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 전략가 손자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게 최선 중의 최선”이라고 했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 키케로는 “부당한 평화가 정의로운 전쟁보다 낫다”고 했다. 키케로는 “복수나 자기방어가 아닌 전쟁을 용인할 이유가 없으며, 공개적 선전포고가 없는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도 했다. 2022년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한 ‘푸틴의 전쟁’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애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압도적 병력과 무기를 앞세워 속전속결을 기대했다. 명분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가입 저지, 목표는 “우크라이나의 중립화, 비무장화, 탈나치화”였다. 우크라이나를 사실상 무력화하고, 친서방 성향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권을 축출한 뒤 친러 정권을 세우겠다는 속내였다. 그런 전략은 우크라이나 군과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사실상 실패했다. 푸틴은 불명예스러운 전쟁의 수렁에서 체면을 덜 구기고 발을 뺄 수 있을까?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이 5주를 넘기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은 교전뿐 아니라 종전 협상에서도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3월29일 양국 대표단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5차 평화협상을 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안보 보장’ 확약을 조건으로 ‘중립국’ 지위를 수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중립국은 자국이 아닌 다른 교전 당사국(집단)들의 무력 분쟁에 개입할 수 없다. 또 자국 영토를 교전국의 군사작전이나 무기 공급처로 제공해서도 안 된다.
러시아 쪽 협상단 대표 블라디미르 메딘스키는 “협상이 건설적으로 진행됐다. 우크라이나 쪽의 제안을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푸틴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고도 했다. 러시아 국방부도 “키이우(키예프·우크라이나 수도)와 체르니히우(우크라이나 북동부 도시)에 대한 군사 활동을 대폭 축소하겠다”고 했다. 러시아의 이런 반응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략을 수정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다. 푸틴이 젤렌스키 정부를 ‘제거 대상’이 아니라 ‘합법적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실리 확보를 극대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해석이다.
양쪽의 5차 협상이 전쟁의 주목할 만한 변곡점이 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은 러시아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 못한다. 3월30일 젤렌스키는 “우리는 겉만 번지르르한 어떤 문구도 믿지 않는다”며 “우리 영토 1m를 위해서라도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러시아가 행동에 나서는 것을 볼 때까지 어떤 예단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가 중립국화를 실현하기 위해선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러나 개헌안이 의회를 통과하리란 보장이 없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가 군사작전이나 무력시위를 자제하고 기다려줄지도 의문이다. 우크라이나는 2019년 개정 헌법에 유럽연합(EU)과 나토 가입을 추구한다고 명문화했다. 이를 폐기하고 중립국을 천명하는 개헌을 위해선 의회 전체 450석 중 3분의 2(300석)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의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헌법재판소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
정권 교체 포기 뒤, 러시아의 핵심 목표우크라이나의 한 정치학자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지금은 (개헌 찬성표가) 300표가 안 된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되고 나토의 군사 지원이 없다는 게 분명하다면 여론이 바뀔 수 있다”고 내다봤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인 3월 초 우크라이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44%는 여전히 “나토 가입”을 지지했다. “나토에 가입하진 않되 군사 협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견도 42%나 됐다. 우크라이나 국민 10명 중 8~9명이 서방의 안보 우산을 희망한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를 포기할 경우 평화협상의 핵심 목표는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의 합병에 대한 공식 인정이다. 여기에 돈바스 지역에 대한 권리까지 ‘끼워넣기’ 할 수도 있다. 이는 푸틴에게 매우 흡족한 전리품이 될 것이다. 둘째,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와 탈군사화다. 우크라이나는 중립국 지위를 수용할 뜻을 밝혔지만, 탈군사화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주권국가의 무장해제는 사실상 주권 수호의 포기나 다름없다. 셋째, 우크라이나가 나토뿐 아니라 유럽연합을 포함한 서유럽 진영에 가담하는 것을 차단 또는 제한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행보를 원천 봉쇄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묶어두겠다는 것이다.
이런 목표 중 일부는 러시아가 실제로 챙기려는 보상이라기보다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푸틴의 속내는 알기 힘들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정부가 이런 요구를 모두 수용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향후 평화협상에도 난항이 예상되는 이유다.
양쪽의 평화협상이 앞서 2015년 민스크 협약의 허술함을 충분히 보완할 만큼 실효적 구속력이 있는 협정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2014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동부 돈바스 지역 친러 반군의 내전은 두 차례의 민스크 협약으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돈바스 지역 러시아계 주민들은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이라는 독립국 창설을 선포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구실 중 하나도 이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을 우크라이나의 ‘나치 정권’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와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돈바스 자치지역의 독립 여부를 포함한 영토 귀속 문제를 놓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좀처럼 시각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3월30일 미국 외교 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국제 문제 전문가 10여 명의 인터뷰를 토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5가지 시나리오로 정리했다. △유혈 교착상태 지속 △우크라이나 분할 △우크라이나의 결정적 승리 △평화협정 △블랙스완(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의 발생과 전개 가능성 등이다. 서방은 아직까지 ‘군사 개입 불가’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부당한 평화가 정의로운 전쟁보다 낫다”는 격언을 고통스럽게 곱씹는 처지다. ‘부당함’을 최소화하고 정전 이후 안보를 확보해야 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본보기 삼아 자신의 힘을 과시했지만, 밑바닥까지 추락한 국가 신뢰도와 강력한 경제제재의 충격을 상쇄하기엔 역부족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 5주가 지난 3월31일, 양쪽에서 약 2만3천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난민은 400만 명이 넘는다. 평화협상 중에도 포성은 멎지 않고 사람은 죽어간다. 21세기 들어 유럽에서 처음 발발한 이번 전쟁은 어느 쪽에도 ‘승전 선언’조차 하기 힘든 허망한 전쟁으로 기록될 것 같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임기반환점 윤 지지율 17%…이조차 바닥이 아닐 수 있다
“비혼·비연애·비섹스·비출산”…한국 ‘4비 운동’ 배우는 반트럼프 여성들
명태균 변호인 “윤 부부 추가 녹취 기대말라…강혜경 숨쉬는 것 빼고 다 거짓말”
기상 양호했는데...12명 실종, 2명 사망 금성호 왜 뒤집혔나
임은정 “윤, 건들건들 반말…국정 문제를 가정사처럼 말해”
목줄 매달고 발길질이 훈련?…동물학대 고발된 ‘어둠의 개통령’
‘아들 등굣길 걱정에 위장전입’ KBS 박장범, 스쿨존 속도 위반 3차례
검찰, 명태균 오늘 세번째 조사…“제기된 모든 의혹 들여다볼 것”
지구 어디에나 있지만 발견 어려워…신종 4종 한국서 확인
명태균 변호인, 반말로 “조용히 해”…학생들 항의에 거친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