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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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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세월호, 참사를 보듬는 손길

규제 완화·사후 대처의 난맥상 등을 보인 세월호와 닮은꼴 ‘소마 탄광 참사’ …

심리적 충격에 빠진, 무너진 비극의 현장에서 듣는 ‘참사 이후의 이야기’
등록 2014-11-22 14:50 수정 2020-05-03 04:27
터키 민중의 집 사람들을 만난 한국 방문단. 터키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크가 만든 민중의 집은 역사의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민중운동의 거점으로, 교육기관으로 터키 전역에 퍼져 있다. 터키, 스웨덴 민중의 집 방문단 제공

터키 민중의 집 사람들을 만난 한국 방문단. 터키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크가 만든 민중의 집은 역사의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민중운동의 거점으로, 교육기관으로 터키 전역에 퍼져 있다. 터키, 스웨덴 민중의 집 방문단 제공

마포 민중의 집 정경섭 공동대표와 오현주 사무국장, 구로 민중의 집 강상구 대표가 지난 10월13~30일 스웨덴과 터키 민중의 집을 방문했다. 이들은 현지의 민중의 집뿐 아니라 스웨덴 사민당과 노동자교육센터를 방문했고, 지난 5월 발생한 터키 소마 지역 탄광 참사의 피해자들을 만났다. 이들이 전하는 현지의 이야기를 싣는다. _편집자


“광부의 집이 어딘가요?”

터키어 통역자의 물음에 지나가던 한 남자가 아예 차에 오른다. 길이 복잡하니 직접 알려주겠단다. 차에 올라탄 라마잔(35)은 광부였다. 그는 지난 5월 폭발 사고가 난 바로 그 터키 탄광의 노동자였다. 사고가 나던 날, 그는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하루 휴가를 냈고, 천운으로 참사에서 비켜날 수 있었다.

“탈출 훈련을 한 적도 없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4월16일로부터 한 달쯤 뒤인 5월13일, 터키 중서부의 도시인 소마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버금가는 사건이 있었다. 소마의 여러 광산 중 한 곳에서 전기 공급 장치가 폭발해 갱도가 무너져내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301명이 사망하고 486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망자 가운데는 15살짜리 소년도 있었다. 탄광이 민간회사에 위탁 운영되면서 비용 절감을 위해 하청 구조가 만연하다보니 생긴 일이다. 사망한 대부분의 노동자는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하청업체는 신원 확인도 없이 그저 낮은 임금에 일할 의사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비정규직으로 고용했다.

역시나 정부의 안전관리는 소홀했다. 사고 두 달 전에도 안전점검이 있었지만 지적된 문제는 없었다. 사고 뒤 정부와 회사의 초동 대응 역시 형편없었다. 소마를 비롯해 이즈미르, 이스탄불, 앙카라 등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항의하는 여론에 정부는 강경 일변도로 대응했다.

여기까지가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야기다. 이후 그리고 그 이면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광부 라마잔이 안내한 ‘광부의 집’은 터키 민중의 집 연합회가 사건 이후 소마에 세운 민중의 집이다. 이곳에서 만난 광부들은 참사 전후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사건의 징후는 정부 당국이 안전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던 사고 두 달 전 바로 그즈음에도 있었다고 한다. 광산 내부의 구조물이 흔들리고, 갱도 안에서 무엇인가 타는 듯한 냄새가 자꾸 났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이야기했으나 “어용노조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용노조와 회사 그리고 정부 당국의 일관된 ‘안전 무시’는 지난 수년간 광산을 둘러싸고 진행된 민영화와 규제 완화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었다. 국가가 운영하던 소마의 광산들은 민간회사로 그 운영 주체가 바뀌었다. 민간회사는 당연히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석탄을 캐기 위해 매진했다. 하청업체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해 인건비를 아꼈고, 생산량을 이전보다 두 배 이상 늘렸다. 대신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한 예산은 줄여나갔다.

“사고가 났을 때 대피 요령 같은 것을 알려준 적이 없다. 탈출 훈련을 한 적도 없었다.”

사고 위험성이 높은 광산일의 특성상 사고를 대비해 적절한 장비와 시설을 갖추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활동, 사고 발생시 행동 요령 등을 사전에 마련하고 훈련하는 것은 회사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일이다. 그러나 소마 광산에서는 이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비용 절감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지 20년 된 가스마스크

한 광부가 딱 보기에도 낡고 오래된 가스마스크를 꺼내 보여주었다. 사고 뒤 현장에서 발견된, 주인을 알 수 없는 가스마스크는 만들어진 지 20년 된 것이었다. “이 마스크로는 15분밖에 못 버틴다. 만약 이보다 좋은 가스마스크가 지급됐으면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거다.” 이런 증언도 나왔다. “원래 사고가 나면 대피할 수 있도록 피난처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비정규직 고용, 규제 완화, 안전 예산 축소.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원인과 소마 탄광 붕괴 사고의 원인은 누군가 미리 짜맞춘 것처럼 일치했다.

