일본의 불법행위에 대해 한국법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다는 판단이다.

“근대 시민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인권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가 보호·구제해야 한다. 또 침해가 발생했을 때는 국가가 법원에서 재판받을 권리와 판결의 실행을 보장해야 한다. (…) 그간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제기한 소송은 모두 패소했다. 일본 쪽은 재판을 청구할 권리가 없다고 아예 문을 걸어 잠갔다. 한국 법원도 국가면제를 앞세워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시민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서 일본 ‘위안부’ 문제 대응 태스크포스 단장을 맡은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한겨레21>에 이렇게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이어 “지금까지 피해자들은 단 한 번도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받은 적이 없다. 이번 판결로 한국 법원이 피해자들에게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며 “이번 판결과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침략전쟁 수행 과정에서 이뤄진 강제동원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상고하지 않음으로써 확정된 판결, 이행은 가능할까

 

일본 쪽 반응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상은 11월23일 성명을 내어 “국제법 및 일-한 양국 간의 합의에 명백히 반하는 것으로 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한국이 국가로서 스스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고 밝혔다. 그간 일본 쪽은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과거사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으며, 특히 ‘위안부’ 문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해왔다.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3월16일 도쿄의 총리공관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함께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있다. REUTERS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3월16일 도쿄의 총리공관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함께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있다. REUTERS


1심 때부터 소송 자체를 무시하고 일절 대응하지 않았던 일본 정부는 상고하지 않았다. 서울고법의 판결은 최종 확정됐다. 재판부는 원고 쪽 요구를 받아들여 “피해자 1명당 2억원의 손해배상금과 연 12%의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판결 이행은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법원의 강제집행 결정을 받아낸 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보유하고 있는 사용하지 않는 땅(유휴지)을 현금화하거나, 일본 정부 소유의 상선이 한국 항구에 정박할 때 이를 압류하는 등 강제집행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하다. 다만 서울고법 판결이 국가면제에 대한 국제관습법의 유력한 판례로 자리잡을 가능성은 크다. 이상희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전쟁범죄에 대해선 국가가 행한 것이니,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금지 조약 및 노예협약’이나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 등 조약 적용을 시도해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 게 국제사회의 논리였다. 이번 판결은 법원이 중대한 인권침해를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의 참극에 대해서도,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도 국가의 불법성을 다퉈볼 수 있게 됐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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