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일본 배상 대신해준 윤 정부, 미 정부 도청에도 ‘통 큰’ 양해?

미국 정보기관의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기밀 등 100여 건 유출
미 정부 인정에도 한국 정부 “악의를 갖고 했다는 정황 없어”
등록 2023-04-14 21:50 수정 2023-04-15 09:53
2022년 5월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접견실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2022년 5월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접견실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미국 정보기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기밀문서 100여 건이 유출됐다. ‘춘계 대공세’를 준비 중이던 우크라이나군 당국이 서둘러 작전계획을 전면 수정할 정도로 내용이 구체적이다. 동맹과 우방국에 대한 미 정보기관의 도·감청 정황도 담겨 있다. 대상국엔 한국도 포함된다. 그럼에도 대통령실 쪽은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 특유의 ‘통 큰 외교’이자, 미국에 대한 ‘무한 신뢰’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디스코드 이용자 게시판에서 처음 불거져

이번 문서 유출 사건은 2010년 위키리크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먼저, 문서 유출의 목적이다.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이라크에 파병된 뒤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을 목격한 미군 정보 분석병 첼시 매닝의 공익 제보에서 시작됐다. 미 중앙정보국(CIA) 등에서 근무한 기술 전문가 스노든 역시 국가안보국(NSA)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무차별적 도·감청 활동을 벌이는 것에 분노해 관련 자료 일체를 빼내 공개했다. 문서의 성격도 다르다. 둘 다 장기간에 걸쳐 작성된 포괄적 내용이고, 작성된 뒤 한참 지나 유출됐다. 이번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우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서 따온 <벨링캣>이란 이름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탐사보도 전문매체가 2023년 4월9일 보도한 내용을 보면, 이번 문서 유출 사건은 3월 초 비디오게임 전문 소셜미디어 ‘디스코드’의 특정 게임(마인크래프트) 이용자 게시판에서 불거졌다. 해당 게시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두고 이용자끼리 논쟁이 벌어졌는데, 한 이용자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급 비밀’ 도장이 찍힌 문서 출력본을 찍은 사진파일 여러 개를 올렸다. 이후 트위터·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와 익명 이미지 게시판 ‘포챈’ 등을 통해 비슷한 내용이 퍼졌고, <뉴욕타임스>가 4월6일(현지시각) 인터넷판에 “미 국방부가 관련 조사에 착수했다”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벨링캣>은 복수의 디스코드 이용자 말을 따 “지난 1월에도 기밀문서가 게시판에 올라왔다. 최근 몇 달 새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기밀문서가 게시판에서 공유됐다”고 전했다.

첫 보도 이후 쏟아진 미국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유출된 문서 작성에는 미 주요 정보기관 대부분이 참여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4월8일치에서 “유출된 문서에는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과 마크 밀리 합참의장에게 전달되는 일일 정보 보고를 비롯해 국방정보국(DIA)과 중앙정보국이 작성한 현장 보고서, (‘하늘의 CIA’로 불리는) 국가지리정보국(NGA)의 첩보위성 분석 자료와 국가안보국의 도·감청 보고서 등이 포함됐다. 일부는 합동참모본부에서 직접 작성한 것”이라고 전했다.

우크라이나는 ‘봄 대공세’ 계획을 전면 수정

유출된 문서는 내용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정보다. 2023년 2월28일 작성된 것으로 표시된 문서에는 “우크라이나군이 현재와 같은 빈도로 소모를 계속하면 부크 지대공미사일은 4월13일, S-300 방공 미사일은 5월3일이면 모두 소진될 것”이란 내용이 담겼다. 같은 날 작성된 다른 문서에는 “5월까지 수도 키이우와 서남부 2개 지역을 제외한 우크라이나 전역의 중요 국가 기간시설의 대공 방어망에 구멍이 뚫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문서 유출 이후 우크라이나 쪽은 이르면 5월 안에 개시할 것으로 예상했던 ‘춘계 대공세’ 계획을 전격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전에 동원될 부대와 무기체계, 훈련 정도 등의 정보가 세밀하게 공개된 탓이다.

