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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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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나라 2등 시민의 긴 싸움

대지진 이후 네팔 역사상 가장 긴 시위인 테라이-마데시 지역 시위에서 목숨 잃고 일상 무너진 주민들이 원하는 건 평범한 네팔인의 삶
등록 2016-01-30 05:12 수정 2020-05-02 19:28



네팔 지진 그 후


① 네팔, 현재진행 중인 재난
② 봉쇄된 국경의 밤
③ 히말라야 나라 2등 시민의 긴 싸움


네팔 남부 바라주 칼라이야에서 만난 마데시족 소비야 카툰의 남편 히파잣 안사리는 2015년 9월1일 거리에 나갔다가 시위대에 휩쓸려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카툰이 남편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네팔 남부 바라주 칼라이야에서 만난 마데시족 소비야 카툰의 남편 히파잣 안사리는 2015년 9월1일 거리에 나갔다가 시위대에 휩쓸려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카툰이 남편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2015년 12월12일 네팔 남부 바라주 칼라이야에서 만난 마데시족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우리는 대대로 억압받고 차별받고 무시받고 천대받아왔다. 우리 목숨은 이 정부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침에 칼라이야 시내 큰 길가의 찻집에서 만난 고등학교 교사 사티아 나라얀 쿠수하는 ‘기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격앙된 목소리로 마데시족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호소했다.

바라주는 네팔 최대 국경도시 비르간즈에서 오토바이로 30분 떨어진 곳이다. 8월부터 네팔 남부 테라이-마데시 지역 정당의 신헌법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쿠수하도 시위에 참여했다가 진압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시위대에 총부리 겨누는 경찰

같은 날 테라이-마데시민주당(TMDP) 사무실 주변 찻집에서 쿠수하와 함께 만난 TMDP 중앙당위원회 간부 시얌프라사드 굽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8년 전 마데시 정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 전엔 네팔의회당(Nepali Cogress)에서 10년 넘게 활동했다. 네팔의회당을 떠난 이유는 우리 테라이-마데시 사람들의 목소리를 의회에서 전혀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시위 진압 경찰의 총과 폭력으로 벌써 50명 넘는 마데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칼라이야에서 만난 또 다른 마데시 무슬림 여성 소비야 카툰(20)은 9월1일 남편 히파잣 안사리(20)의 죽음 이후 내내 ‘권리’라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듯 보였다. 임신 8개월째인 그녀는 석 달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종종 ‘마데시 권익운동’에 대해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마데시의 권리가 개선돼야 한다’고 했던 적도 있다. 카툰과 안사리는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네팔 국가공용어인 네팔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카툰은 기자에게 테라이-마데시 지역 토착어 중 하나인 보즈푸리(Bhojpuri)어로 “남편은 그날 고열과 두통에 시달리던 어머니 약을 사러 나갔다. 매일 시내 대로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과 충돌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시위가 잦아들면 나가라고 했지만 그대로 길을 나섰다”고 말했다. 자전거 수리점에서 일하던 안사리는 시위대에 휩쓸렸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진흙을 빚어 만든 테라이-마데시 지역 전통가옥 앞마당에서 카툰은 1살 난 딸을 안고 이런 말을 했다. “시위에 나가면 위험한 걸 알지만 그래도 남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한 번쯤 참여해보고 싶다.” 보즈푸리어-네팔어 통역을 위해 동석한 테라이-마데시민주당 공보관 등이 그녀 입에서 ‘권리’(Adhikar)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추임새를 넣었고, 네팔어-영어 통역을 도와준 비르간즈 지역 기자가 이 추임새를 걷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정당 관계자들의 첨언과 과장을 모두 걷어내고 기록한 카툰의 소망은 마데시 어린이·청소년의 학교 교육과 노약자의 병원비를 보장받는 미래다.

바라주의 농촌 마을과 시내 큰길에서 접한 이 사연들은 올겨울 네팔 남부 테라이-마데시 지역 어딜 가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테라이-마데시 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들은 지금 네팔 역사상 가장 긴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2015년 8월15일 시작돼 1월21일 현재까지 160일째다. 9월23일부터는 네팔-인도 국경을 막는 연좌시위가 120일째 이어지고 있다. 테라이-마데시 지역 정당들이 ‘무기한 투쟁’에 돌입한 이유는 지난해 8월8일 제헌의회 과반수가 합의한 ‘6개 연방주 모델’ 때문이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무기한 투쟁
테라이-마데시 정당 관계자들이 네팔과 인도 사이 국경 다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테라이-마데시 정당 관계자들이 네팔과 인도 사이 국경 다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네팔은 2006년 10년간의 인민전쟁(1996~2006) 끝에 왕정제의 영구적 폐지와 연방민주공화제 채택에 합의했다. 2008년 5월28일 첫 제헌의회를 통해 탄생한 네팔연방민주공화국의 최종 과제는 연방주 나누기다. 네팔 초대 헌법 채택에 8년이 걸린 이유 역시 연방주 구획을 둘러싼 갈등 탓이 크다.

