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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 트럼프

‘나는 평균 이하’라는 유권자의 위기감·상실감 파고든 막말 정치인, 미 공화당 대선 후보 트럼프의 성공 비결
등록 2016-05-20 15:52 수정 2020-05-03 04:28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AP 연합뉴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AP 연합뉴스

지난 3월 말,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공항으로 가는 ‘우버 택시’(앱을 통한 택시 연결 서비스) 기사가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쏘고 한국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 같다”는 걱정의 말을 했다. 이야기는 자연히 미국 대통령선거로 넘어갔다. 40대 초반쯤 돼 보이는 백인 택시 기사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했다.

“솔직함이 마음에 들어서, 할 말을 속 시원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심스레 “가끔 말이 지나쳐 거북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가 백미러로 나를 흘끗 보더니 “지금껏 한 번도 투표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있는데, 이번만큼은 트럼프를 찍기로 이미 마음먹었다는 이가 많다”고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아무도 예측 못했다</font></font>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를 달갑잖게 여기는 공화당 지도부라도 경선 결과를 되돌릴 길이 없어 보인다. 앞서 공화당의 권력 서열 1위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편견과 혐오에 기대어 사는 정치인은 절대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될 수 없다. 우리 당은 통합과 포용을 원칙으로 삼는 링컨의 당이다”라며 트럼프의 대선 후보 선출을 공식적으로 반대했지만, 트럼프의 지지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화당 안에서 ‘트럼프 반대’ 목소리는 오히려 역풍을 불러오고 있다. “지난 7년 넘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에 대안 없이 어깃장만 놓던 공화당 지도부가 이제 와서 위선을 떤다”는 비아냥이다.

‘대선 후보 트럼프’는 평당원, 일반 유권자와 스스로 멀어진 공화당 지도부의 참패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트럼프가 미국 양대 정당 가운데 하나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큰 충격이다. 트럼프는 백인우월주의를 거침없이 설파하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대놓고 비난하는 막말 정치인,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을 쏟아내는 선동가다.

실제로 트럼프가 여기까지 오리라 예측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 트럼프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시점으로 돌아가보자. 언론뿐 아니라 정치 전문가라는 이들 가운데 사실상 한 명도 지금의 ‘트럼프 현상’을 예측하지 못했다. 트럼프가 8개월 넘게 부동의 여론조사 1위를 할 때도 이들은 “지지율에 거품이 끼었다”며 트럼프를 과소평가했다. “대선 후보 경선은 인기투표가 아니다. 예능인에 가까운 (트럼프 같은) 사람을 후보로 뽑을 만큼 유권자는 어리석지 않다”는 말도 나왔다. 결국 “당 지도부가 원하는 후보가 지명된다” “그래서 트럼프는 대통령 후보가 못 된다”는 주장은 마치 ‘수학 공식’ 같은 대접을 받았다.

공화당 지도부가 거부하는 ‘공화당 대선 후보’ 트럼프는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르게 됐을까? 의 네이트 콘 기자는 ‘나는 왜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하지 못했나?’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가 눈여겨봤어야 할 지점 몇 군데를 복기했다.

먼저 이번 공화당 경선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후보가 난립했다. 경선에 참여한 사람만 17명이었다. 애초 트럼프는 ‘고만고만한’ 여러 후보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유력 후보들 가운데 누구도 트럼프를 공격하지 않았다. 트럼프를 견제하는 데 돈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그사이 트럼프는 지지율을 높였고, 경선에 들어서자 지지율을 ‘표’로 바꿔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정치적 올바름’이란 잔소리 </font></font>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5월6일 미국 오리건주 유진 유세장에 도착하기 전 ‘트럼프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한 시민(위쪽)과 다음날 워싱턴주 린든 트럼프 유세장에 모인 지지자들(아래쪽). REUTERS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5월6일 미국 오리건주 유진 유세장에 도착하기 전 ‘트럼프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한 시민(위쪽)과 다음날 워싱턴주 린든 트럼프 유세장에 모인 지지자들(아래쪽). REUTERS

결과론이지만 강력한 대항마가 부족하기도 했다. 공화당 지도부가 밀어줄 만했던 젭 부시나 마르코 루비오 같은 후보가 잇따라 낙마했다. 공화당 내 ‘진보 성향’으로 꼽히는 존 케이식 후보는 유력 경쟁자를 떨어뜨릴 만한 힘이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자기 스스로 대통령 후보가 될 정도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결국, 강경보수 성향의 트럼프와 극우 성향 티파티의 지지를 받는 테드 크루즈의 양자 구도가 됐다. 크루즈는 본선 경쟁력이 너무 약했다. 트럼프에겐 하늘이 준 기회라고 할 만했다.

