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1일 새벽이 밝았다. 호안끼엠 호수를 가득 채우며 불꽃놀이와 드론쇼에 열광하던 인파는 환영이었다 해도 의심하지 못할 고요가 거리를 덮고 있었다. 걸어서 5분 남짓, 두 블록 떨어진 쌀국숫집에서 배를 채우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스마트폰의 메시지 알림이 떴다. 빡빡한 오전 일정을 함께 수행할 운전기사의 톡이었다. 작은 크로스백에 카메라만 챙겨 호텔 앞으로 내려갔다. 세련된 스타일의 짧은 머리가 돋보이는 젊은 친구가 검은색 도요타 승용차 앞에서 알은체했다.
하노이에서 50여㎞ 동북쪽에 있는 박장은 12만여 명이 사는 중소 도시이지만 한창 성장 중이다. 하노이에서 박장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양옆으로 끊임없이 보이는 공장들과 공장이 들어설 것이 분명한 땅은 박장이 거대 산업단지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한국 기업들도 박장에 공장을 지었다. 도로변 입간판에는 ‘공장 부지 있음, 임대’ 같은 선전 문구가 한글로 쓰여 있기도 하다.
하노이 서쪽은 라오스, 북쪽은 동서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서북쪽 국경을 넘으면 중국 쿤밍을 만나고 동북쪽으로는 난닝과 이어졌다. 하노이는 홍강 삼각주가 만드는 비옥한 땅의 중심에 있다. 또한 통킹만을 통해 남중국해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열려 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지정학적으로도 하노이는 베트남 북부 지역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15일은 아시아 민중의 가슴을 벅차게 했던 날이다. 베트남 독립을 위해 항일 전선에서 싸우던 월남민주동맹(베트민) 투사들은 하노이 해방을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난닝을 중심으로 베트남 국경에 결집한 베트민 전사들은 결연하게 국경을 넘었다. 보응우옌잡 장군이 해방군을 이끌었다. 베트남 국경마을 동당에서 하노이까지 이어지는 철길은 162㎞ 정도로,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현대식 도로를 달린다면 두 시간 남짓이면 닿을 거리다. 그러나 베트남 해방군이 하노이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먼 여정이었다.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프랑스는 2차 대전에서 독일에 패하자 베트남에서의 실권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2차 대전 승전국의 일원이 된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프랑스의 이분법에 따르면 침략자 독일에 맞선 프랑스의 항전은 정의롭고 프랑스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은 테러리스트들의 불법 만행이었다. 미국은 연합국의 일원이자 서방 패권 공동 수호자로서 프랑스를 지원했다.
프랑스군은 베트남 독립군에 맞서기 위해 하노이를 둘러싸는 겹겹의 방어진지를 만들었다. 하노이와 베트남-중국 국경 사이에 자리잡은 베트남 땅은 전쟁의 기운을 가득 담고 있었다. 호찌민과 보응우옌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은 국경 지역 까오방, 동케, 동당, 랑선에서 프랑스군과 맞섰다. 베트민은 도시와 마을을 하나씩 점령해나가며 하노이로 향했다. 박장은 하노이의 출입구 구실을 하는 도시였다.
프랑스 극동원정군 사령관 장 드라트르는 베트민 공격을 막기 위해 벙커로 연결된 방어선을 구축했다. 강력한 방어선은 동찌에우, 룩남, 박장, 박닌, 선떠이를 잇고 하동과 닌빈까지 광범위하게 형성됐다. 프랑스군은 원정군의 선봉인 공정대대, 2차 대전 때 프랑스 해방 전투에서 라인강을 최초로 넘었던 부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명성을 떨쳤던 부대, 프랑스군 장교들이 신뢰하는 외인부대 등 모두 정예를 자처하는 부대들로 구성됐다. 여기에 강력한 항공 지원을 받았다. 변변한 현대식 무기도 없이 죽창으로 시작한 베트민과 프랑스군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었다.