사고 발생 직후 정부의 대응 역시 세월호 참사와 판박이였다.

그날 비번이었던 13년 경력의 광부 니하트(39)는 사고 직후 5일 동안 사망자와 부상자를 합쳐 총 50명 가까운 사람을 구했다. 사고 뒤 첫 이틀 동안 정부는 완전히 우왕좌왕했다고 한다. 체계적인 구조가 시작된 건 사고 발생 3일째부터였다.

갱도 내 사정을 잘 아는 광부들은 유독가스가 들어찬 환경에서도 2시간 동안 지하로 내려갔다가 올라와서 쉬고 다시 내려가기를 5일 동안 반복했다. 세월호 구조자들이 물 밑으로 내려갔다 올라오기를 반복했던 것처럼 그들은 땅 밑으로 내려갔다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이른바 ‘구조전문가’라는 사람들이 500명 동원되었으나 이들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좁은 갱도 안에서 약 20명의 광부가 목숨을 걸고 작업하는 동안 전문가들은 “갱도 입구 쪽에서만 왔다갔다 했고, 우리가 사람을 끌어올리면 전문가들이 이 사람들을 찾아낸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마치 첫 주검을 자기들이 발견한 것처럼 해달라고 요구했던 세월호 참사의 언딘처럼 말이다. 하지만 광부들의 이러한 노력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은 모두 정부 편이다. 방송에는 전문가들이 광산 밖으로 주검을 운반하는 장면만 나왔다. 우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광산 사고는 ‘신의 의지’?

사고 뒤 유족과 지역사회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끔찍했다. 사건 초기 정부는 막대한 지원금을 공언했다. 유족과 부상자들에 대한 심리적 치료 등도 약속했다. 그러나 이면에서 정부는 이슬람 종교인들을 마을과 유족들의 집으로 보내 광산 사고는 ‘신의 의지’라면서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을 종용했다. 한국 정부는 경제를 살리자면서 세월호 유족을 파렴치한으로 몰았는데 터키에서는 신의 의지가 동원됐다.

사고 뒤 소마 노동자들의 처지는 전례 없이 열악해졌다. “소마에서는 3개의 광산에서 6천 명이 일했는데, 사고가 난 광산과 또 다른 광산 두 곳이 폐쇄됐다.” 유족과 부상자들이 보상금을 받긴 했지만 나머지 수천 명의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각자 고향에 내려가 일용직을 전전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들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사건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감춰졌던 심리적 충격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아이딘(35)은 이웃에 사는 19살 청소년이 죽었다고 했다. 부모는 아이가 죽은 것이 자기 책임이라며 몇 달째 극도의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옆집에 사는 광부는 그날 다행히 부상만 당하고 살아남았는데, 어느 날 자기 부인을 껴안고 거리로 뛰어들었어요.” 니하트의 증언이다. 사건 당일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채, 여전히 광산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에 같이 걷던 부인을 구하려고 한 행동이었다. 이웃 간의 갈등도 불거졌다. 한 집은 남편이 죽고, 또 한 집은 다행히 부상만 당한 이웃의 경우가 특히 심하다. 광산 폐쇄 뒤 일자리를 잃은 광부의 부인은 남편을 잃은 아이 엄마에게 “너희 남편은 죽어서 보상금을 많이 받고 좋겠다”며 화를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고 뒤 가족은 박살나고, 이웃 관계는 소원해졌으며, 지역사회는 무너졌다.

무너진 지역사회를 다시 세우는 노력은 정부가 아니라 광부와 민중의 몫이었다. 애초에 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도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 취재를 위해 들른 날의 하루 전에도 폐쇄하지 않은 광산 한 곳에서 파업이 있었다. 사건 직후 민주노조가 만들어지고 현재까지 1천 명의 노동자가 ‘혁명적 광부 노조’에 가입했다. 터키 민중의 집 연합회는 앙카라에서 콘서트를 열어 소마 광부의 집을 짓는 기금을 마련했다. 대학생들은 광부의 집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광부의 아이들을 위해 여름학교를 열었다. 의사들이 직접 내려와 유족의 심리치료에 나섰고, 광부들은 노동 안전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 광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노동조합 사무국장 술레이만(35)은 ‘건강한 노동, 안전한 노동’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은 어떻게 가능한가. 술레이만의 말은 이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아는 것이다.”

또다시 발생한 광산 매몰 사고

소마 사고 당시 총리였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지난 8월 터키 역사상 처음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3년을 휩쓸었던 시위도, 소마 사태도 에르도안 총리의 대통령 당선을 막지는 못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그 전 11년 동안 터키의 총리였고, 재임 기간에 평균 5.5%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경제성장은 소마의 광부 같은 노동자가 만들어온 것이었으나, 그 결과로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터키에서도 한국에서도 경제성장은 신화이자 종교다. 소마 사고 이후 정부는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지난 10월18일 터키 중남부 아나톨리아의 한 광산에서 또다시 매몰 사고가 발생했다. 터키공화국 건설 91주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강상구 구로 민중의 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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