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김정은·푸틴, 국제정치 문법에 ‘도전’하다

국제사회의 ‘제재 체제’에 균열 낼 것 공식화
유엔 안보리의 후속 대응은 사실상 불가능
등록 2023-09-16 18:17 수정 2023-09-19 15:53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3년 9월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함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REUTERS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3년 9월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함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REUTERS

북한과 러시아가 국제법의 허점을 세차게 파고든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미국을 정점으로 한 서방 각국이 부과한 제재에 정면으로 맞설 기세다. ‘대가를 치를 것’이란 경고는 부질없다. 손 맞잡은 북·러를 막을 방법은 딱히 없어 보인다. 길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짧게는 냉전이 막을 내린 1990년 이후 국제사회를 지탱해온 규범이 맥없이 흔들리고 있다. ‘국제사회의 왕따’가 함께 벌이는 일탈을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민감한 분야에서도 협력

2023년 9월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국제정치의 문법에 대한 ‘도전’이라 할 만하다. 회담을 전후로 푸틴 대통령은 북한이 추진 중인 군사용 정찰위성 개발에 지원할 뜻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5월과 8월 각각 실시한 정찰위성 발사에 실패했고, 10월 3차 발사를 예고한 상태다.

이에 김 위원장은 “(러시아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주권국가를 건설하는 데 항상 함께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회담에 이은 만찬에서도 그는 “악의 결집을 벌하고 안정적 발전 환경을 만들기 위해 신성한 투쟁을 벌이는 러시아군과 인민이 악에 맞서 승리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9월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 도착해 밝은 표정으로 차량에서 내리고 있다. AFP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9월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 도착해 밝은 표정으로 차량에서 내리고 있다. AFP 연합뉴스

두 정상의 발언을 종합해보자. 러시아 쪽은 정찰위성을 비롯한 첨단 군사기술을 북한에 전수하고, 북한은 우크라이나 침공의 장기화로 어려움을 겪는 러시아 쪽에 포탄 등을 지원하는 등가교환에 원칙적 합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쪽은 북한이 추진하는 핵추진 잠수함 개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날 정상회담 이후 합의 내용 등을 담은 공동성명은 발표되지 않았다. 다만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실(크렘린) 대변인은 “이웃 국가로서 공개되거나 발표되면 안 되는 민감한 분야에서도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찰위성부터 따져보자. 유엔 안보리는 2006년 7월15일 채택한 결의(1695호)에서 북한에 “탄도미사일 관련 모든 활동 중단”을 요구했다. 안보리 결의는 국제법적으로 구속력을 가진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같은 기술을 활용하는 우주발사체 역시 북한이 발사하면 국제법적으로 ‘불법’이란 뜻이다. 반면 북한은 2009년 3월5일 ‘달과 기타 천체들을 포함한 우주탐사와 이용에서 국가들의 활동 원칙에 관한 조약’(우주조약)에 가입했다. 또 같은 해 3월10일엔 ‘우주공간으로 쏘아 올린 물체들의 등록과 관련한 협약’(등록협약)에도 가입했다. 국제법적으로 북한은 ‘우주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안보리 결의와 북이 가입한 조약 사이에 간극이 있다.

무기 수출은 어떨까? 2006년 10월9일 북한의 1차 핵실험 닷새 뒤에 채택된 안보리 결의 1718호는 북한이 탱크·군함·전투기 등을 타국과 거래하는 것을 금했다. 또 북의 2차 핵실험 뒤 채택된 안보리 결의 1874호(2009년 6월12일)는 소형화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 거래를 금지했다. 이어 안보리는 북한이 4차 핵실험을 단행한 뒤인 2016년 3월2일 채택한 결의 2270호에서 소형화기를 포함한 모든 재래식 무기의 거래를 금지했다. 결의는 “유엔 회원국은 재래식 무기와 기타 관련 물자의 생산·유지 및 관련 훈련과 기술 지원 등을 제공하거나 제공받아서는 안 된다”고도 못박았다.

‘참아내’고 ‘기대한’ 공통분모는 ‘미국’

2022년 2월 말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한 서방이 러시아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발동한 상태다. 북한과 러시아의 무기거래는 이중으로 불법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미국 쪽은 ‘추가 제재’란 으름장을 놓지만, 북·러에 대한 제재는 이미 차고도 넘친다. 미국 내부에서조차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란 말은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회담에선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았지만, 정찰위성과 함께 북한이 추진하는 핵추진 잠수함 개발과 관련해서도 러시아가 기술 지원에 나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또한 피해갈 ‘구멍’이 있다.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 삼자간 안보협력체인 오커스(AUKUS)를 통해 미국이 비핵국가인 오스트레일리아 쪽에 핵추진 잠수함을 판매하기로 하면서, 이미 핵확산금지조약(NPT) 위반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이번 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무기 지원에 대한 대가로 러시아 쪽이 식량과 에너지 등을 제공할 것이라는 말도 나온 터다. 실제 푸틴 대통령은 “인도주의적 문제”도 논의했다고도 밝혔다. 인도주의적 문제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에서도 예외로 인정된다. 역시 ‘우회로’를 주장할 명분이 있다는 뜻이다.

