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탄핵 제도를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지겹도록 탄핵 사태에 대해 들었고, 한국의 노무현과 박근혜 정부 시절 탄핵 정국을 경험했다. 한국 대통령제의 원형인 미국과 그 응용 사례를 모두 학습한 셈이다. 하지만 애초 모델의 디자이너인 건국 시조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탄핵 제도가 새롭게 작동한다면 어떨까? 이른바 문명의 대전환기인 지금 우리는 모든 익숙한 가정을 의심해야 한다. 지금은 낸시 프레이저 미국 뉴스쿨 사회과학대학원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기존 고정관념이 녹아내리거나 제도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궐위’의 시대다. 이탈리아 정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오래전에 이런 시기를 낡은 것은 죽어가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행기로 규정했다.
근대 초기 미래의 모델이라고 칭송받았던 미국 민주주의는 상대를 문명의 적으로 규정하는 적대주의 정치, 그리고 이를 악화하는 고장난 제도적 배열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더구나 새 미디어 등장 등으로 탈진실(Post-truth) 시대가 겹쳐서 진행되는 덕분에 분명한 듯 보이는 탄핵의 필요성 자체도 격렬한 진영 논쟁의 대상일 뿐이다. 이 오작동과 탈진실 시대의 관점에서 미국 탄핵 정국에 대해 흔한 고정관념 네 가지를 지면상 짧게라도 살펴보자.
이 글의 탄핵에 대한 관점은 주로 앨런 릭트먼 아메리칸대학 교수의 2017년 저서 (The Case for Impeachment)에 근거를 둔다. 릭트먼 교수는 당시에 흔하지 않게 도널드 트럼프 당선을 예견해 트럼프에게서 감사 메시지까지 받았다. 하지만 트럼프가 질끈 눈감은 사실은 릭트먼 교수가 동시에 트럼프의 ‘필연적’ 탄핵도 예고했다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그의 예견적 통찰을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
① 탄핵은 법률적 판단에 맡겨져 있다탄핵 정국에서 가장 흔한 오해가 탄핵은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법률적 판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탄핵이 법률적 결정이라면 지혜로운 건국 시조가 사법부에 최종 판단을 맡기지, 정치적 동물인 의원들에게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건국 시조는 애초에 대통령직이 국내외적으로 강력한 권한과 귄위의 제도로 발전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중한 그들은 혹시라도 제도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는 제왕적 통치자가 등장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들은 정교하게 설계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으로도 불안해서 탄핵이란 이중 보안 장치를 마련했다.
흥미로운 점은, 건국 시조가 왜 탄핵 기소와 심판의 권한을 사법부가 아니라 의회에 부여했냐는 것이다. 릭트먼 교수는 이에 대해 대통령의 운명을 법적 기준만이 아니라 의원들의 정치·실용·윤리·법적 판단의 복합체로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건국 시조 중 한 명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탄핵은 대중의 믿음 남용이나 위반을 폭넓게 다루며 그러기에 이는 정치적 성격의 심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앞의 책에서 인용). 탄핵은 제도 성격상 고도의 정치적 판단 행위임이 당연하고 또 그래야 한다. 대의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말이다.
