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브렉시트’로 불리는 보리스 존슨(58) 영국 총리의 급작스러운 총리직 사임 발표로 영국 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사퇴 압박부터 전격적인 사임 발표까지는 급물살을 탔지만, 그의 불명예 퇴진은 사실상 오래전부터 예견됐다.
2022년 7월7일(현지시각) 보리스 존슨 총리가 집권 보수당 안팎의 거센 퇴진 압박에 몰린 끝에 당대표직과 총리직의 사임을 발표했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승부수로 던지며 선출직 최고 권력을 쥔 지 3년, 임기를 2년 넘게 남겨둔 시점이다. 앞서 6월6일 존슨 총리는 보수당 하원 평의원 모임인 ‘1922 위원회’의 당대표 신임 투표에서 소속 의원 359명 중 신임 211표(59%)-불신임 148표(41%)를 받아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으나, 한 달 만에 결국 안방에서 퇴출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존슨 총리는 이날 당대표직과 총리직 사임을 함께 발표했지만, 차기 총리를 맡을 당대표가 선출되기까지 총리직은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산적한 프로젝트와 아이디어(의 실행)를 끝까지 지켜볼 수 없게 돼 고통스럽다”고도 했다.
나라 안팎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날 영국 일간 <가디언>은 “거짓말과 규칙에 대한 뻔뻔한 무시는 그를 일으켜 세운 힘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며 “개인의 인격적 결함에서 시작된 일이 소속 정당과 정부의 결함으로 끝나면서 온 나라에 큰 타격을 줬다”고 꼬집었다. 7월11일 <블룸버그> 통신은 “존슨의 몰락은 포퓰리즘의 자기파괴적 막장”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존슨 총리의 집권과 사임까지의 과정이 “포퓰리즘의 위험한 매력과 파괴적 힘이라는 글로벌 스토리의 영국판 변주였다”고 했다. 제1야당 노동당은 존슨 총리의 총리직 즉각 사퇴와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2019년 7월 존슨 총리는 브렉시트 협상에 지지부진하다가 중도 사임한 테리사 메이의 총리직을 승계한 데 이어, 12월 승부수를 던진 조기 총선에서 “브렉시트 완수”를 외치며 보수당의 압승을 끌어냈다. 그러나 풍운아 기질이 짙은 존슨 총리는 집권 직후부터 온갖 구설에 휩싸였다. 그는 거침없는 혐오 발언과 허풍, 독불장군식 언행으로 광대, 괴짜 총리, 영국의 트럼프 같은 별명을 얻었다.
존슨 총리를 낙마시킨 원인은 정치적 무능함, 툭하면 불거지는 스캔들, 끊이지 않는 거짓말, 안하무인 격의 거친 언행 등이 꼽힌다. 결정타는 측근을 두둔한 거짓말이었다. 사건은 6월29일 보수당 하원 원내 부대표이던 크리스토퍼 핀처 의원이 런던 시내의 한 회원제 클럽에서 남성 2명을 성추행한 혐의가 드러나면서 촉발됐다. 핀처는 “당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부끄럽다”며 수습하려 했지만, 2019년 외무부 부장관 시절에도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혐의가 추가로 드러나 원내 부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총리실은 “존슨 총리가 2022년 2월 핀처 의원을 원내 부대표로 임명할 때 그의 성추문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7월5일 <비비시>(BBC) 방송이 전직 공무원의 말을 인용해 “존슨 총리와 도미닉 라브 부총리가 핀처 의원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공식 민원을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결국 존슨 총리는 언론 보도가 사실임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존슨 총리는 이때도 사건 처리가 미숙했지만 거짓말하진 않았다고 강변했다.
거짓말은 존슨 총리의 습관적 병폐처럼 보인다. 존슨은 1964년 미국 뉴욕에서 영국의 유학생 아버지와 예술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유아 시절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 이튼스쿨, 옥스퍼드대학 등 명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의 첫 일자리는 일간 <더 타임스> 기자였다. 1994년 기사의 인용 문구를 조작한 사실이 발각돼 해임됐다. 당시 편집장은 존슨을 “진실성, 도덕성과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존슨은 2001년 총선에서 하원의원에 당선해 정치에 입문했다. 2004년 여성 언론인과의 불륜 의혹이 불거지자 마이크 하워드 당시 보수당 대표에게 거짓 해명을 했다가 들통나 섀도캐비닛(야당의 예비내각)에서 퇴출당하기도 했다. 존슨은 2008년 런던시장에 당선돼 8년간 재임하며 정치적 무게를 다졌고, 2019년 브렉시트 전도사를 자처하며 당대표와 총리직까지 올랐다.
거짓말은 존슨의 불명예 퇴진 사유의 일부일 뿐이다. 2020~2021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 중이었지만 존슨 총리는 방역 지침을 어기고 총리 관저 등 여러 곳에서 최소 19차례의 비밀 술파티를 즐겼다. 2020년 11월에는 존슨 자신이 코로나19에 확진돼 자가격리를 한 것을 시작으로 내각 고위직의 코로나19 감염이 잇따랐다.