박장에는 프랑스군의 기동단이 주둔했다. 3개 보병대대, 1개 포병부대, 1개 공병중대로 구성된 기동단은 하노이 북부 지역을 둘러싼 방어선을 지키는 전략부대로서 7개 기동단 중 하나였다. 공수부대는 지원 요청이 오는 지역에 투입되기 위해 하노이에 주둔했다.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설 즈음 운전기사 청년이 내 나이를 물었다. 나이를 말해주자 서른인 줄 알았다고 기분 좋은 농담을 쳐준다. 서로 이름을 교환하자 차 안의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청년의 이름은 탕이었다. 차는 어느덧 박장시에 들어왔다. 길을 몇 번 잘못 들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물어 목적지 마을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는 동당~박장~하노이를 잇는 철길이 놓여 있었다. 중국 난닝으로 이어지는 이 단선 철도는 특이하게도 세 가닥 선로가 놓여 있다. 베트남 철도의 궤도 간격은 1천㎜ 협궤이고 중국 철도는 1435㎜의 표준궤를 쓴다. 따라서 중국과 베트남은 국경을 넘어 열차를 운행할 수 없는 조건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협궤 열차도 표준궤 열차도 운행할 수 있게 선 한 가닥을 더 깔았다. 이런 3선 철길은 하노이 자럼역에서 국경의 동당역까지 국제선 철도에 놓여 있다.
철길 건널목을 건너 2~3분을 더 간 뒤 마을 어르신을 발견한 탕이 차에서 내렸다. 내가 준 지도와 사진들을 탕이 보이자 어르신은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다시 차에 오른 탕이 핸들을 돌려 농가의 비포장길로 들어섰는데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한나절 숨바꼭질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마침 지나는 주민에게 다시 길을 묻고는 후진으로 좁은 농로를 빠져나오는 고생을 한 끝에 드디어 사진에 나오는 장소에 도착했다.
14명이 잠든 작은 묘지는 오랫동안 사람 발길이 닿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녹슨 철창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 구조물과 담장에 칠해진 노란 페인트는 빛이 바랬다. 탕에게 잠깐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뒤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담장에 붙었다. 학생 시절 이후 처음으로 담을 탔다. 안마당에 뛰어내려 제단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묘지 바닥의 타일이 깨져 있었다. 제단 앞에는 하얗게 탄 향들이 있었다. 제단에 쓰인 베트남어를 향해 스마트폰을 들어 번역기를 돌렸다. 구글 번역기가 여러 번 말도 안 되는 번역을 반복하는 바람에 네 줄 문장을 한 줄씩 나눠 시키니 근접한 번역 결과가 나왔다. “곤히 잠들어 있다. 14명의 북한 군인이.”
베트남전에 남베트남 지원을 위해 참전한 국제연합군 중 남한은 미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냈다. 하지만 북베트남을 위해 북한이 참전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대규모 보병이 참전한 게 아니어서 주목받지도 않았다. 북베트남은 베트남 통일을 시대 과제로 여겼다. 오랜 식민통치와 제국주의로 인한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는 길은 통일이었다. 반면 미국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북베트남에 의한 통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도미노 이론을 끌어들였다. 베트남이 공산화하면 타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인도차이나반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차례대로 공산화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세계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 미국이 바라보는 베트남전쟁이었다.
냉전시대 사회주의 양대 국가인 소련과 중국은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제 연대의 일환으로 북베트남에 군사교관을 파견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북베트남 공군을 키우기 위해 베테랑 전투기 조종사들을 파견했다. 북한에서 온 전투기 조종사 교관들은 한국전쟁에서 실전을 치른 바로 위 세대로부터 비행술을 배운 정예요원이었다. 이들은 1965년에서 1968년께까지 하노이의 북베트남 공군기지에서 새내기 조종사들에게 미그기의 조종술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시기는 미국이 ‘통킹만 사건’(1964년)을 빌미로 하노이를 비롯한 북베트남 일대를 폭격하던 때였다. 하노이 상공에서 미 해군과 공군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폭탄창을 열고 폭탄을 쏟아부었다. 이때 북한 교관 요원들은 베트남 공군을 지원하러 직접 조종간을 잡고 출격했다.
미군은 모든 전쟁에서 압도적 제공권을 전제로 작전을 벌였다. 북베트남 폭격 작전에서도 미 해군과 공군 조종사들의 고려 대상은 지상 방어부대의 미사일과 대공사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그기들이 나타나 개싸움, 이른바 공중전을 붙였다. 더구나 미그기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미군 전투기들이 공중전에서 격추되는 일이 지속해서 벌어졌다.
미군은 이런 상황이 왜 벌어지는지 조사했다. 조사를 맡은 프랭크 얼트 대위는 미 해군 공중전을 조사하고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이전 전투에서 공대공 킬 비율(공군의 대결에서 상대를 추락시킨 비율)은 12 대 1로 미군이 압도적이었는데, 1965~1968년 미 해군 공중전의 킬 비율은 3.7 대 1로 뚝 떨어졌다. 수적 우위와 상대방보다 우수한 성능의 전투기를 보유했음에도 킬 비율이 급락한 것은 심각한 문제로 간주됐다.
