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제2의 국민차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프로톤’의 실패로 충분하다는 거다. …정부가 주도하는 제2의 국민차 프로젝트를 추진하지 않겠다.”
말레이시아의 ‘돌아온 독재자’ 마하티르 모하맛이 한발 물러섰다. 지난 7월16일 자신의 공식 블로그를 통해 말레이시아 국민차 ‘프로톤’의 뒤를 이은 제2의 국민차 생산 계획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프로톤은 말레이시아 최초의 자동차 제조사다. 마하티르가 첫 총리 임기(1981~ 2003) 때 애착을 갖고 주도했던 사업이지만, 경영 위기에 허덕이다 2017년 중국 회사에 팔렸다. 매각 소식에 눈물을 흘렸다던 마하티르는 다시 총리가 되자마자 국민차 부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일본 신문이 주최한 제23회 ‘아시아의 미래’ 포럼에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쓰비시 등 일본 자동차 회사의 지원과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민차 집착 내려놓기</font></font>“국민차는 정말 인기 없는 정책이었다. 말레이시아가 수출할 만한 품질의 자동차를 못 만든다는 것은 이미 판명난 거 아닌가? 애지중지 낳아 키운 아이를 되살리고 싶은 개인적인 집착일 뿐이다.” 말레이시아 슬랑오르주 프탈링자야의 시민사회단체 ‘나의 피제이(PJ)’ 활동가 제프리 팡의 말이다.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마하티르가 국민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시점이다. 14대 국회 개회 하루 전날이란 점이 의미심장하다. 7월17일 개회한 말레이시아의 14대 국회는 범야권연합체 ‘희망연대’(파카탄 하라판·PH)가 전체 222석 가운데 122석으로 과반의석을 차지했다. 5월9일 14대 총선에서 나집 라작 전 총리의 부패와 선거조작 정황에 분노한 말레이시아 유권자 48.13%가 희망연대를 선택했다. 말레이시아 61년 역사상 처음 이뤄진 야당을 통한 ‘정권 교체’다.
마하티르는 희망연대와 두 가지 조건에 합의하고, 새 정부의 2~3년 단기 총리로 추대됐다. ‘선거 승리를 위해 보수적인 말레이 무슬림 표 10%를 확보할 것’과 ‘희망연대의 개혁 의제를 실현할 것’이 그것이다. 선거를 승리로 이끈 마하티르는 국회 개회 직전 시민들이 반대하는 개인적인 정책 비전을 내려놓으면서, 두 번째 정치 개혁 약속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나집 심판용’이란 느슨한 선거 연대로 시작한 희망연대는 아시아 정치사에서 유례없는 실험을 하고 있다. 전직 ‘독재자’와 함께 그가 남긴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다. 이름하여 마하티르와 함께 ‘마하티리즘 극복하기’다. 인터넷 독립언론 에 따르면, ‘마하티리즘’이란 말레이시아 현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하티르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리킨다. 국가 경제와 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면 정치적 자유와 민주·인권의 가치는 타협할 수 있다는 개발 독재형 지도력을 용인하는 정치 문화로도 해석할 수 있다.
마하티르는 이미 이번 총리 임기를 자신이 남긴 잘못된 정치적 유산을 청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지난 총선 운동 기간에 발표한 10분14초 분량의 ‘유튜브’ 영상에서 ‘왜 93세에도 쉬지 않고 일하냐’는 어린이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현재 상황 때문에, 아마도 내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곤경에 빠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어서다.”
실제 희망연대 정부에서는 총리와 여당 연합, 정부와 시민사회의 관계가 ‘견제와 균형’ ‘토론과 포괄적 의견 수렴’ 모델로 새롭게 설정됐다. 마하티리즘의 산실 격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 집권했던 지난 61년 동안엔 상상할 수 없던 변화다. 아시아가 기억하는 말레이시아 정치는 총리와 집권 여당 지도부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권력을 배분하고,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독주하는 정치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어린이 결혼’ 금지할까</font></font>5월10일 희망연대 정부 출범 이후 나타난 말레이시아 새 정치의 신호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금까지 공방이 이어지고 있는 ‘어린이 결혼’ 논란이다.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을 통해 타이-말레이시아 국경 지역에서 41살 말레이시아 무슬림 남성이 11살 타이 무슬림 소녀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새 정부 출범 50일을 향해 가던 때였다.
사실 말레이시아에서 어린이 결혼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태평양 자료연구센터’(Arrowo)와 말레이시아 여성단체 ‘이슬람의 자매들’(Sisters in Islam)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현재 법적 혼인 상태에 있는 19살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은 모두 15만3천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8만여 명이 여성이다.
시민사회가 줄기차게 문제를 제기해왔지만, 지난 정부와 국회는 ‘종교가 허락한다’는 이유로 미성년자 결혼 문제에 손을 놓고 있었다. 비무슬림 어린이의 법적 혼인 연령은 남성 18살 이상, 여성 16살 이상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무슬림 어린이는 혼인 연령에 제한이 없다. 이슬람 율법을 관장하는 샤리아 법원이 승인하면 나이와 관계없이 결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포르노는 불법이고, 어린이 결혼은 합법이냐’고 압박하자, 희망연대 정부는 움직였다. 말레이시아의 1세대 여성운동가 마리아 친 압둘라 의원이 가장 먼저 ‘조건 없이 남녀 결혼 합법 연령을 18살로 지정하는 법 개정’을 촉구했다.
2008년부터 공정선거 운동 ‘베르시’를 이끌며 시민들의 리더로 떠오른 압둘라 의원(희망연대 무소속, 프탈링자야)은 6월27일 발표한 기고문에서 “어린이 결혼은 어린이 인권침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빈곤, 허약한 건강 상태, 문맹, 가정폭력 문제를 영원히 악순환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 쪽 총책임자인 완 아지자 완 이스마일 부총리 겸 여성가족공동체개발부 장관의 미온적 대처가 시민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7월17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어린이 결혼 혐의는 증거에 따라 처리돼야 한다. (그 전에) 사안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혐의자에게 소셜미디어 린치를 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자유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라티파 코야 사무총장은 “증거가 명백하고 가해자가 고백을 했는데 조사를 오래 끌 필요가 있나? 왜 아이가 이미 자백한 유아 성애자 손에 있으며, 아직도 정부에 구출되지 못한 건가? 더 이상의 변명과 조사 지연은 불필요하다”고 반박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시민중심 사회’를 향한 도전</font></font>희망연대를 주도하고 있는 민중정의당(PKP) 창당 당원인 인권변호사 응이아오 이노 응이는 이렇게 말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를 무시하고 내달리는 시대는 끝났다. 시민사회의 눈에 기준 이하였던 법체계들을 모두 뜯어고쳐야 한다”며 “시민들은 5년 안에 모든 것을 깨끗하게 처리하라고 희망연대에 표를 던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중심 사회’를 향한 말레이시아의 도전이 첫발을 뗀 것으로 보인다.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font color="#008ABD">글·사진</font> 이슬기 자유기고가 skidolma@gmail.com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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