네팔은 현재 14개 행정구역과 75개 구로 나뉘어 있다. 기존 행정구역을 버리고 전국을 인구비와 종족 구성을 반영한 연방주로 새로 구획하는 것이 지금 네팔 정치의 과제다. 2008년 출범한 1대 제헌의회와 2013년 2대 제헌의회에서 연방 모델이 모두 여덟 번 바뀌었다. 가장 처음 의회를 통과한 14개 연방주 모델은 이후 일부 지역의 반대로 11+6개 주 모델에서 12개 주, 6~7개 주, 4개 주, 8개 주, 6개 주에서 가장 최근의 7개 주 모델로 거듭 바뀌었다. 네팔을 몇 개의 연방으로 나누는가는 전국의 토호와 정당들의 첨예한 관심사였고, 그중에서도 테라이-마데시 지역의 반발이 가장 심했다.

테라이-마데시는 네팔 전국에서 가장 처음 자치주를 요구했던 지역이다. 1980년대 이 지역 출신 정치인 가젠드라 나라얀 싱이 북부 산악 출신 정치인과 관료가 이끄는 카트만두 중앙정부에 대항해 남부 평원 지역인 ‘테라이-마데시 지방자치주’를 제안했다. 당시 이 제안은 분리주의적·친인도적이라는 집중 공세를 받았다. 하지만 현재 네팔에서 토착 종족을 고려한 지방분권형 자치주를 요구하는 것은 민주화 절차로 수용되고 있다. 2006년 네팔 주요 정당들이 민주공화국의 요건으로 연방제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네팔을 먹여살리는 가난한 곡창 지대

‘테라이’와 ‘마데시’는 모두 저지대 평원을 뜻하는 말이다. 히말라야산맥의 남쪽과 인도-갠지스평원(혹은 힌두스탄평원) 북쪽 사이에 있다. 테라이(Terai)는 산스크리트어(인도·유럽 어족 중 인도·이란 어파에 속한 인도·아리아어 계통의 고대 인도 표준 문장어. 불경이나 고대 인도문학이 이 언어로 기록돼 있음)로 ‘산자락’을, 마데시(Madhesh)는 산스크리트어로 ‘중간 국가’라는 뜻으로 네팔 고대 왕국들과 인도 북부의 고대 아와드 왕국 사이에 있는 땅을 가리킨다. 테라이가 지리적 의미로 많이 쓰이는 반면, 마데시는 사회·문화적 정체성과 토착 종족을 뜻하는 식으로 쓰인다.

네팔 남부의 서쪽부터 동쪽까지 길게 이어진 이 저지대 평원은 네팔 전체 면적(14만7181km²)의 17%를 차지한다. 이곳에 네팔 전체 인구 2800만 명 중 51%가 거주하고 있다. 51% 중에서도 절반은 마데시 토착 종족, 절반은 북쪽에서 이주해 내려온 산악 종족이다. 테라이-마데시에서는 국가 공용어인 네팔어와 함께 인도 북부,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쓰이는 마이틸리어(Maithili·전세계 사용 인구 약 3470만 명), 라즈반시어(Rajbanshi·전세계 사용 인구 약 300만 명), 보즈푸리어(전세계 사용 인구 약 4천만 명) 등이 토착 언어로 통용된다.

기원전 623년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가 바로 이곳 테라이-마데시 지역에 있다. 네팔 남부에서 룸비니 다음으로 유명한 관광지 치트완국립공원도 있다. 1984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이 자연공원에는 외뿔코뿔소, 벵골호랑이, 표범, 늪지 악어 등 멸종위기종이 서식하고 있다. 이 동물들은 잡목이 우거진 대초원, 사라수(석가모니가 열반할 때 사방에 한 쌍씩 서 있었던 나무) 숲과 진흙이 풍부한 습지에 산다.

이 지역은 야무나강, 갠지스강, 사르다강, 카르날리강, 나라야니강 등 히말라야에서 흘러나온 큰 강줄기들이 만나는 곳으로 수천km²에 달하는 충적선상지가 펼쳐져 있다. 네팔을 먹여살리는 곡창지대가 바로 이곳이다. 쌀, 밀, 콩, 사탕수수, 황마, 담배, 옥수수가 이 땅에서 나는 주요 작물이다. 테라이 평원의 우거진 숲에서 채취한 벌꿀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다만 테라이 지역은 1950년대까지 말라리아로 악명 높았다. 특히 내부 테라이(Inner Terai)에서 자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사람이 워낙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 여행자들이 네팔과 인도를 오갈 때 테라이에 밤이 오기 전 최대한 빨리 통과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숲과 습지 원주민 타루(Tharu)족이 이 말라리아 창궐 지역의 유일한 거주자였다. 이들에게는 수세기에 걸쳐 말라리아 면역체계가 있어서다. DDT 살충제가 보급되며 말라리아가 근절된 1960년대부터 네팔 북부 산악 지역과 외부 테라이(Outer Terai) 지역, 인도 북부에서 이 평원으로 대거 이주해왔다. 이들은 주로 농업과 임업에 종사했다.