얼트 대위는 미 해군 조종사의 실력이 기준 이하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해군조종사전투학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미 해군은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미라마 해군비행기지(NAS·Naval Air Station)에서 전투기 조종사 양성 학교를 출범시키는데 그 유명한 ‘톱건스쿨’(<i>Top Gun School</i>)이다. 공대공 전투의 세부사항에서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해군 조종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노이 상공의 북한 전투기 조종사들은 톰 크루즈의 영화에까지 연결돼 있다.
북한 조종사 14명은 1929년부터 1946년 사이에 출생했고 1965년에서 1968년 사이에 사망했다. 대부분은 1967년에 전사한 것으로 나타나, 이해의 공중전은 특히 치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하노이에서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이어지는 국제선 철도 옆에 묻혔다. 아마 이들은 묘지 옆 철길을 달리는 열차를 타고 하노이로 들어왔을 것이다. 고향으로 가는 길 바로 옆에 묻혔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의 무덤은 쓸쓸하게 역사의 시간 속에 잠겨버렸다.
다시 묘지의 담을 넘어 탕에게로 갔다. 온몸에 달라붙은 도깨비바늘을 떼어내기 위해 차를 타기 전 한참 수선을 떨어야 했다. 차는 시골길을 벗어나 국도를 타고 박장 시내를 향해 달려 박장역에 도착했다. 노랗게 칠한 역사 건물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역은 한국의 신촌역 옛 모습과 닮아 친근감을 더했다. 3년 전 나는 중국 난닝에서 국제선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이 역을 통과했지만, 지금은 운행이 중단된 상태다. 역무원에게 물으니 어쩌다 화물열차가 다닐 뿐 철도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코로나19로 막힌 철길이 언제 다시 열릴지 알 수 없다.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달리는 날이 올 때까지 잘 버텨내길 기원하며 역을 뒤로했다. 박장에서의 마지막 방문지는 자연사박물관인데 안타깝게도 휴관일이었다. 자연사박물관 마당에는 미그21 기체가 전시됐다. 북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탔던 기종이다. 하노이 북쪽 하늘에서 빛나는 성과를 기록했던 기체라는 설명이 안내문에 쓰여 있다. 랜딩기어를 받치는 받침 높이에 차이를 두어 기수 부분의 뾰족뿔이 하늘로 향해 기체가 이륙하는 모습이다. 탕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노이 오케이? 오케이!!
두 시간 가까이 달린 끝에 하노이 시내 흐우띠엡 호수 옆에 내렸다. 탕과 작별 인사를 한 뒤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큰 흐우띠엡 호수에서 시장통 같은 골목길을 따라 3분여를 걸으면 작은 흐우띠엡 호수가 나타난다. 이 작은 호수는 미군의 북베트남 폭격의 흔적을 보여주는 장소다. 한 변의 길이가 30여m 남짓인 정사각형 호수 안에는 격추된 미 공군의 B-52 폭격기 잔해가 남아 있다. 인근의 B-52 승리박물관에도 B-52 폭격기 잔해가 전시됐다. 승리박물관에 전시된 잔해는 자연사박물관의 조립된 공룡뼈처럼 원형을 간직했지만 인위적으로 재구성된 것인 데 비해, 호수의 폭격기 잔해는 방금 전 추락한 것처럼 구겨진 동체 그대로 처박혀 있다. 역사의 한순간을 잡고 있는 장소였다.
프랑스 기동군이 주둔했고 미군 폭격을 버텨내야 했으며 북한군 조종사들의 묘지가 있는 박장은 이제 남한 기업들이 진출한 산업단지가 됐다. 박장 박물관 마당에서 만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베트남 아이들이 유창한 한국어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정도로, 한국과 한류는 베트남의 미래로 여겨진다. 하늘 아래 사연 없는 땅이 없겠지만 하노이와 박장은 베트남 근현대사와 미래를 보여주는 여러 창 중 하나일 것이다.
참고 문헌
<디엔비엔푸>, 보응우옌잡 지음, 강범두 옮김, 길찾기, 2019년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을유문화사, 2002년
‘Inside the real TOPGUN fighter school’, Jamie Hunter, Skies, 2022년 6월20일
박장·하노이(베트남)=글·사진 박흥수 철도 기관사·<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저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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