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 맨’(This man).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1년 3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기자회견에서 김 대통령을 이렇게 불렀다. 디스 맨은 ‘이 사람’ 정도 뜻이다. 부시 대통령은 1946년생이고, 그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1924년생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1924년생이니,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동갑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한-러 정상회담에서 벌어진 ‘외교 참사’</font></font>부시 대통령이 아버지뻘인 김대중 대통령을 “디스 맨”이라 불렀으니, 하대 논란이 일었다. 후일 자서전에서 김 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하나 불쾌했다”고 털어놨다.
‘디스 맨’은 당시 딱딱했던 한-미 정상회담 분위기를 보여줬다.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을 설명하면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지도자로 인정하라고 설득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싸늘했다.
부시 대통령이 왜 이렇게 냉담했을까. 한-미 정상회담을 열흘 앞둔 2001년 2월 말 서울에서 한-러 정상회담이 열렸다. 한-러 정상은 ‘ABM(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 조약은 전략적 안정성의 초석’이란 내용이 담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72년 미국과 옛소련이 맺은 ABM 제한 조약은 요격미사일 전력 강화를 금지해 상호 핵무기 피격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미국은 미사일방어(MD) 체제를 만들고 있었는데, ABM 제한 조약이 MD 추진의 큰 걸림돌이었다. 2001년 9·11 테러가 터지자, 부시 행정부는 ABM 제한 조약에서 탈퇴한다고 러시아에 통보했고 6개월 후인 2002년 6월 ABM 제한 조약은 폐기됐다.
2001년 초반은 MD에 대한 한국 입장이 한-미 관계 현안이었고, 김대중 정부는 막 취임한 부시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을 설득하려고 노심초사하던 때였다. ABM 관련 파문은 ‘한국 외교 최대 참사’로 불린다. 2001년 3월 한-미 정상회담을 수행했던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의 회고록 내용이다.
“‘MD 반대’로 비친 이 사건은 ‘한국이 독자적으로 남북평화조약을 추진하려 한다’는 미국의 오해와 함께 ‘외교 대통령’이라는 김 대통령의 이미지에도 심한 손상을 입혔다. 뿐만 아니라 새로 집권한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워싱턴에 가야 하는 김 대통령의 어깨를 매우 무겁게 만들었다.”
당시 외교부는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ABM 제한 조약 관련 내용이 MD 반대가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표준 문안’을 그대로 인용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외교부가 대미 외교 정보 수집과 분석에 막대한 예산을 쓰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런 설명은 무책임하거나 무능했다. 부시 대통령은 공화당 대선 후보 시절부터 줄곧 ‘러시아가 ABM 제한 조약 개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국은 더 이상 이 조약에 구속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외교부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ABM 제한 조약의 민감성을 파악한 것은 파문이 불거진 이후였다.
당시 한국은 왜 ‘국제안보 깜깜이’가 됐을까? 한국 외교안보 라인이 남·북·미 중심 한반도란 분석틀에 갇혀 있는 반면, 미국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일본, 이란 등 중동, 유럽, 남미까지 함께 보고 세계 전략을 짠다.
올 들어 전문가들은 미국의 ‘중거리 핵전력 폐기 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이하 INF 조약) 탈퇴가 북핵 문제와 동아시아에 미칠 파장을 주시하고 있다. 1987년 미국과 소련이 맺은 INF 조약은 1972년 체결된 ABM 제한 조약과 더불어 냉전시대 핵전쟁의 위험을 막은 양대 조약이었다. 특히 INF 조약은 냉전 종식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INF 조약은 사거리 500~5500㎞에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중단거리 지상발사형 탄도순항미사일의 생산과 실험, 배치를 전면 금지하고 폐기한다는 내용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0월20일, 미 중간선거를 보름 앞두고 INF 조약 탈퇴를 발표했다. 지난 2월2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성명을 발표하며 INF 조약 탈퇴를 공식화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성명에서 ‘러시아가 그동안 조약을 공공연히 위반했는데 미국도 더는 이 조약에 제약받을 수 없다’고 탈퇴 이유를 설명했다. 미국이 러시아의 INF 조약 위반 사례로 꼽은 미사일은 2017년 2월 러시아가 실전 배치한 9M729 노바토르 순항미사일이다. 러시아는 이 미사일의 사거리가 480㎞라고 설명하나, 미국은 사거리 2천~5천㎞로 INF 조약을 어겼다고 주장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트럼프의 속내는 ‘중국 압박’</font></font>INF 조약은 미국의 탈퇴 통보 뒤 6개월이 지나는 8월2일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 경우 올 하반기 미국과 러시아의 미사일 군비경쟁, 중국·유럽 등지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안보 지형도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이 INF 조약 탈퇴 이유로 러시아를 들었지만, 실제는 중국을 겨냥했다는 분석이 많다. 이수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 걸쳐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차단할 수 있는 미국의 독자적인 억지력을 구축·강화해나가는 책략으로 INF 조약 탈퇴를 활용하고자 한다”고 분석했다.
