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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진심, 북한을 움직이나

‘핵 없는 세상’ 오바마 연설 앞두고 북한 미국에 회담 제의

상호 오판이 불렀던 경색 국면, 오바마 적극적 비핵화 행보로 해빙 조짐
등록 2013-07-02 16:47 수정 2020-05-03 04:27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6월19일 독일 베를린 중심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핵 없는 세상’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기에 앞서 몰려든 환영 인파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6월19일 독일 베를린 중심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핵 없는 세상’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기에 앞서 몰려든 환영 인파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2009년 4월5일 오전 11시20분께, 북한은 사전에 예고한 대로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 단리 발사장에서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다. 북한이 은하2호 로켓을 발사할 때 버락 오 바마 미국 대통령은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60 주년 기념식 참석을 겸해 유럽의 폴란드를 방문하고 있었다.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 변인은 그해 10월 과 한 인터뷰 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의 로켓 발사 소 식을 접하고 새벽 4시 무렵에 깨어나 대책회 의를 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이후 긴급 안보 현안 때문에 꼭두새벽에 전화를 받고 깨어난 것은 그때 가 처음”이란다.
오바마 새벽잠 깨운 2009년 북한 로켓 발사
전문가들은 당시 로켓 발사가 북한이 ‘오 바마 1기’ 때 미국과 관계를 맺는 첫 단추를 잘못 꿰는 결과를 빚은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지난해 4 월 열린 토론회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2009년 4월5일 오전 11시(현지시각) 오바 마 대통령은 체코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할 계획이었다. 대선 후보 시절 북한과의 적극적인 협상 의 지를 보였던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새벽 발 사 보고를 받고는, 연설문을 직접 수정하면 서까지 북한을 비난했다. 이후 북한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 않았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에 따르면, 실제 오바마 대통령의 프라하 연설 내용은 북한의 로켓 발사 직후 발표한 백악관 성명보다 훨씬 강경했다. 그는 연설에서 “북한의 도발은 유
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행동뿐만 아니라 이러한 무기의 확산을 방지할 수 있는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며 “규범은 구속력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반하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이야말로 강력한 국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강경한 자세에는 북한에 대한 ‘배신감’도 작용했다. 미국은 그해 2월 초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움직임이 구체화됐을 때부터 협상 의사를 밝혔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같은 해 3월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한·중·일 3국 방문 기간에 북한을 방문할 준비가 돼 있었으나, 북한이 초청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협상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은 4월13일 로켓 발사를 비난하는 안보리 의장성명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북한은 북한대로 발사 계획을 국제기구는 물론 미국에 사전 통보하고 우주 조약들에 새로 가입하는 등 국제 기준에 맞는 합법적 절차를 밟았다. 우주 공간의 평화적 이용을 보장하는 주권적 권리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2009년 3월 한 강연에서 적절히 비유했듯이, 북의 인공위성 발사는 미국의 주의를 끌기 위한 ‘경고사격’이었다. 오바마는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 합의 직전에 이르렀으나 전임 조지 부시 행정부가 무시해온 미사일 문제를 다시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은 “미국이 로켓 발사를 도발로 규정하고 징벌을 가하는 적대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데 어떤 대화를 하려는 것인가”()라고 반문했고, “우리를 변함없이 적대시하는 상대와 마주 앉았댔자 나올 것은 아무것도 없다”(외무성 대변인)고 선언했다. 그리고 5월25일 2차 핵실험으로 맞섰다.
프라하 연설에서 천명한 ‘핵 없는 세계’란 비전은 오바마 대통령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그는 1983년 컬럼비아대학 시절 ‘핵 없는 세계’라는 제목의 논문을 학교 신문에 기고했으며, 그 꿈은 2008년 7월24일 그가 대통령 후보로 베를린에서 연설했을 때 처음 등장했다. 그건 또한 미 행정부의 핵심 외교전략가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기도 했다. 미 국무·국방장관 등을 지낸 거물들,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윌리엄 페리와 샘 넌 상원의원 등은 2007년 1월 에 공동 기고한 글을 통해, 미국 등 강대국이 취해야 할 긴급한 책무로서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조처를 역설했다. 이들이 바로 1년 뒤인 2008년 1월 역시 같은 신문에 실은 기고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제임스 베이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워런 크리스토퍼, 로버트 맥나라마, 콜린 파월 등 역대 행정부의 내로라하는 전·현직 국무·국방장관들이 망라돼 있었다.