게다가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지역, 즉 ‘블루 스테이츠’(Blue States)에 사는 공화당원들이 당 지도부의 뜻을 따르리라는 기대도 섣불렀던 것으로 판명됐다. 온건보수로 분류되는 이 지역 공화당원들은 뜻밖에 트럼프에게 여유 있는 승리를 안겼다. 아울러 트럼프가 연일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면서 그가 출연하는 텔레비전 토론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자, 방송사는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하듯 보도했다.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지 않고도 트럼프는 경선 기간 내내 효과적인 광고를 한 셈이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성공 비결은 ‘유권자 심리’를 교묘하고 정확하게 파고든 점에 있었다. 특히 최근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이 느끼는 ‘내가 미국 사회의 평균에 못 미친다는 위기감’ ‘미국의 보통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잃고 있다는 상실감’을 잘 파고들었다.

미국의 여론 지형은 분명 바뀌었다. 동성결혼 지지가 대표적인데, 이제 미국에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사회적으로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더 높다. 동성애자를 차별하거나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런 말을 입에 올리냐”는 욕을 먹기 십상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말은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듣기 싫은 잔소리의 대명사가 됐다. 트럼프는 그 점을 공략한 것이다.

실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임기 동안 동성결혼이 합법화됐고, 여성은 과거보다 더 많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종교, 문화적 차이에 대한 포용도 확대됐다. 미국 사회의 다양성은 크게 증진됐지만, 반작용도 있었다. 오바마라는 인물이 등장했을 때부터 뭘 해도 그저 오바마가 싫었던 이들은 미국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가 계속 좁아지는 걸 느꼈고, 그 결과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한 태도도 갈수록 더 편협해졌다. 이런 불만을 공화당 안에서도 ‘가장 공화당스럽게’ 흡수한 인물이 트럼프인 셈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기계적 중립’ 덫에 빠진 언론</font></font>

올해 미국 대선에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있다. 트럼프라는 ‘예외적 인물’이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서는 것을 언론이 어떻게 다루는지 지켜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언론이 ‘허위 균형’(False Equivalence)의 덫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기계적 중립’에 해당하는 말이다. 엄연히 다른 층위에 서 있는 공화당과 민주당 후보를 한데 묶어 보도하고픈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크루그먼은 ‘세제 정책’을 예로 들었다.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고소득자들에게서 세금을 더 걷어, 그 돈으로 정부 지출을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반면 트럼프는 ‘막대한 감세’를 약속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부 지출을 어느 부문에서 줄일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심지어 국가 부채마저 줄이겠다고 한다.

양당 후보의 말과 태도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그 방식이나 어휘 선택이 막말에 가까운 경우가 태반이다. 이를 놓고 “두 후보 모두 맹공을 펼쳤다”는 식으로 보도를 정리하면 ‘기계적 균형’은 맞출 수 있다. 그러나 유권자에게 ‘공정한 정보’를 줘야 하는 언론 본연의 역할은 방기하는 것이 된다.

크루그먼이 ‘중앙정치 어젠다 밀어넣기’(centrification)라고 부른 오류도 언론들이 피해야 할 덫이다. 지역이나 계급 같은 유권자 층위를 무시하고, 워싱턴으로 대변되는 중앙정치 의제만을 유권자에게 대입해 대선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들이다. 트럼프와 트럼프 지지자를 잇는 핵심 고리는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다. 그러나 언론은 정부 적자, 월스트리트 구제금융에 대한 거부감, 양대 정당에 대한 염증 등 다른 원인을 갖다 붙인다. 트럼프도 백인우월주의가 공화당을 벗어나 전국적인 표를 얻는 데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 대선에서 이런 약점을 덮을 ‘어떤 가면’이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양극화’ 투표율 예고 </font></font>

미국 유권자들의 이념적 양극화는 전에 없이 심해졌다. 이번 선거에서도 인종·연령·계층별로 투표율이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클린턴을 싫어하는 정도와 민주당 지지자, 특히 유색인종 유권자가 트럼프를 두려워하는 정도를 비교해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대목이다. 미국 대선은 어떤 결과로 끝을 맺게 될까? 결과는 6개월 뒤 판가름 난다.

송인근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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