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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팔순 극우주의자의 자살

EU 27개국 중 동성결혼 합법화한 나라는 7개국, 5개국은 헌법에서 ‘결혼은 남녀 결합’ 규정… 호모포비아 옛말인 듯했던 유럽에서 혐오 부추기는 극우 정치세력 힘 얻어가
등록 2013-06-02 15:18 수정 2020-05-03 04:27

‘프랑스 파리 75004, 플라스 장 폴 2세, 노트르담 파르비 6.’ 프랑스 특유의 고딕 양식으로 지은 웅장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는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1160년 땅을 파기 시작해 1345년 완공을 했다니, 축조에만 무려 185년이 걸렸다. 길이 128m, 넓이 69m, 성당을 상징하는 2개의 ‘타워’ 높이도 69m에 이를 정도로 웅장하다. 올해로 850살을 맞은 그곳엔, 한 해 전세계에서 1300만 명가량의 관광객이 몰린단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아름다움의 상징’인 게다. 사연, 이제 시작해보자.
5월29일 첫 동성결혼식 앞두고 권총 자살
지난 5월21일 오후 4시께(현지시각)로 알려져 있다. 한 노인이 조용히 성전 안으로 들어섰다. 대성당 맨 안쪽에 다가선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종이 쪼가리다. 이어 손에 든 물체를 입에 넣었다. 권총이다. 성당 안에는, 여느 때처럼 관광객이 몰려 있다. 이윽고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올해 78살, 도미니크 베네였다. 노트르담 대성당 안에서 자살사건이 벌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란다. 850년 만에 말이다.
베네는 극우 성향의 역사학자 겸 칼럼니스트였다. 젊은 시절엔 북아프리카 식민지 알제리의 독립에 반대해, 샤를 드골 정권과 맞선 무장 테러단체에서 활동한 전력도 있단다. 말하자면, ‘민족주의자’를 자처했던 게다. 그런 그의 최근 관심이 북아프리카 지역 출신을 중심으로 한 ‘불법 이민자가 나라를 망친다’는 주장이었던 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인간의 생사는, 신께서 주관하신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가톨릭에선 교리로 금하고 있다. 그곳에서 칠순 노인 베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까닭이 뭘까. ‘어린이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권리’, 바로 동성결혼 합법화 반대다. 프랑스 경찰 당국은 그가 성전의 제단에 바친 편지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영국 일간지 은 이날 인터넷판에서 그의 ‘지인’을 자처한 인물이 프랑스 극우 성향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낭독한 베네의 ‘메시지’ 내용을 따 이렇게 전했다.
“우리 모두를 압도하는 무기력증을 깨부수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선잠에 빠진 프랑스 사회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나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권총 자살을 실행에 옮기기 전날에도, 베네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해 ‘비열하다’고 표현했단다.
그는 이어 “새롭고, 장엄하며, 상징으로 삼을 만한 행동으로 졸음을 깨워야 한다. 우리의 근본에 대한 기억을 다시 일깨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 이날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가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베네의 행동에 ‘경의’를 표하며 ‘탁월한 정치적 행위’라고 추어올렸다고 전했다.
유럽연합(EU) 누리집(europa.eu) 자료를 종합하면, EU 회원국 가운데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는 27개국 중 7개국이다. 2001년 일찌감치 합법화를 명문화한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벨기에·스페인·스웨덴 등이 뒤를 이었다. 비회원국인 노르웨이(2009년)와 아이슬란드(2010년)를 합치면, 유럽 대륙에서 동성결혼이 합법인 나라는 모두 9개국이다. 지난 4월23일 관련 법안이 의회를 통과해, 5월18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서명해 효력을 발휘한 프랑스가 그중 ‘막내’다.
사형제 이후 가장 격한 정치 논쟁
등의 보도를 보면, 프랑스 민법은 혼인신고 뒤 실제 혼례를 올리기까지 열흘의 경과 기간을 두고 있다. 기존 배우자를 포함한 ‘제3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란다. 은 5월18일 “합법화 이후 첫 동성 결혼식은 5월29일 관광업을 하고 있는 뱅상 오탕(40)과 공무원인 브뤼노 뵐루(30)가 남부 몽펠리에에서 치를 예정”이라고 전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베네가 ‘극단적인 행동’에 나선 이유일 터다.
