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그릴라.’ 축복과 기쁨, 평화가 충만한 땅을 일컫는 힌두어다. 구글 사전은 “삶이 완벽에 다가서는 상상 속 외딴 아름다운 곳”으로 풀어놨다.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가 2002년부터 해마다 주관하는 군사·안보 분야 세계 최대 행사인 ‘아시아안보회의’ 개최지로 싱가포르의 샹그릴라호텔을 택한 이유일 텐데, 현실은 언제나 ‘이상향’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2023년 6월2~4일 열린 ‘2023년 샹그릴라 대화’를 전후로 미국과 중국은 강하게 맞부딪쳤다. 애초 미국 쪽은 행사 기간에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리상푸 중국 국방부장 간 회담을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중국 쪽이 이를 거부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러시아산 무기 수입 등을 이유로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장비발전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리 부장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바 있다. 미국 쪽은 그가 국방부장에 취임한 뒤에도 제재를 풀지 않았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5월30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중-미 양국 군의 대화가 어려움에 처한 원인은 미국도 잘 알 것이다. 미국 쪽은 중국의 주권·안전·발전이익을 존중하고, 군 당국 간 대화에 필요한 분위기와 조건을 조성하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즉각 수정하는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 부장에 대한 제재 해제를 양국 국방장관 회담의 전제로 내건 셈이다.
같은 기간 양국 군은 대만해협 해상과 남중국해 상공에서 위태롭게 마주쳤다. 미 해군이 6월4일 공개한 동영상을 보면, 전날 대만해협 공해상에서 중국 군함이 미군 구축함 USS 정훈함의 항로를 가로지르며 끼어들었다. 두 함정 사이 거리는 약 130m에 불과했으며, 정훈함은 충돌을 피하려 속력을 급격히 줄여야 했다.
미군 쪽은 당시 정훈함은 캐나다 해군 호위함 HMCS 몬트리올함과 정례적인 ‘항행의 자유’ 작전을 수행 중이었으며, 중국군 함정이 ‘안전 항행에 관한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6월5일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 쪽이 먼저 말썽과 소동을 일으켰다”며 “중국군은 정해진 법률과 규정에 따라 합리적이고 안전하게 필요한 대응 조치에 나선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앞서 미군 인도태평양사령부는 5월30일 성명을 내어 “5월26일 국제법을 준수하면서 남중국해 국제공역에서 안전하고 통상적인 작전을 수행 중이던 미군 RC-135 정찰기를 겨냥해 중국군 J-16 전투기가 불필요하고도 공격적인 비행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난둥 중국 인민해방군 남부전구 대변인은 “미군 정찰기가 의도적으로 우리 훈련구역에 침입했다.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아 발생할 ‘후과’는 미국이 오롯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중국이 공역과 공해상에서 진행되는 미국과 동맹국의 합법적인 ‘항행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지속하고 있다. 미국은 갈등도 대결도 원치 않지만, 괴롭힘과 강압에 굴하지도 않겠다.”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6월3일 ‘샹그릴라 대화’ 기조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또 “국제법이 허용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모든 국가가 적법한 ‘항행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동맹과 우방국에 대한 중국의 어떠한 괴롭힘과 강압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미국은 대만해협의 현상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 유지는 세계 각국의 이해와 맞닿아 있으며, 미국은 일방적인 현상 변경 시도에 단호히 반대한다. (…) 미국은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으며, 경쟁이 갈등으로 번지는 것도 원치 않는다. 인도·태평양 지역이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뉘어선 안 된다. 미-중 간, 특히 양국 군 당국 간 소통 창구가 열려 있어야 한다. 대화의 적기는 바로 지금이다. 대화는 특정 행동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대화를 많이 할수록 위기나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오해와 오판을 잘 피할 수 있다.”
2023년 3월 임명 뒤 국제무대에 처음 등장한 리상푸 중국 국방부장은 6월4일 연단에 섰다. 리 부장은 먼저 “냉전적 사고방식이 부활하면서 안보위험이 급증하고 있다”고 입을 열었다. 또 “중국과 미국은 체제를 비롯해 많은 방면에서 차이가 크다. 그럼에도 상호존중에 바탕을 두고 공통점과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고, 연계와 협력을 증진할 수 있다”며 “중국과 미국 간 심각한 갈등이나 대결은 전세계에 견디기 힘든 재앙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중국은 ‘항행의 자유’는 허용하지만 이를 빌미로 ‘항행의 패권’을 행사하려 드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특정 국가’의 군함과 전투기는 다른 나라의 영공과 영해에 근접하는 대신 자국의 영공과 영해 관리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 갈등과 대결을 조장·과장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같은 진영화를 추진하는 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분쟁과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짓이다.”
미-중 양쪽 모두 대결을 피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도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샹그릴라 대화’가 끝난 직후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와 세라 베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국·대만 담당 수석국장이 6월5일 베이징을 방문해 마샤오광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 회담에 나섰다. 회담 직후 워싱턴에선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몇 주 안에 중국을 방문할 것이란 말이 나왔다. 미-중 관계는 어디로 향하는가? ‘샹그릴라 대화’가 막을 내린 6월4일 총자란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정치학)는 <로이터> 통신에 이렇게 말했다.
“발언은 과거보다 부드러워졌지만 내용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간극을 반영한 셈이다. 양국관계에 모종의 돌파구가 있으리라 기대하는 건 순진하다. 미-중 대결은 지속될 것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입법조사처 ‘한덕수, 총리 직무로 탄핵하면 151명이 정족수’
이승환 구미 콘서트 취소 후폭풍…“김장호 시장은 사과하고 사퇴하라”
윤석열 쪽 “엄연한 대통령인데, 밀폐 공간에서 수사 받으라니”
“정치인 사살·북 공격 유도”…노상원의 60쪽 외환·내란 수첩 [영상]
[단독] “총선 전 계엄” 윤석열 발언 당일 신원식, 김용현과 만류 방안 논의
이승환 “‘정치 언행 않겠다’ 서약 거부, 구미 공연 취소 통보 진짜 이유”
[단독] “말 잘 듣는 장교들, 호남 빼고”…‘노상원 사조직’ 9월부터 포섭했다
[속보] 헌재 “윤석열 통보서 받은 걸로 간주…27일 탄핵심판 개시”
계엄의 밤, 사라진 이장우 대전시장의 11시간…“집사람과 밤새워”
윤석열 쪽 “박근혜도 탄핵심판 먼저”…수사 불응 공식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