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가 대결과 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이래 고조돼온 미-중 대결과 북핵 위기는 1월20일(현지시각)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그 정부의 출범으로 새 국면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트럼프가 대선 과정과 당선 이후 보여준 혼란스러운 대외정책 기조는 동아시아 정세의 전개를 가늠하기 힘들게 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이 미국과 세계에 주는 가장 큰 함의는 무엇보다 세계화(글로벌리제이션) 조류의 거부와 이를 핵심으로 하는 우파 포퓰리즘의 전면적 득세다. 세계화에 대한 불만에서 배태된 우파 포퓰리즘 세력의 득세는 서방세계의 반이민, 인종주의, 국수주의, 보호무역주의, 고립주의를 부르고 있다. 이는 세계화와 상관없이 인류가 추구해온 다원주의, 다문화주의, 개방의 가치가 부정되거나 쇠퇴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미국 기존 보수우파의 기독교적 윤리관, 경제적 방임주의, 국제주의가 쇠퇴하고 그 빈자리를 국수주의·보호주의·인종주의·반다원주의 등이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실익 챙기기</font></font>트럼프의 우파 포퓰리즘과 반세계화 조류는 국제사회의 지정학적 구도에도 영향을 준다. 트럼프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와 동맹 구도에서 미국의 역할과 개입에 회의적 입장을 일관되게 드러냈다. 그가 선거 과정에서 대외정책에 대해 던진 말들은 이를 보여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시대에 뒤떨어졌다. 나토 회원국이 침공받아도 미국이 자동적으로 방어해주지 않는다.” “시리아 내전에서 러시아와 협력하겠다.” “만약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국가들이 이슬람 국가와의 전쟁에 병력을 대지 않으면 그들로부터 석유 구매를 중단할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이 미군 주둔 비용 기여를 증대하지 않으면 기꺼이 미군 철수를 할 수 있다. 좋지는 않지만, 그 대답은 예스다.” “만약 미국이 현재의 나약한 길을 계속 간다면, 일본과 한국이 나와 상의하거나 혹은 상의 없이 핵무기 개발의 길로 가기를 원할 것이다.” “우리는 중국에 대해 엄청난 경제적 힘을 가지고 있다. 그건 무역의 힘이다. 나는 무역을 절대적 거래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다.”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여전히 일관되지 않고 구체성이 떨어지나, 몇 가지는 일관되게 밝히고 있다.
첫째, 국제 문제에서 미국의 개입과 역할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동맹국에 역할 증대 및 방위비 부담 증가를 요구하고 있다. 둘째, 미국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시리아 내전 등 국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넷째, 이슬람주의 무장세력, 특히 이슬람국가(IS) 격퇴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다. 다섯째, 중국과의 경쟁에서 환율과 무역 등을 통한 경제적 대결을 추구하고 있다.
국제 문제에서 미국의 역할과 개입에 대한 트럼프의 회의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나 미국 헤게모니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걸었다. 그가 말하는 미국 우선주의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실익을 챙기는 새로운 일방주의를 의미한다.
대통령 당선 뒤 그가 기용한 외교안보 진영의 면면은 이를 시사한다. 미국 대외정책의 조정자인 국가안보보좌관에 마이클 플린 전 국방정보국장, 중앙정보국장에 마이크 폼페오 하원의원, 법무장관에 제프 세션스 상원의원을 지명했다. 이들은 모두 반이슬람, 적극적 군사력 대처, 강경한 법집행을 공통분모로 하는 초강경 보수파다. 특히 플린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을 미국의 최대 안보위협 세력으로 규정하고, IS 격퇴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 전 중부사령관도 중동에서 미 군사력의 적극적 대처를 주장하는 인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방위비 부담 전가하는 또 다른 일방주의 </font></font>트럼프의 외교안보 진영 인선을 보면,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 발현 양태가 조지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 노선과 결과적으로 비슷할 것이라는 우려가 든다. 네오콘은 기독교적 선악관에 입각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세계에 확산하는 것을 미국의 사명으로 보는 우파 이상주의 세력이다. 트럼프주의자들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사명이 아니라 미국의 국수주의적 이익을 강조하는 극우 현실주의 세력이다. 양쪽 모두 미국 우월주의와 예외주의가 초석이다. 트럼프주의자들은 여기에 더해 백인국수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네오콘은 국제 문제에서 군사력을 불사하는 미국의 적극적 개입을 표방하며, 기존 동맹국과의 협조보다는 일방주의로 일관했다. 트럼프주의자들은 기존 동맹국과의 협조보다는 방위비 부담을 전가하려는 또 다른 일방주의를 드러낸다. 국제 문제에서 미국의 개입과 역할 축소를 말하나, 강력한 군사력 유지를 통한 적극적 대처를 주장한다.
