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이 전격 취소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 메시지로 발표했다. 엇갈리는 분석과 평가가 난무한다. 미 국무부 쪽은 “북-미 접촉은 계속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정작 북한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운명의 9월’이 시작됐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이번에는 북한을 방문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충분한 진전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루 만에 방북 전격 취소폼페이오 장관이 4차 방북을 공식 발표한 지 하루 만인 8월25일(한국시각)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올린 3건의 메시지 가운데 첫째 내용이다. 미 국무부 쪽 설명을 종합하면,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취소는 트럼프 대통령과 국가안보팀의 내부 논의를 거쳐 결정됐다. 겨우 하루 만에 입장이 바뀐 이유에 대해선, 설명이 옹색하다. 폼페이오 장관의 상대역인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호전적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의 보도 정도가 고작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올린 나머지 메시지를 보자.
“덧붙여, 무역 분쟁이 격해지면서 중국이 비핵화와 관련해 이전과 달리 우리를 지원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가 여전함에도 말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가까운 장래에 북한을 방문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중국과의 무역 갈등이 해결된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따듯한 인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김 위원장과 곧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폼페이오 장관의 8월 말 방북은 여러모로 중요했다.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9월9일)에 즈음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가능성과 ‘9월 안에’ 열기로 한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이기 때문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으로 북-미 협상이 구체적인 성과를 낸다면, 9월 하순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를 계기로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란 장밋빛 전망까지 나온 터였다.
반면 지난 7월 3차 방북에 이어 이번에도 폼페이오 장관이 ‘빈손’으로 돌아온다면, 한반도 정세가 급격히 얼어붙을 수도 있었다. 북-미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 남북관계도 진전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란 비관론도 적지 않았다. 불과 1년 전인 지난해 8월 말 북한은 미군기지가 밀집한 괌을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을 시험발사하면서 ‘8월 위기설’을 절정까지 끌어올렸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취소에 이어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한-미 연합훈련 재개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북-미 협상이 삐걱대는 단계를 넘어 파열음을 내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이번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진화에 나섰다. 8월29일 ‘백악관 성명’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올린 트위터 메시지는 모두 4건이다. 내용을 자세히 따져보자.
첫째, 트럼프 대통령은 중-미 무역 갈등 때문에 북한이 중국에 상당한 압박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중-미가 갈등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과 원만하게 협상할 수 없을 것이란 주장으로 보인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북한에 자금, 원유, 비료를 비롯한 다양한 지원을 한다는 점을 미국이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공조를 깨는 행위로, 한반도 비핵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셋째,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관계가 우호적이라고 믿고 있으며, 한-미 간 ‘전쟁연습’을 하는 데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을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다만 한국은 물론 일본과도 연합훈련을 언제든 재개할 수 있으며, 훈련을 재개한다면 이전보다 훨씬 규모가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넷째, 무역 갈등을 비롯한 중-미 간의 견해 차이를 트럼프 대통령은 ‘위대한 시진핑 주석’과 소통해 조만간 해소할 수 있다고 밝혔다. 두 지도자의 관계가 ‘돈독하다’고도 덧붙였다.
문제도 중국, 해법도 중국?트럼프 대통령이 두 차례 올린 트위터 메시지 7건의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취소는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충분히 보이지 않은 탓이다. 그 배후에 중국이 있다. 중국과의 무역 갈등이 해소되면 북-미 협상도 탄력을 받을 것이다. 결국 문제도 중국이고, 해법도 중국에 달렸다는 얘기다. 기이하다. 갑자기, 왜 중국인가?
트럼프 대통령은 6·12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중국을 비판한 바 있다. 북-중 관계가 풀리면서 미국을 상대하는 북쪽의 태도가 뻣뻣해졌다는 주장으로, 중국이 북-미 사이에 끼어드는 모양새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는 외교 관계에서 양자주의를 선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 탓이기도 하다.