프랑스의 동성결혼 합법화는 성별이 같은 두 사람의 결혼을 법으로 인정하고 자녀입양권을 부여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하지만 ‘톨레랑스’(관용)의 나라도 별수 없었다. 프랑스 의회에선 무려 172시간 동안이나 격론이 벌어졌다.
“동성 부부에게 입양권을 주는 건 어린이에 대한 사실상의 살인 행위”란 소리도 나왔다. “동성결혼이 허용되면, 앞으로 동물이나 사물과 결혼하는 것도 허용될 것”이란 극단적인 주장까지 퍼졌다. 찬성 의견을 분명히 한 의원들은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하면 등 외신들이 “1981년 사형제 폐지 이후 프랑스 사회에서 벌어진 가장 격한 정치 논쟁”이라고 표현했을까.
올랑드 대통령의 서명을 앞두고, 남부 릴에선 ‘스킨헤드족’이 게이바에 난입해 폭력을 휘둘렀단다.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봄 햇살에 취해 거리를 걷던 동성 연인들에게도 어김없이 주먹이 날아들었다. 파리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 빌프레드 드 브루인은 최근 파리 도심에서 남자친구와 손을 잡고 가다가 뭇매를 맞아야 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얼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은 5월18일 인터넷판에서 그의 포스팅 내용을 따 “이런 모습을 보여서 유감이지만, 이게 바로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증)의 맨얼굴”이라고 전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게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불가리아·헝가리·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 등 EU 회원국 5개국은 아예 헌법으로 ‘혼인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고 규정해놨다. 이탈리아·그리스·키프로스 등 7개국에서도 동성커플에 대해선 아무런 ‘법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은 EU에 딸린 ‘기본권기구’(FRA)가 ‘세계 호모포비아 반대의 날’인 지난 5월17일 내놓은 32쪽 분량의 설문조사 결과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FRA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과 국제성소수자협회(LGA) 유럽지부 등 시민사회와 함께 지난해 4월2일~7월15일 EU 회원국 전체와 크로아티아 등 모두 28개국에서 18살 이상 성소수자(LGBT)를 대상으로 실시한 이번 온라인 설문에는 모두 9만3079명이 참여했다. 사상 최대 규모란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6%가 지난 1년 사이 어떤 형태로든 성적 취향 때문에 차별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최근 1년 안에 성적 취향을 이유로 폭행을 당하거나 협박을 당한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6%가 ‘그렇다’고 답했다. 같은 질문을 ‘최근 5년’으로 넓혔더니, 응답자 4명 가운데 1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90% “차별 경험해도 항의조차 못했다”
응답자 3명 가운데 2명은 ‘차별과 따돌림이 두려워 학창 시절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겼다’고 답했다.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응답자 3명 가운데 2명은 공공장소에서 동성연인과 손을 잡는 것조차 꺼린단다. ‘불필요한 관심’을 피하기 위해서다. 또 응답자 5명 가운데 1명(19%)은 ‘직장에서 또는 구직 과정에서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했다’고 답했다. 더구나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한 이들 가운데 90%는 이에 대해 항의조차 하지 못했단다. “그래봤자 달라질 것도 없고, 괜히 ‘성정체성’만 공개적으로 확인시키는 꼴이 되기 때문”이라는 게다.
“성소수자 권리 보호를 위한 입법과 동성애 문화의 주류 편입 등으로 ‘호모포비아는 옛말’이라고 여겼던, 대다수 유럽인들에게 이번 조사 결과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은 5월18일치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신문은 이어 “심각한 것은 ‘가족의 가치를 지키겠다’며 호모포비아를 부추기는 극우 정치세력이 유럽 각국에서 힘을 얻어가고 있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갈 길’이, 참으로 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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