북·러가 국제사회의 ‘제재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한 이유는 뭘까? 이혜정 중앙대 교수(정치국제학)는 “러시아는 참을 만큼 참았고, 북한은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참아낸 것’과 북한이 ‘기대한 것’의 공통분모는 ‘미국’이다. 이 교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무시와 제재, 여기에 기존 국제질서가 최소한의 생존 공간조차 주지 않았다는 점이 북·러가 ‘미국적 질서’에 반기를 들게 한 이유이자 명분이 됐다”고 짚었다.

러시아는 이미 2018년 6월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중국과 더불어 북한 핵·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유엔 안보리를 효과적으로 무력화해왔다.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과 함께 국제사회의 제재 체제에 균열을 낼 것을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유엔 안보리 차원의 후속 대응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2019년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김 위원장은 같은 해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첫 북-러 정상회담에 나섰다. 회담의 핵심 의제는 북핵과 미사일이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당시 푸틴 대통령은 북한을 ‘핵국가’로 인정하며 비핵화 회담이 아닌 핵군축 회담의 중요성을 말했다. 또 핵군축 회담의 핵심으로 북한에 대한 체제 안전 보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며 “러시아가 북한에 손을 내민 것이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에 따른 만성적인 탄약 부족 탓이란 분석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회담 뒤 단독으로 연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언급한 바 있다.

‘미국 없는 미래’의 첫 번째 현실태

김 위원장도 ‘하노이 노딜’ 이후 남한과 미국 양쪽에 대한 실망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특히 2019년 6월30일 전격적으로 이뤄진 판문점 남·북·미 3자 정상회동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이후엔 ‘적의’까지 내보였다. 이후 김 위원장은 냉전 해체 이후 30년 가까이 지속해온 ‘북-미 적대관계 해소를 통한 경제건설’이란 대외정책 기조에서 벗어나, ‘미국 없는 미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라고 표현했다.

이번 정상회담은 북한이 상정한 ‘미국 없는 미래’의 첫 번째 현실태로 평가할 만하다. 남한과 미국에 대한 기대감을 버린 북한이 택한 길은 다시 ‘핵·경제 병진노선’이었다. 기존 병진노선이 핵·미사일 개발과 경제 건설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병진노선은 핵·미사일을 비롯한 ‘군수산업을 통한 경제 건설’로 표현할 만하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2023년 6월 펴낸 자료를 보면, 세계 방위산업 시장점유율의 압도적 1위는 미국(40%)이다. 지난 5년 새 74%나 급성장한 한국(2.4%)은 9위를 기록했다. 세계 방위산업 시장 규모는 연간 약 5천억달러 수준인 것으로 평가된다. 안보리 제재만 없다면, 북한으로선 최대 ‘성장산업’인 셈이다.

그 시작점이 러시아인 것은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냉전 시절 러시아(옛 소련)는 북한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자료를 보면, 1990년만 해도 북한의 대러시아 교역액은 22억338만달러를 기록해, 북한 대외무역의 53.3%를 차지했다. 하지만 옛 소련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양국 교역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중국이었다. 북한 대외무역의 중국 의존도는 2005년 50%를 돌파한 데 이어, 2014년 처음으로 90%를 넘어섰다. 1990년 41억7천만달러 규모이던 북한의 대외무역 규모는 2022년 15억9천만달러(대중국 의존도 96.7%)를 기록했다. 그간 중국은 안보리 제재를 ‘비교적 충실히’ 이행했다. 북한으로선 국제사회의 제재로 비슷한 처지로 내몰린 러시아가 ‘최적의 대안’일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도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 지원해야?

북한의 무기 공급으로 우크라이나 전황은 달라질까?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은 9월12일 시엔엔(CNN) 방송에 출연해 “(겨울이 오기 전까지) 전투 가능 기간은 앞으로 30~45일 정도가 고작”이라며 “(북이 러시아에 탄약을 지원해도) 전황을 획기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 “북한과 러시아의 무기 거래가 이뤄지면, 한국도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를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에서 벌써 나오고 있다. 자칫 남과 북이 우크라이나에서 ‘대리전’을 치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가치 외교’의 정수라 할 만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