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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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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록지 않을 19번째 쿠데타

타이 군부, 쿠데타 정부 세워 언론 통제·반쿠데타 세력 소환…

여느 때와 달리 학생·언론 등을 중심으로 한 저항 움직임 거세
등록 2014-05-27 15:49 수정 2020-05-03 04:27

지난 5월22일 오후 4시30분은 공식 기록만 열여덟 번의 쿠데타로 얼룩졌던 타이 역사가 다시 한번 헌정 유린이라는 철퇴를 맞는 순간이었다. 2006년 쿠데타에도 동참한 바 있는 쁘라윳 짠오차 육군참모총장은 이날 열아홉 번째 쿠데타에서 주역으로 등장했다. 쿠데타 선언과 함께, 그는 국가평화질서유지위원회(NPOMC·National Peace and Order Maintaining Council)를 구성하고 스스로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로써 그가 속한 군정파 ‘이스턴타이거’의 위력은 다시 한번 확인됐다. 그의 전임자인 아누뽕 빠오친다 전 육군참모총장과 쁘라윗 웡수완 전 국방부 장관 등 지난 8년간 유혈 진압과 쿠데타, 그리고 왕정복고 옐로셔츠의 뒷심으로 지목받아온 인물들은 모두 이 정파 소속이다. 모두 21보병연대(21st Infantry Regiment), 즉 ‘왕비근위대’(Queen’s Guard) 출신이다.

‘중재자’의 가면을 벗어던진 군부

5월20일 ‘쿠데타가 아니’라고 못박은 계엄령 선포 뒤 군은 각 진영의 대표들을 초대해 협상을 ‘중재’하는 척해왔다. 5월22일 레드셔츠와 옐로셔츠, 정당, 과도정부 등 7개 진영의 대표단이 2차 협상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군이 참석자들을 감금 이송하면서부터 쿠데타는 감지되었다. 5월23일치는 “(친탁신계) 과도정부가 정부를 내놓지 않겠다고 해서 쿠데타가 선포됐다”는 군 당국자의 말을 인용했다. 이는 그 자리가 ‘협상’이 아니라 친탁신계 정부의 자진 하야를 압박하는 자리였음을 방증한다. 군은 ‘중재자’의 모습을 가장했을 뿐 사실상 ‘쿠데타’의 완성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타이 군 전문가이자 치앙마이대 교수로 재직 중인 폴 챔퍼 박사는 계엄령 선포 직후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타이는 지금 두 개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선출직 상원의원들과 왕정주의 세력의 꼭두각시 정부를 수립하거나, 아니면 간단히 군사 쿠데타를 감행하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억압, 정정 불안, 권위체제 등 결과에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지난 6개월간 거리시위를 벌였던 옐로셔츠가 요구한 것 역시 결과적으로 별 차이 없는 이 두 개의 안을 오고 갔다. 레드셔츠의 요구대로 ‘선거로 직행’하는 안까지 포함하면 세 가지 안이 있었던 셈이지만, 군은 더도 덜도 아닌 군사 쿠데타로 화답해 왕정복고 세력에 확실한 승리를 안겨줬다.
쿠데타 정부의 권위적 조치는 거칠고 빠르게 쏟아졌다. 그중 언론 장악은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효과다.
“지금 타이에는 언론 자유가 없다. 우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상에 대롱거리는 마지막 자유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 자유마저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다.”
계엄령과 쿠데타를 시시각각 비판 논평 중인 의 쁘라윗 로짜나프룩 기자는과의 페이스북 인터뷰에서 언론통제의 현실을 한탄했다. 모든 방송사가 방송 중단 명령을 받은 가운데 5월22일 타이 공영방송 <tpbs>는 유튜브로 방송을 진행하다 방송 종료 뒤인 밤 10시께 보도국장이 군 본부로 불려가기도 했다.
이처럼 2006년 쿠데타 상황을 훨씬 웃도는 강압 조처들은 이미 사전 쿠데타 성격이 짙었던 계엄령을 선포할 때부터 예고된 바다. 군은 100년 전 절대왕정 시대에 제정된 군헌법에 근거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선포시 정부와 사전 협의토록 돼 있는 입헌군주 헌법을 무시했으니 과도정부와 협의가 없었던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뿐만 아니라 해군·공군과도 사전 협의나 공지를 하지 않았다는 게 군 정보에 밝은 언론계의 전언이다. 계엄령과 쿠데타 과정에서 군이 왕의 승인을 받았는지도 불확실하다.
“보수세력들의 관점에서 볼 때 위기감이 매우 고조된 것 같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분쟁에서 질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 결과가 바로 쿠데타다.”

