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커피 말고 수출할 게 뭐가 있나? 경제적 침략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인도네시아 점령기(1975~99) 무장투쟁을 이끈 동티모르민족해방군(FALINTIL) 공보담당이었던 주제 벨로는 동티모르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가입 얘기를 꺼내자 걱정거리부터 풀어놨다. 정부 비판적 성향의 주간신문 (Tempo Semanal)의 발행·편집인인 그는 “동티모르가 아세안에 합류를 해도 손해, 안 해도 손해”라고 말한다.
지금 동티모르 정부는 아세안 가입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곳에서 큰형님이란 뜻의 ‘마운 봇’(Maun Bot)으로 불리는 독립영웅 샤나나 구스망 현 기획전략투자장관부터 조제 하무스 오르타 초대 외무장관, 루이 마리아 데 아라우주 현 총리까지 이름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아세안 가입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동티모르 외무부 역시 올해 외교 활동의 우선순위가 아세안 입성을 위한 로비와 준비라고 말할 정도다.
몇 년째 PIF 참관국 지위왜 이렇게 열심일까? 지난 8월31일 외무부 청사에서 과 만난 로베르토 소아레스 외무차관은 “1975년부터, 대인도네시아 독립 투쟁 당시 우리의 미래를 고민할 때부터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아세안 합류는 중요한 화두였다”고 답했다. 1991년 11월12일 딜리 산타크루즈 묘역에서 벌어진 인도네시아군의 민간인 학살(산타크루즈 학살)의 생존자인 로베르토 차관은 2001년 건국 직전부터 동티모르의 대아세안 외교 실무를 담당해왔다. 그는 신생독립국가로서 동티모르에 지역적 소속감과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아세안 가입에 대한 열망을 전했다.
실제로 2002년 5월20일, 500년에 가까운 식민 경험과 독립투쟁 끝에 탄생한, 새 밀레니엄의 첫 독립공화국 동티모르의 외교 중심 과제는 아세안, 태평양도서국포럼(PIF·Pacific Islands Forum) 등 지역연합체 가입이었다. 13년이 지난 현재까지 성과는 ‘PIF 참관국’뿐이다. 2011년 3월4일 아세안 의장국 인도네시아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공식적으로 회원 가입을 신청했지만 동티모르는 아직 참관국(Observer) 자격도 얻지 못했다. PIF에선 몇 년째 참관국 지위에 머물러 있다.
이에 대해 로베르토 차관은 “캄보디아가 마지막으로 가입하던 때(1999년)와 비교하면 아세안헌장 발효(2007년) 뒤 가입 절차가 달라졌다”며 까다로워진 회원국 심사 탓이라고 했다. PIF에 대해서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사회·문화 교류에 더 중점을 두고 있어서 참관국 자격을 유지하지만, 아세안의 경우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까닭에 정식 회원국이 되려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를 주고 경제를 얻는다’동티모르 정부가 내놓은 아세안 가입의 거래 조건은 독특하다. 거칠게 ‘정치를 주고, 경제를 얻는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동티모르가 겪어온 450년의 포르투갈 식민기(1515~1975), 24년의 인도네시아 강제 점령 끝에 이뤄낸 독립과 건국의 자랑스런 경험을 인권·민주주의·평화 문제로 고민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공유한다는 것이 동티모르 정부가 아세안 10개국 정상들에게 내놓은 ‘물건’이다. 여기에 덤으로 동티모르가 의장국을 맡고 있는 포르투갈어사용국가공동체(CPLP)의 브라질·모잠비크·포르투갈 등 3개 대륙 회원국들과 아세안 회원국들 사이의 교역 다리 역할도 내놨다. 역으로 동티모르가 기대하는 것은 2015년 12월 출범할 예정인 인구 6억3천만 명, 국내총생산(GDP) 2억3천억달러 규모의 아세안경제공동체(ASEAN Economic Community)라는 ‘시장’이다.
이 새로운 시장은 동남아시아를 하나의 생산기지, 소비시장, 물류거점으로 묶어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는 것을 목표로 2007년 처음 구상됐다. 아세안은 이를 위해 투자·무역 등 경제활동에 필요한 국제 기준의 법 규정을 갖추기 위해 같은 해 아세안헌장도 만들었다. 인구 면에서 중국과 인도에 이은 세계 세 번째 규모의 단일 시장이고, 규모 면에서 세계 7대 경제권에 속한다. 이 시장이 인구 120만 명에 2012년 기준 GDP 1105달러, 출산율 5.3명(아시아 1위)인데 노동가능인구의 70%가 실직 상태인 경제후발국 동티모르 바로 코앞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2030년까지 중상위소득국가(1인당 국민소득 3036~9348달러)로 성장하는 것이 동티모르 정부의 야심찬 목표다. 그러나 석유·가스 개발 외에 돈 나올 곳이 없고 산업 인프라와 숙련 노동력 등이 열악한 사정을 고려하면 이 시장은 들어가자니 살아남을 엄두가 안 나고 안 들어가자니 교역의 끈이 아쉬운 딜레마와 같다. “지금도 동티모르는 아세안 국가들의 상품으로 도배된 상태인데 가입하면 어떻게 되겠나? 동티모르는 돌이킬 수 없는 아세안 상품 판매·소비 시장이 된다.” 동티모르에서 가장 오래된 인권단체 중 하나인 인권연합(HAK Association) 사무국장 마누엘 몬테이로의 말이다.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유일한 쇼핑몰 티모르 플라자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이나 딜리에서 가장 분주한 상가거리이자 중국계 도·소매점으로 가득한 아우디안(Audian)가에 가보면 마누엘의 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진열된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인도네시아나 타이, 말레이시아산이다. 인도네시아의 대표 브랜드 ‘인도푸드’와 생수 ‘아쿠아’, 맥주 ‘빈탕’, 정향담배 ‘구당가람’과 타이 맥주 ‘타이거’를 쉽게 볼 수 있다. 동티모르산은 냉동 생선, 달걀, 유기농 커피 정도다.
동티모르 합류가 일으킬 정치·외교적 긴장동티모르 정부는 언론과 시민사회의 이런 고민을 잘 알고 있지만 손해를 봐도 일단 들어가자는 입장이다. 독립투쟁기부터 있어온 ‘국가적 합의’와 건국 뒤 ‘헌법의 요구’가 명분이다. 그러나 동티모르의 연내 아세안 입성은 어려워 보인다. 인도네시아 등 동티모르를 후원하는 회원국들은 11월 아세안정상회의에서 참관국 지위라도 얻을 수 있도록 힘쓰고 있지만 싱가포르 등 회의적 태도의 회원국들은 동티모르가 아세안의 11번째 회원국이 되면 발생할 영향을 생각해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말레이시아 싱크탱크(ISIS)의 샤흐리만 로크만은 지난 1월 포르투갈 뉴스통신 와의 인터뷰에서 동티모르의 회원 가입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배경으로 “6개 창설국(인도네시아·싱가포르·말레이시아·타이·필리핀)들은 버마(미얀마)가 가입한 뒤 버마의 문제가 아세안의 문제가 됐던 경험을 기억한다”며 동티모르의 합류에 따른 정치·외교적 긴장을 지적했다.
딜리(동티모르)=글·사진 이슬기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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