네오콘은 이념, 트럼프주의자는 이익에서 출발하나 그 발현 양태는 인종주의, 반이슬람, 군사력 증강, 일방주의다. 무엇보다 그들은 공화당 주류의 기반인 석유·군수·건설·플랜트 등 전통 굴뚝산업 엘리트들의 이익을 구현하려 한다. 이런 의미의 대외정책에서 트럼프주의자는 거꾸로 선 네오콘일 수도 있다.
네오콘은 특히 중동에서 이라크 등 반미 국가와 이슬람주의 세력을 소탕해, 친미 민주주의 질서를 전파하는 중동민주화론을 내걸었다. 이는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졌고, 현재 IS를 탄생시킨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외정책이 됐다. 트럼프주의자 역시 중동에서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을 미국의 최대 안보위협 세력으로 보고 우선 과제로 IS 격퇴를 내세운다. 트럼프주의자들에게 (그 세력이 위축되고 있는) IS와의 전쟁은 자신들의 첫 대외정책 성과물이 될 수 있고 경제적 이익까지 충족할 유혹적인 대상이다.
선거 과정에서 밝힌 트럼프의 대외정책 메시지로 미루어, 트럼프 행정부 출범 뒤 대외정책의 초점은 러시아와 중동이 될 것으로 예측됐다.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중동에서 IS 격퇴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상대적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릴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트럼프의 당선 이후 상황 변화는 동아시아를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에서 우선도를 높이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하나의 중국’ 정책을 건드리다 </font></font>첫째, 트럼프가 추진하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미국 국내에서 엄청난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더 나아가 트럼프의 러시아 커넥션 의혹이 확산되며 그의 대통령직 수행 위기로까지 번질 조짐이다. 지난 대선에서 불거진 러시아 해킹 사건이나, 러시아가 트럼프의 섹스파티 등 약점을 잡았다는 정보 문건 등으로 인해 트럼프 행정부는 대외정책의 초점을 러시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처지에 몰렸다. 불가피하게 최대 가상 적국인 중국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둘째, 트럼프 자신이 당선 뒤 중국을 자극했다. 그는 중국이 국가안보와 대외정책의 레드라인(금지선)으로 설정하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건드렸다. 당선 뒤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통화해 중국의 반발을 샀다. 그는 더 나아가 인터뷰에서 “‘하나의 중국’ 정책이 뭔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만, 무역을 포함한 여러 가지와 관련해서 중국과 협상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중국’ 정책에 우리가 왜 얽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셋째, 북한도 트럼프를 상대로 ‘주목받기’식 자극을 펼치고 있고 트럼프 역시 이에 대응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준비 사업이 “마감 단계”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이에 트럼프는 즉각 트위터에서 “북한이 미국 일부에 도달하는 핵무기 개발의 최종 단계에 있다고 언명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응했다. 는 1월1일 정보 당국의 한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당선인이 처음이자,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요청했던 특별 기밀 브리핑은 북한과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넷째, 트럼프와 그 행정부의 외교안보 진영은 미-중 대결과 북핵 문제를 연계하고 있다. 트럼프 자신이 ‘하나의 중국’ 정책에 의구심을 표하면서, “우리는 중국의 통화 평가절하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우리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데 중국은 우리에게 무거운 관세를 부과한다. 남중국해에선 거대한 요새(인공섬)를 쌓았다”면서 재차 중국을 비판하며, “솔직히 중국은 북한 문제에서 우리를 돕지 않는다”고도 비난했다. 트럼프는 선거 과정에서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중국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밝혀왔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지명자의 의회 청문회는 동아시아와 관련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잘 보여준다. 그는 “중국이 단지 제재 이행을 피하려고 북한의 개혁(핵포기) 압박 약속을 한 것과 같은 빈 약속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북한 문제와 더불어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 등을 포괄적으로 거론하면서 “중국은 ‘신뢰할 만한 파트너’가 아니었다”고 단언했다. 