2021년 10월에는 오언 패터슨 보수당 의원이 로비 규칙을 어기고 기업들에서 돈을 받고 혜택을 주려던 혐의에 대해 의회가 ‘30일간 정직 권고’라는 징계를 결정했다. 그런데 존슨 총리와 보수당은 솜방망이 징계조차 보류하고 조사 과정을 다시 살펴보겠다며 새로운 위원회를 구성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존슨 총리는 정치가로서의 자질과 능력도 의심받았다. 존슨 총리의 수석보좌관(2019~2020)을 지낸 도미닉 커밍스는 존슨의 정책 결정 무능력을 빗대어 “통로에서 비틀거리는 쇼핑 트롤리(카트)”라고 비판했다. 존슨 총리의 라이벌이었던 제러미 헌트 전 외무장관은 2022년 6월 당대표 신임투표에서 “우리(보수당 정부)는 우리 나라의 엄청난 잠재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청렴성과 능력,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더는 존슨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2022년 들어 여론도 극도로 악화했다. 최근 몇 달 새 “(존슨 총리가)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이 줄곧 50~60%를 넘나들었고, 7월 첫째 주 조사에선 69%까지 치솟았다.
집권 보수당으로선 존슨 총리에 대한 영국 시민의 비호감이 정권의 안정과 존속까지 위협하는 현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을 테다. 침몰하는 선박에서 탈출하는 것처럼 존슨 내각 장관들의 자진사퇴가 잇따랐다. 7월6일에는 보수당의 거물급 정치인 마이클 고브 당시 주택부 장관이 존슨 총리에게 “이제는 그만둘 때”라며 자진사퇴를 권고했다. 다음날 존슨 총리는 고브 장관의 해임으로 맞받았다. 존슨이 당대표와 총리직 사퇴를 발표하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총리실 관계자는 “지도자가 물러나야 한다고 언론에 신나게 떠벌이는 사람과 내각을 함께할 수 없다”며 “뱀 같은 사람”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7월6일과 7일 이틀 새에만 최소 44명의 장관급 각료와 보좌관이 사임을 발표하면서 존슨 내각은 송두리째 무너져내렸다. 영국의 독립 싱크탱크 정부 연구소의 집계를 보면, 존슨 총리가 집권하는 3년 동안 정식 개각이 아닌데도 해임(자진사퇴 포함)한 장관급 각료와 보좌관 등 고위직 관리가 63명이나 됐다. 역대 총리 중 최다 기록이다. 그만큼 존슨 정부 안에서도 불신과 불협화음이 컸다는 이야기다.
7월12일 제1야당 노동당은 조기 총선을 요구하며 총리 불신임안을 제출했지만 보수당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가 불신임안 표결을 거부했다. 그 대신 보수당은 자체적으로 정부 신임 투표를 보수당 다수의 의회 하원에 상정할 예정이다. 지금의 리더십 위기를 존슨 총리 개인의 일탈로 돌리고 집권 보수당 정부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일종의 ‘셀프 신임’ 투표다.노동당은 보수당의 이런 결정을 “미친 짓”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정부 대변인은 “노동당이 제안한 총리 불신임안 투표는 의회가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게 아니”라며 “노동당은 관례에 따라 정부에 대한 불신임에 투표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기로 선택했다”고 일축했다.
영국은 2011년 9월 시행된 ‘고정임기 의회법’에 따라 5년마다 의회 선거를 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는 총선에서 승리한 집권당이 최장 5년까지 임기를 보장받는다는 뜻이다. 다음 총선은 2025년 1월 이전에 치러야 한다. 아직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다. 물론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임기 중간에 집권당 대표, 즉 총리가 바뀌거나 조기 총선을 할 수 있다.
보수당 분열에 후임 총리는 안갯속보수당은 조기 총선을 거부하고 당대표를 새로 뽑는 경선을 신속하게 추진하고 있다. 당대표 선출은 보수당 의원 20명 이상의 지지를 확보한 후보들을 대상으로 의원들이 1차 투표를 해 30표 이상 얻은 후보들을 먼저 가려낸다. 그다음부터는 최저 득표자 1명을 탈락시키는 후속 투표를 최종 후보 2명이 남을 때까지 되풀이한다. 최종 후보 2명이 가려지면, 의원뿐 아니라 전체 당원이 참여하는 결선 투표로 당대표를 선출한다. 신임 당대표는 존슨 총리의 잔여 임기 동안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다.
경선에는 모두 11명이 출사표를 던져 8명이 후보 등록 컷오프를 통과했다. 소속 의원 359명 중 최소 160명 이상이 서로 다른 예비후보를 지지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보수당 내부의 혼란과 분열이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7월13일 저녁에 치른 1차 투표에선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과 페니 모돈트 국제통상 부장관(통상정책 담당) 등 6명이 가려졌다.수낵 전 장관(88표)과 모돈트 부장관(67표)이 선두에 나섰고, 리즈 트러스 외무장관(50표), 케미 베이드녹 전 평등담당 부장관(40표), 톰 투건하트 하원 외교위원장(37표), 수엘라 브래버먼 법무장관(32표)이 뒤를 이었다.
첫 관문을 통과한 후보 6명 중 모돈트, 트러스, 베이드녹, 브래버먼 등 4명이 여성인 점도 눈에 띈다. 보수당은 7월14일 2차 경선, 7월18~21일 후속 경선을 이어가 늦어도 8월 안에 최종 후보를 2명으로 압축하고, 9월5일에는 신임 당대표 겸 총리를 발표할 계획이다.
존슨 총리는 마지막까지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을 태세다. 7월13일 의회에서 열린 총리 질의응답(PMA)에 출석해, “내게 부여된 리더십이 자랑스럽다”며 “머잖아 나는 머리를 높이 들고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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