둘째, 미국이 러시아 쪽 정보망에 깊숙이 침투했음을 보여주는 내용도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부터 불과 4주 만에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 고위 현장 지휘관 10여 명을 사살하면서, 미국 쪽이 관련 정보를 지원했다는 의혹이 인 바 있다.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현 백악관 국가안보실 전략소통조정관)은 같은 해 5월 “정보 사안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건 부적절하다”면서도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자체 방어에 활용할 수 있는 정보와 첩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유출된 문서 내용으로 미뤄) 미 정보당국은 그간 러시아의 일간 공격 계획 등을 실시간으로 확보해왔음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이런 수준의 정보를 확보하려면 도·감청 등 ‘신호정보’(SIGINT) 외에 ‘인적정보’(HUMINT)도 필수적이다. 미 중앙정보국 출신 첩보활동 전문가인 글렌 칼은 4월12일 <알자지라>에 출연해 “이번 문서 유출로 미국의 대러시아 정보 수집 능력에 상당한 타격이 있을 것”이라며 “(미국과 선이 닿은 러시아 쪽 정보원) 일부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미 정보기관이 동맹국과 우방국을 대상으로 도·감청을 포함한 첩보활동을 벌인 정황도 드러났다. 3월1일 중앙정보국이 작성한 것으로 된 문서에는 부패 혐의로 재판받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추진하는 ‘사법개혁’에 반대하는 시위를 정보기관 모사드가 부추긴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앙정보국은 이런 내용을 ‘신호정보’로 확보했다고 밝혔다. 모사드에 대한 도·감청이 이뤄졌음을 뜻한다.

한국과 이스라엘 등 우방국 정보도 수집

<뉴욕타임스>는 4월9일치에서 유출 문서 내용을 따 “한국 국가안보실이 지난 3월 초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지원해달라는 미국 쪽 요구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역시 ‘신호정보’로 확보했다는데, 당시 이문희 국가안보실 외교비서관과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나눈 대화 내용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신문은 “이 비서관은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제공하는 문제에 분명한 입장을 정해야 한-미 정상 간 통화를 할 수 있으며,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바꾸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이에 김 실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발표 시점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 결정 발표 시점이 겹치면 “두 가지를 맞바꾼 것이란 의혹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빠르게 공급하는 게 미국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폴란드 쪽에 155㎜ 포탄 33만 발을 수출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며 ‘우회로’를 제안했다는 대목도 있다. 도·감청이 아니고는 확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이 비서관과 김 실장 모두 지난 3월 돌연 자리에서 물러났다.

“제기된 문제에 대해 미국 쪽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이다. 과거 전례나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고민해보겠다.” 미 정보기관의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이 불거진 직후인 4월9일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다음날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 관련 보도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며, 일부 내용이 수정 또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이번 사건을 과장 왜곡해 동맹관계를 흔들려는 세력이 있다면 국민적 저항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도 4월11일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조율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는 길에 기자들과 만나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며 “(윤 대통령) 취임 뒤 11개월 동안 양국은 모든 영역에서 정보를 공유해왔고, 중요한 정보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세계 최강 정보국인 미국의 역량은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워싱턴에 도착해서도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가지고 (도·감청을) 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정작 같은 날 미국 쪽에선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 출처와 유출 범위를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오스틴 국방부 장관)며, 사실상 유출 문서가 진본임을 인정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2015년 2월9일 당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미국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15년 2월9일 당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미국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신뢰가 필요하다. 신뢰를 다시 세워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친구들 염탐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2013년 10월24일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미 국가안보국이 장기간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각국 지도자 30여 명의 휴대전화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스노든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진 이후다. 당시 독일은 존 에머슨 미국대사를 불러 항의(초치)했지만, 미국은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국가안보국 쪽은 “미국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해외 정보를 수집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에게 전화해 “현재 도청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미국민의 안보를 위한 활동과 동맹국의 사생활 침해 우려 사이에 균형점을 찾기 위해 정보 수집 체계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사과하지 않고 유출 수사에 착수

미 법무부는 국방부의 공식 요청에 따라, 4월7일 연방수사국(FBI)을 주축으로 이번 문서 유출 사건 수사에 착수했다. 리사 모나코 법무부 부장관이 진두지휘할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 국토안보 담당 차관보를 지낸 모나코 부장관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국토안보 및 대테러 담당 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는 2013년 10월25일치 <유에스에이 투데이>에 기고한 글에서 “우방국을 포함한 감시 정찰 능력에 대한 점검 작업을 벌이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꼭 필요할 때만 정보를 수집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10년을 돌아, 다시 제자리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