다자외교는 어렵다. 강대국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모두가 합의한 원칙과 규율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두 국가가 맞상대하는 양자 관계는 쉽다. 힘이 센 쪽에선 더욱 그렇다. 위협과 회유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양자협상을 선호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6·12 정상회담에서 북-미는 ‘새로운 북-미 관계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란 원칙에 합의했다. 이어진 협상에서 북쪽은 새로운 북-미 관계의 전제로 ‘종전선언’을 강조했다. 미국은 새로운 북-미 관계를 위해서라도 ‘비핵화와 관련한 실질적인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맞섰다. 원칙에 합의했음에도, 이행에 필요한 ‘새로운 북-미 관계’와 ‘비핵화’의 동기화(작업들 사이의 수행 시기를 맞추는 것)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침묵 지키는 북한 왜?오랜 세월 쌓은 불신을 걷어내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은 게 문제다. 일정한 간격으로 충격이 가해지지 않으면, 진자의 추는 멈추고 만다. 4·27 남북 정상회담과 6·12 북-미 정상회담이 만들어낸 역동적인 한반도 정세도 마찬가지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북핵 문제의 가시적 성과를 내는 데 골몰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속도 조절’에 들어간 모습이 불안해 보이는 이유다.
눈길을 끄는 건 북한의 반응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갑작스러운 방북 취소 결정에도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앞서 북한은 폼페이오 장관의 3차 방북 협상 직후인 지난 7월7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내어 미국 쪽의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를 강력 비판했다. 북 외무성은 8월9일에도 대변인 담화로 “우리의 성의에 찬물을 끼얹고 대화 상대방을 모독하면서 그 무슨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삶은 닭알에서 병아리가 까나오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침묵하는 이유는 뭘까? 북한 노동당 기관지 이 8월18일치에 실은 ‘조미 관계는 미국 내 정치싸움의 희생물이 될 수 없다’는 제목의 개인 필명 논평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신문은 “세계 여론은 7월의 조미 고위급 회담이 왜 성과 없이 끝났는가, 어째서 미국의 ‘부드러운’ 표정과 태도가 ‘강경’하게 바뀌었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나름대로의 원인 분석들을 하고 있다”며 “일치한 결론은 미국이 조선의 선의와 진정을 외면하고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선 비핵화’만을 고집한 것이 회담을 실패에로 몰아갔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핵심은 다음 대목이다.
“그러나 미 협상팀이 보여준 표면적 행동 뒤에 조미 관계 개선의 발목을 붙잡은 보다 심각하고 복잡한 배경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미국 내 정치싸움의 악영향을 받고 있는데 현 조미 관계 교착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소기의 성과가 없었던 지난 7월의 조미 고위급 회담만 보아도 미 협상팀이 자국 내 반대파 세력의 입김에 얼마나 포로되여 있었으며, 그로 인한 후과가 얼마나 큰가를 잘 알 수 있다.”
북-미 협상이 삐걱거리는 이유로 이 ‘미국 내 정치싸움’을 거론한 건 의미심장하다.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장관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선 ‘이해한다’며 공감을 표했다. “국내 반트럼프 세력의 독침을 맞은 미 협상팀”이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그러곤 트럼프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과 폼페이오 장관의 ‘미국 외교 수장다운 지혜와 협상력’을 주문했다. 무엇보다 그간 강조해온 종전선언에 대해 “한갓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는 말로 의미를 낮췄다. 앞선 7월7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북한은 종전선언을 “조선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공고한 평화보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공정”이라고 강조했다.
‘종전선언’에 대한 북쪽의 입장 변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미국의 한반도 전문매체 는 8월21일 두 가지로 풀었다. 첫째, 종전선언이 가지는 상징성의 무게를 낮춰 미국이 큰 부담 없이 동의하도록 만들려는 포석이다. 둘째, 설령 미국이 종전선언에 쉽게 합의하지 않더라도 북한이 협상을 지속해나가기 위해 스스로 전제를 낮춘 측면도 있다. 이래저래 협상에 임하는 북의 태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취소에 북이 침묵을 지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방북의 시기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 9월5일 대북특사 파견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세 번째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특별사절단(특사단)이 9월5일 평양을 방문한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8월31일 특사 파견 소식을 전하며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방북 연기 이후 남북이 다양한 경로로 상시적인 대화를 해왔고, 그 결과가 특사 파견이다. 미국 쪽과도 상시적으로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고 했다. 4·27 정상회담이 원칙에 대한 합의였다면, 9월 정상회담에선 이를 이행하기 위한 세부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판문점선언의 고갱이는 ‘더 이상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구호다. 북-미가 숨 고르기를 할 때, 남북이 더욱 속도를 내야 한다. ‘운명의 9월’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충격의 10월’이 올 수도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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