그는 “만약 중국이 유엔 제재를 지키지 않는다면 미국 처지에선 그것(세컨더리 보이콧)이 중국으로 하여금 (제재 이행을) 지키도록 하는 적절한 방법일 것”이라고 밝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무역을 절대적 거래 수단으로 사용할 것” </font></font>트럼프 당선 뒤 상황 변화는 트럼프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이 강경한 기조로 흐를 것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강경 기조가 중국을 원천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지정학적 대결에 기초한 것인지, 아니면 미국의 즉자적 경제 실리를 챙기기 위한 전술적 압박인지는 아직 가늠하기 힘들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면, 그 행정부는 근본적으로 중국을 미국 헤게모니를 위협하는 주적으로 설정하는 지정학적 대결에 기초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주도의 세계화 조류 속에 중국과의 통상·경제 문제 해결을 추진하고 이는 공공연한 군사적 긴장이나 대결을 표방하지는 않을 것이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문제에서 무역과 경제를 우선순위에 놓고 “나는 무역을 절대적 거래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말해 중국 압박 방안이 무역임을 공언했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가 보여주는 ‘하나의 중국 정책’에 대한 회의 등은 그가 지정학적 대결을 추구하기보다 그 카드를 사용해 중국에서 경제적 실리를 얻어내겠다는 전략으로 읽힌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모든 카드를 동원해 중국을 압박하지만, 결국은 경제적 실리를 위해 타협과 대화로 돌아설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트럼프가 원하는 건 경제적 이득이지, 중국과 지정학적 대결은 아니다. 중국과 지정학적 대결의 핫스폿인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그 전선에서 이탈하고 있다. 두테르테는 중국에서 무기 수입, 러시아와의 군사훈련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에 타협하지 않고 강공으로 밀면, 중국 역시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지정학적 대결을 강화할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도 밀접해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통화하고 ‘하나의 중국’ 정책에 딴지를 거는 것은 중국과의 경제통상 전쟁을 위해 지정학적 대결 카드를 사용하는 거다. 그 카드는 쥐고 있어야 효력이 있다.
트럼프가 선거 전후에 툭툭 내뱉은 대내외 정책 기조는 미국의 기존 정책과 크게 결을 달리한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주장하는 모순되고 구체적이지 않은 정책과 노선의 예측불가성(unpredictability)이다. 트럼프는 오히려 이를 자신의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4월27일 워싱턴 프레스클럽에서 외교정책 연설을 통해 자신은 협상가적 관점에서 외교정책을 바라본다며 그중 하나가 ‘예측불가성’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이 민주주의와 개방이라는 전통적 가치 때문에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행동을 쉽게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이런 주장을 폈다. 그는 남중국해에서의 중국 견제에 대해서도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며 미국은 완전히 예측 가능한데 이는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트럼프 행정부 키워드 ‘예측불가성’</font></font>트럼프가 말하는 예측불가성은 구체성이 결여되고 모순되는 노선과 공약에 대한 변명이기는 하지만, 트럼프와 그 행정부를 규정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그가 내건 ‘미국 우선주의’가 특정 철학과 이념, 노선에 구애되지 않고 상황에 맞춰 전방위적으로 추구될 것임을 시사한다. 좋게 말하면 실용주의이고, 나쁘게 말하면 일방주의이며, 그 실용주의와 일방주의를 즉자적으로 적용하는 대내외 정책이 추진될 것이다.
동아시아 정책도 미국의 즉자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군사적 긴장과 대결도 마다하지 않는 일방주의를 구사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상대방과의 대화와 대타협으로 선회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트럼프에게서 야누스 같은 여러 얼굴을 보게 될 것 같다. 최종적으로 보여줄 트럼프의 얼굴이 무엇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한국이 북한과 관계 개선을 추진해 실마리를 잡고 한반도와 북핵 문제에서 주도권을 보여준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어느 행정부보다 한국의 역할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북한과 북핵 문제에서 압박과 대결을 추진한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어느 행정부보다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을 것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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