② 탄핵 사유는 해석하기 나름이다문제는 지금 미국 대의제가 로런스 레시그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대의되지 않는 대의제’라는 점이다. 정상적 대의제라면 탄핵이 정치적 판단이라도 최소한의 보편 기준 정도는 합의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민주당 쪽에선 다른 나라 정상에게 본인의 정치적 정적(조 바이든 전 부통령)을 수사하도록 요구한 것 자체로도 중대한 헌법적 위반이자 탄핵 사유라고 주장한다. 반면 공화당에서는 정치적으로 문제는 있겠지만 이는 헌법적 수준의 위반은 절대 아니고 그저 정상 외교 행위의 하나라고 방어한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통화 속기록에서 정적 언급 정도는 강력한 증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 공화당의 주장은 탄핵의 성격과 취지를 왜곡했다. 릭트먼 교수에 따르면, 사실 탄핵은 정치적 판단이기에 사법부처럼 굳이 특정 범죄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헌법에 규정된 탄핵 사유를 충족하는지가 중요하다. 헌법에서는 “반역죄, 수뢰죄, 또는 그 밖의 중대한 범죄 및 경범죄”를 탄핵 사유로 명시한다. 사실 반역죄에서 경범죄까지 폭넓게 포괄하기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릭트먼 교수는 이를 너무 낮게 잡으면 의회를 당파적 정치 술수 집단으로 저하하고 일상적 내전 정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반면 너무 높게 잡으면 권력 남용이나 부패가 면죄부를 얻어 암세포처럼 결국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번 탄핵 파동은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정적인 바이든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외국 정상에게 전화했다는 점에서 최소한 심각한 권력 남용과 선거법 위반 등을 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에 불과하지만 비선 실세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이를 배후 조종했고, 국무부 등 외교 라인이 이를 방조하거나 도왔고 의회 조사를 방해한다는 점에서 거대 권력형 게이트다. 더 나아가 은폐만 한 게 아니라 대통령 스스로 속기록을 공개하며 자랑스럽게 떠벌린다는 점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충격적 현상이다.
③ 민주당의 트럼프 탄핵 시도는 내년 대선에서 민주당을 불리하게 한다물론 민주당의 탄핵 시도로 공화당 핵심 지지층의 결집이 눈에 띄게 보인다. 그들은 선거도 치르기 전에 자신들의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민주당에 불타는 증오심을 표출하고 있다. 더구나 본격적인 예비경선이 몇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민주당의 최대 강점인 민생 어젠다(의제)가 가려질 수 있다. 그래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탄핵 조사 결정을 한 것의 현명함 여부에 많은 전략가가 아직도 의문을 표한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트럼프의 심각한 권력 남용에 의원들은 헌법적 수호 책무를 가진다. 그리고 실용적으로 계산해도 민주당에 그리 불리한 게임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개 청문회 등을 거쳐 트럼프에 대한 중도층은 물론이고 일부 온건한 지지층의 이반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10월27~30일 <nbc> 방송과 조사에서 그 징후가 보인다. 응답자의 53%가 탄핵 조사에 찬성했는데, 이는 한 달 전 조사보다 10%포인트나 증가한 것이다. 탄핵 자체의 찬성에서도 응답자의 49%가 긍정해 46% 반대를 근소하게 앞질렀다. 이는 앞으로 공개 청문회 등 변수에 따라 얼마든지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펠로시 하원의장이 정확히 간파하는 점은, 트럼프는 마치 워터게이트 사건의 궤적처럼(민주당사 불법 침입보다 사건 은폐 과정이 더 치명상) 위기 자체보다 위기 관리 과정에서 더 큰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강점인 생존 본능과 충동적 의사결정은 돌파력을 가지지만 스스로 무덤을 파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통화를 자랑스럽게 공개해 민주당에 대대적 공세의 빌미를 준 사례는 그저 빙산의 일각이다.
④ 탄핵 정국 결과는 예정돼 있다
탄핵 정국 전개는 큰 줄기만 보면 대략 네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지면상 더 세부적인 경로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시나리오 1. 민주당 하원에서 탄핵 기소, 공화당 상원 심판에서 기각, 민주당 대선 승리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로다. 설령 하원에서 기소가 돼도 진영 간 내전 상황이자 트럼프의 당 장악력이 높은 상황에서, 상원에서 일부 온건파가 아니라 20명이나 되는 공화당 의원이 트럼프에 등을 돌린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탄핵 정국에서 누적된 펀치를 맞은 트럼프는 중도층을 잃고 대통령직과 심지어 상원마저 지키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민주당에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공화당은 그 후유증으로 꽤 고생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민간인으로서 ‘뉴욕 저승사자’(뉴욕 남부 검찰청)를 만날 수 있다.