쿠데타 30분 뒤 시작된 저항

타이 싱크탱크인 시암인텔리전스의 진단은 군이 느낀 위기감의 수위와 속전속결의 배경을 설명해준다. 또한 시암인텔리전스는 쿠데타 정부가 구성할 차기 내각의 총리 후보로 쁘라윗 웡수완 전 국방부 장관과 왕실 추밀원 인사인 팔라콘 수완라뜨를 점쳤다. 이 중 팔라콘 수완라뜨는 지난해 12월 옐로셔츠 시위가 시작된 시점부터 줄곧 차기 총리로 거론돼온 인물이다.
군 내부 진영과 정파, 그리고 계급 간 잡음을 감지하고 더 지체하지 않고 밀어붙인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일부 분석가들이 앞으로 군 내분이 표출될 가능성을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지난 5월11일 이런 상황을 암시할 만한 장면이 하나 있었다. 이날 3군총사령관과 국방부 상임장관이 차기 왕으로 내정된 와지라롱콘 왕세자와 면담을 했다. 이후 군은 국왕이 총리를 임명하는 ‘헌법 7조’ 발동을 요구해온 옐로셔츠에게 그 안이 ‘적절치 않다’고 응대했다. 이는 공군에 대한 영향력이 높고 왕정복고 세력 주류의 쿠데타를 반기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왕세자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물은 엎질러졌다. 군은 5월23일 자정을 기해 ‘입헌군주제’를 명문화한 2조를 제외한 현존하는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2006년 쿠데타 세력이 기안해 2007년 통과시키며 2006년 쿠데타 세력의 사면을 보장했던 그 헌법이다. 쿠데타 정부는 독립기관들, 즉 상원과 사법부 등에는 일상 활동을 이어가라고 덧붙였다. 이 독립기관들은 그동안 왕정복고 세력의 편에 서서 ‘사법 쿠데타’를 주도한 기구이며 2007년 군부 기안 헌법 아래 왕정복고 세력의 핵심 인사들로 임명되고 장악되던 기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법 백지화 12시간 만인 5월23일 정오. 잉락 친나왓 전 총리와 전 과도정부 관료 등 전 과도정부 내각 인사 18명, 탁신가의 정치인 23명 그리고 각 셔츠 진영의 지도부 등 123명가량이 쿠데타 정부의 소환 통보를 받고 출두를 시작했다. NPOMC는 이들의 해외 출국을 금지한 가운데 소환에 불응하면 체포될 것이라고 으름장도 놓았다. 이 소환 조치가 레드셔츠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군은 이미 레드셔츠의 탈출을 막겠다며 강성 지역인 동북부 이산과 가까운 타이-라오스 국경을 5월23일 이른 오후부터 봉쇄했다.
그러나 100년 전 절대주의 망령을 불러온 정국이 앞으로 무난하게만 흘러갈 거라 보면 오판이다. 쿠데타 선언 30분 뒤인 오후 5시께부터 탐마삿대학 학자들을 중심으로 저항은 시작되었다. 5월23일 오전 11시에는 학생 80명가량이 주도한 반쿠데타 시위대가 민주탑 부근으로 행진했다. 2006년 쿠데타 직후 좀처럼 볼 수 없던 규모이고 현상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의 비판적 글까지 폐쇄하겠다는 협박이 나오지만 굴하지 않고 독립언론 는 사이트 상단에 검은 표어를 달았다.
“는 쿠데타를 반대한다. 군은 권력을 시민들에게 되돌려라.”
소환 대상 인물이자 레드셔츠 진영에서 독립적 성향이 강했던 ‘레드선데이’ 솜밧분감몽은 소환에 응할 수 없다며 “날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라”는 글을 트위터에 남기기도 했다. 최북단 도시인 치앙라이의 레드셔츠 지도자 타닛유나시니카셈은 “군의 권력 장악은 불법이며 최대한 저항할 것이다. 레드셔츠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최악의 상황은 게릴라전 도래

쿠데타에 대한 이런 저항은 평화적 시위 뿐 아니라 지하 활동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점쳐진다. 시암인텔리전스는 쿠데타 직후 ‘최악을 예상하라’는 제목의 긴급 보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어쩌면 몇 달은 불안한 평화가 이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레드셔츠는 지하조직화될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게릴라전이 계속되고 있는) 타이 남부와 같은 내전 상황의 도래다.”

방콕(타이)=이유경 통신원 Lee@penseur21.com</tp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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