박길연 북한 외무성 부상이 지난해 10월2일 유엔 총회장에서 미국의 핵 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왼쪽). 척 헤이글 장관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폐기를 지지하는 현역 국방장관이란 평가를 받는다.한겨레 자료

박길연 북한 외무성 부상이 지난해 10월2일 유엔 총회장에서 미국의 핵 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왼쪽). 척 헤이글 장관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폐기를 지지하는 현역 국방장관이란 평가를 받는다.한겨레 자료

오바마의 오랜 꿈이었던 ‘핵 없는 세계’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에서 미국의 책무를 강조했다.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유일하게 핵무기를 사용한 경험이 있는 미국이, ‘핵무기 없는 세계’를 만드는 데 ‘도덕적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바탕해 그는 미국의 정책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과거와 달리 미국이 모범을 보일 테니 다른 나라들도 협조하라는 것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우선 러시아와의 핵군축 협상 재개를 선언했다. 이는 2010년 4월 장거리 핵탄두를 2018년까지 1550기로 줄이는 합의로 이어져, 1950년 이래 실전 배치된 핵무기를 가장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또한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의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비준 △핵태세검토보고서(NPR) 수정 △2010년 핵무기 관련 정상회의 개최 △4년 이내 핵물질에 대한 국제적 통제 방안 마련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역량 강화 및 핵확산금지조약(NPT) 개정 추진 △핵물질 생산 금지 조약 추진 등 야심찬 과제들이 제시됐다. CTBT 비준과 2002년 선제 핵공격을 명시한 NPR 수정은 전임 부시 정부의 핵 전략을 뒤집은 것이었다.
프라하 연설을 이행하기 위해 그해 9월24일 오바마 대통령은 사상 처음으로 ‘유엔 안보리 의장국’으로서 영구 핵 보유 5개국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엔 안보리에서 채택한 결의 제1887호는, 핵 보유국의 군축과 NPT 강화를 동시에 추진하면서 핵 확산 방지를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 조처를 담았다. 지역 차원의 비핵지대 확대 및 창설에 대한 지지와 비핵국가에 대한 핵 불사용 보장(이른바 ‘소극적 안전 보장’) 등 비핵국가들의 요구 또한 수용했다. 오바마는 반핵 평화운동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핵 없는 세계’란 비전을 내세움으로써 핵 확산을 차단하려는 미국의 정책이 ‘도덕적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한 것이다.
북한과 이란은 오바마의 핵 없는 세계의 ‘최대 문제아’가 됐다. 북한은 이에 반발했다. 안보리 결의 1887호는 핵 보유국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중 기준적인 문건이며, 핵 열강들의 지배주의적 야망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박길연 외무성 부상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국이 핵정책을 변경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현 단계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려면 우리의 믿음직한 핵 보유로 지역의 핵 균형을 보장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북은 지난 2월까지 2번의 핵실험과 현대적인 우라늄 농축시설 확보, 헌법 개정을 통한 핵 보유국 명시, 서울에 이은 워싱턴 불바다론 등 핵무기 사용 위협으로 나왔다. 그에 맞서 오바마 행정부는 동맹에 대한 안보 공약을 내세워 2009년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확장된 억지’를 명시한 이래 B2, B52, 전략잠수함 등을 동원한 핵공격 연습과 핵우산 강화로 맞섰다. 냉전시대의 핵무기 경쟁을 재현시킨 것이다. 그렇게 오바마의 ‘핵 없는 세계’는,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작동했다. 그건 문정인 교수가 지적했듯이, 오바마 1기 내내 북-미 관계가 미국의 제재와 이에 맞선 핵실험 등 북한의 위협이 반복되는 ‘죄와 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화답 “핵 보유는 비핵화 위한 전략일 뿐”