무너진 칼라와르의 꿈
지난해 9월 시작된 네팔-인도 국경 봉쇄로 연료난이 심해지자 장작으로 불을 피워 조리하는 가정이 늘었다.

지난해 9월 시작된 네팔-인도 국경 봉쇄로 연료난이 심해지자 장작으로 불을 피워 조리하는 가정이 늘었다.

네팔 북부 히말라야 산악 지역 종족들과는 다른 언어적·문화적 전통을 이어온 남부 평원 지역 종족들은 ‘히말라야의 나라’에서 소외받는 소수자 혹은 ‘2등 시민’이라고 느껴왔다. 1960년대 이후 이주민이 늘어나자 판차야트(Panchayat·의원을 국왕이 지명하거나 인준하도록 정한 형식만 갖춘 의회로 1960년부터 1990년까지 지속됨) 제도를 통해 국정 전권을 쥐고 있던 마헨드라 왕은 네팔 통합을 위해 네팔어 사용 의무화, 국적 취득 요건 강화 정책을 정했다. 이를 통해 네팔어를 할 수 없으면 네팔 국적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네팔 여성과 결혼한 외국 남성과 그 자녀는 네팔 국적 취득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졌다. 이에 대해 테라이-마데시 주민들은 강한 반감을 느껴왔다. 여전히 이 지역에는 힌디어, 마이틸리어, 라즈반시어, 보즈푸리어만 구사할 줄 아는 네팔인이 많다. 정식 학교 교육을 받은 인구가 적어서다.

중동과 말레이시아 등지에 나가 일하는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상당수가 테라이-마데시 출신들이다. 미국·한국·일본 등 노동 허가를 받기 까다로운 나라는 주로 고등교육을 받은 네팔 청년들이 이주노동을 나가지만 교육수준이 낮은 테라이-마데시 출신들은 중동의 건설 현장, 말레이시아의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향한다.

지난해 9월2일 네팔 남부 파르사주에서 일어난 거리시위 중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소한 사 칼라와르(24)도 올해 말레이시아로 갈 예정이었다. 1살, 3살 된 두 아들을 둔 칼라와르는 2015년 초 아내 비니타 데비 샤(22)와 함께 가족의 미래를 설계했다. 집 근처에 찻집을 열어 1년간 함께 운영하면서 칼라와르는 말레이시아행을 준비했다. 샤는 네팔 찻집에서 번 돈으로 살림을 꾸리고 칼라와르는 말레이시아에서 번 돈을 모아 나중에 사업 자금과 아이들 교육비에 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꿈은 무너졌다. “그날 어머니가 아파서 약을 사러 나갔다가 시위대에 길이 막혔는데 그러던 중 경찰의 총에 맞았다.” 샤 역시 보즈푸리어로 답했다. 50살 어머니는 말레이시아행 스티커를 붙여놓은 아들의 여권을 들고 서럽게 울었다. “아들이 죽고 제정신이 아니다. 말레이시아에 가려고 가진 땅도 모두 팔아 우리에겐 이제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우리 미래를 책임지지 않는다.” 통곡 뒤 조금 진정된 칼라와르 어머니가 말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시위 중 생명을 잃는 데 책임감을 느끼지만 카트만두가 변해야 한다.” 테라이-마데시전국행동당(Terai-Madhesh Rastriya Abhiyan) 정치인 아트마 람 프라사드의 말이다. 지난 120일간 네팔-인도를 오가는 수송 차량의 길이 막힌 비르간즈-락사울 국경다리 천막농성장에서 그를 만났다.

프라사드는 시위와 국경 봉쇄가 시작된 뒤에야 카트만두에서 테라이-마데시의 현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2008년 1대 제헌의회 의원으로 활동한 프라사드는 “국경 봉쇄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확신했다. 그에게 시위와 국경 봉쇄 기간이 길어지고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지친 테라이-마데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쓴소리에 대해 물어봤다. 지역 정당 소속 정치인들이 1대 제헌의회에서 마데시를 위해 한 일도 없으면서 2대 의회 입성에 실패하자 마데시 권익운동에 적극적이라는 내용이다. 프라사드는 “오해고 음모”라고 짧게 답했다.

“국경 봉쇄는 효과적”인가

테라이-마데시 지역 정당들이 현행 7개 연방주 모델에서 테라이-마데시 지역에 배정된 2개 연방에서 제외된 최남단의 3개 구를 찾아오기 위해 벌이는 160일간의 시위 끝에 마데시 사람들은 그들의 권리를 찾을 수 있을까?

평범한 마데시 사람들이 원하는 네팔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규 교육과 기본적인 보건의료 서비스를 정당들이 챙기기까지는 앞으로 더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테라이-마데시 지역 정당들이 주요 세 정당과의 교섭에 계속 어깃장을 놓고 있는 탓이다. 1월21일 의회에서 열릴 헌법 개정에 관한 법안 심의에 테라이-마데시 지역 정당들이 참여할 가능성도 적다. 네팔은 앞으로 몇 년 더 2015년 대지진 이후 남겨진 국가 재건 과제와 씨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파탄(네팔)=글·사진 이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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