시나리오 2. 상원 심판에서 기각 뒤 트럼프 대반격, 바이든 스캔들 재점화
만약 공화당이 주도하는 상원 심판에서 기각된 뒤 트럼프의 공세적 반격, 바이든 부자에게 새로운 혐의가 생긴다면 트럼프는 ‘힐러리 전자우편 게이트 2.0’으로 사태를 몰아갈 수 있다. 즉, 2016년 강력한 프레임이었던 ‘아웃사이더 혁명가 대 워싱턴 딥스테이트(기득권)의 싸움’이라는 전선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가 박빙의 승리를 하고 현 민주당 하원, 공화당 상원의 의회 지형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될 수 있다. 공화당에는 2016년 버전 리플레이(반복)의 최선 시나리오다. 탄핵 수렁에서 빠져나와도 트럼프는 별로 ‘착해지지’ 않는다. 민주당은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고 지구적 자유주의 질서는 확실히 망가진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다. 재선 뒤 기고만장해진 트럼프가 다시 탄핵 덫에 빠질 수 있다.
시나리오 3. 강력한 공개 청문회와 새로운 내부 고발자 등장, 공화당 내 균열, 공화당 대선 후보 교체(이 시나리오는 2019년 출간 예정인 필자가 참여한 공동 저서 에서 일부 재인용)
물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이 불확실성 시대에 하루는 과거 같으면 10년의 시간이다. 2020년 11월 대선까지 우크라이나 탄핵 국면이 종료되더라도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 일련의 공개 증언 충격과 내부 고발자 추가 발생, 위기 수습 과정에서 치명적 실수는 물론이고 경제의 급속한 악화, 외교 난맥, ‘집토끼’ 일부 이탈 등 새로운 변수가 계속 생기면 공화당 지도부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에게 최악의 카드는 2020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공화당의 대타 카드를 검토하는 것이다(‘상대적 안정감의 펜스 부통령 + 중도적 주지사’ 카드는 드림팀이다. 단, 펜스가 트럼프 스캔들 유탄을 맞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금 공화당은 아웃사이더인 트럼프가 아주 쉽게 장악한 트럼프 정당이지만 트럼프가 선거와 공화당 의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트럼프 없는 트럼프 정당’도 가능하다. 만약 선거 승리가 어려워지면 트럼프 재선에 따른 추가 보수 대법원 판사 임명이란 유혹은 포기하고 일단 공화당 생존에 주력할 수 있다. 아주 희박한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사고 실험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시나리오 엑스(X): 21세기는 예상을 초월하는 블랙스완의 시대
앞의 세 시나리오 중 하나라는 단언은 불확실성 시대에 너무 위험한 오만이다. 이 궐위의 시대에는 어떤 불가능한 사건도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미지의 엑스(X)로 남겨놓고자 한다.
이 사태가 마무리되더라도 궐위의 시대가 새로운 시대로 가기까지 진통이 제법 길 것 같다. 극단적 진영 대결은 정당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거의 문명적 차원의 대립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토끼들의 예비선거 방식, 미디어의 양극화와 가짜뉴스, 선거구의 자의적 조정(게리맨더링), 승자독식 선거제도, 금권선거 등 다양한 제도적 배열이 똬리를 틀고 있으면서 이를 강화할 것이다. 고치려는 개혁안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상원 통과와 헌법 수정의 장애물이 너무 높다. 어쩌면 미국 정치는 지구온난화로 빈번해진 캘리포니아의 산불처럼 언제나 내연물질의 발화를 기다리는 일상적 화재의 현장일지 모른다.
미국 대통령제를 원형으로 하여 더 어려운 정치 과제와 지형을 가진 한국으로서는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도 이 오작동과 정치 내전은 심각한 공적 논의 의제로 등장해야만 한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n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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