지난 6월19일 오바마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연설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핵 없는 세상’을 ‘정의가 수반되는 평화’로 규정했다. 4년 전 프라하 연설에서 밝힌 ‘핵 없는 세계 2.0’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에 전략 핵무기를 추가로 최대 3분의 1 더 줄이자고 제안했다. 이는 2030년까지 세계 핵무기의 완전 폐기를 목표로 하는 다국적 반핵단체 ‘글로벌 제로’(Global Zero) 쪽이 2012년 5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제시한 ‘미-러의 핵무기를 900기로 줄이자’는 제안에 근접한 것이다.
오바마 2기의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이 보고서 작성에 깊이 관여했다. 지난 1월 오바마가 헤이글을 국방장관으로 지명하자, 그가 상원의 인준을 받으면 미 역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폐기를 지지한 국방장관이 된다는 평가가 나온 건 이 때문이었다. 실제로 헤이글은 인준 청문회 과정에서 2009년 아랍 위성방송 와 한 인터뷰에서 내놓은 발언이 공개돼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공화당 상원의원이던 그는 당시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문제에 대한 질문에 “미국과 동맹국들은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른 국가들은 가질 수 없다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진실성도 없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결국 지금까지 우리는 논쟁에서 지고 있다”고 답했다.
4년 전 프라하 연설 때 장거리 로켓을 쏘아올렸던 북한은 베를린 연설을 앞둔 6월16일 국방위원회 중대 담화를 내놓았다. 북-미 고위급 회담을 열어 ‘미국이 내놓은 핵 없는 세계 건설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다. 담화를 보면,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군대와 인민의 의지’이며,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이자, ‘당과 국가, 천만 군·민이 반드시 실현해야 할 정책적 과제’가 됐다. 반면 핵 보유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뿐이었다. 프라하 연설에 대해 핵 보유로 맞섰다면, 베를린 연설에서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로 화답한 것이다.
북한이 오바마 2기의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다음 두 가지는 북한의 이런 판단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나는 지난 4월 초 미 국방부가 발표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니트맨3 시험발사 연기다. 미니트맨 시험발사는 정례적인 핵전력 현대화를 위해 이미 예정됐던 것이다. 그럼에도 미 국방부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긴장과 북한의 오판 우려 때문에 연기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전략 핵미사일 발사를 북한과 연계시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미니트맨 발사 연기는 미국이 북한에 준 가장 확실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뒤 북한 역시 4월11일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한·중·일 순방 시점에 무수단을 발사 대기 상태에서 해제했다.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는 첫 조짐이었다.
북핵 해법, 6자회담 틀 넘어설까
다른 하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3월19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국방정책·대량파과무기·군축 담당 조정관에 엘리자베스 셔우드랜들 국무부 특별보좌관 겸 유럽국장을 임명한 것이다. 그는 북한 핵 문제를 담당한 게리 세이모어 조정관의 후임이었다. 동시에 그에게는 국방정책을 조정하는 임무가 추가됐다. 톰 도닐런 NSC 보좌관은 “그가 프라하 연설에서 밝힌 목표(핵 없는 세계)를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셔우드랜들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등지의 비핵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페리 전 국방장관의 최측근으로, 애슈턴 카터 현 국방부 부장관과도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그에게는 핵군축의 국방정책화와 북한 핵 문제, 오바마의 ‘핵 없는 세계’ 정책을 총괄하는 임무가 부과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6자회담을 통한 북한의 비핵화와는 다른, 세계적 차원에서의 비핵화 가운데 일부인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미국의 새로운 접근이 점쳐진다.
강태호 기자 한겨레 정치부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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