INF 조약에 가입하지 않은 중국은 21세기 들어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거리미사일 능력을 꾸준히 높여왔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 산둥반도, 중국 동남 해안에 걸쳐 중거리미사일이 대거 배치됐다. 이 미사일들은 중국 주변 지역뿐만 아니라 서태평양 일대의 미군 함정과 미군 기지에도 주요한 위협이 되고 있다. 특히 DF-21D는 2013년 중국이 미 항공모함에 대응하기 위해 실전 배치한 대함탄도미사일이다. 이 미사일은 ‘항공모함 킬러’란 별명이 있다. 최근 중국이 공개한 DF-26은 괌의 미군 기지까지 사정거리에 두고 있어 ‘괌 킬러’라고 한다.
지금까지 미국은 INF 조약에 묶여 이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미국이 이 조약에서 탈퇴하면 다양한 중거리미사일 능력을 개발하고, 중국 주변 동맹국에 중거리탄도순항미사일을 배치해 중국을 압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중국과 통상경제협력이 중요한 중국 주변 국가들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미 한국은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국내 배치 문제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고래 싸움에 새우 등 안 터지려면</font></font>정은숙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새 중거리미사일의 유럽 배치는 나토가 신중한 태도라 어려울 듯하다. 반면 미국이 중단거리미사일을 한국에 배치 요청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 군비경쟁과 미사일 배치 경쟁을 벌일 경우 북핵 문제 해결에도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수형 책임연구위원은 “미국의 INF 조약 탈퇴는 미-중 군비경쟁을 촉진할 수 있고 동(북)아시아 주요 국가 간에 새로운 유형의 군비경쟁이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최악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한반도 평화의 여정이 온전히 진행될 수 있는 중장기 전략적 방책을 강구할 시점이다”라고 강조했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font color="#008ABD">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1천원이라도 좋습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후원계좌 <font size="5"><font color="#C21A1A">하나은행 555-810000-12504 한겨레신문</font></font> *성함을 남겨주세요
후원방법 ① 일시후원: 일정 금액을 일회적으로 후원 ② 정기후원: 일정 금액을 매달 후원 *정기후원은 후원계좌로 후원자가 자동이체 신청
후원절차 ① 후원 계좌로 송금 ② 독자전용폰(010-7510-2154)으로 문자메시지 또는 유선전화(02-710-0543)로 후원 사실 알림. 꼭 연락주세요~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font>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font color="#C21A1A">http://bit.ly/1HZ0DmD</font>
카톡 선물하기▶ <font color="#C21A1A">http://bit.ly/1UELpok</font>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이번 미 대선, 개표 빨라지지만…경합주 접전 땐 재검표 ‘복병’
숙명여대 교수들도 “윤, 특검 수용 안 할 거면 하야하라” 시국선언 [전문]
황룡사 터에 멀쩡한 접시 3장 첩첩이…13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SNL, 대통령 풍자는 잘해도…하니 흉내로 뭇매 맞는 이유
[단독] 국방부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북 파병으로 사이버 위협 커져”
미 대선 윤곽 6일 낮 나올 수도…끝까지 ‘우위 없는’ 초접전
남편 몰래 해리스 찍은 여성들…폭스 뉴스 “불륜과 같아”
미 대선, 펜실베이니아주 9천표 실수로 ‘무효 위기’
한라산 4t ‘뽀빠이 돌’ 훔치려…1t 트럭에 운반하다 등산로에 쿵
‘왜 하필 거기서’...경복궁 레깅스 요가 영상에 베트남 누리꾼 시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