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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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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걸음 뗀 무기거래 규제

20여 년 지구촌 시민사회 노력으로 ‘무기거래 규제조약’ 유엔총회서 압도적 찬성 통과… ‘실효성’ 있으려면 시간 더 필요
등록 2013-04-12 23:37 수정 2020-05-03 04:27

‘대량살상무기’(WMD).
인터넷 국어사전을 보면, ‘짧은 시간 안에 대량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돼 있다. 주로 생화학무기나 핵무기, 중장거리 미사일 등을 일컫는 말일 터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1994년 르완다에서 투치족을 겨냥한 후투족의 학살극이 벌어졌다. 그해 4월 초순부터 7월 중순까지 이어진 살육의 광기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이는 줄잡아 80만 명에 이른다. 이른바 ‘인종청소’였다.
그동안 지난했던 규제 노력
100일 남짓이란 짧은 기간 동안 르완다에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무기는 소총과 수류탄, 그리고 58만여 자루에 이르는 정글용 칼(마체테)이었다. 재래식 무기도 얼마든지 ‘대량살상’에 사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4월2일 유엔총회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 ‘무기거래 규제조약’(ATT)이 반가운 이유다.
1990년대 초반부터 ATT 체결운동을 주도해온 세계적인 인권단체 앰네스티가 지난 3월27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이른바 ‘재래식 무기’의 국가 간 거래를 규제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은 1919년으로 거슬 올라간다. 사상 첫 세계대전을 겪었던 인류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란 형식을 통해 스스로를 다잡으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열강의 이권다툼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 끝에서, 결국 두 번째 세계대전을 마주하게 됐다. 어리석었다.
두 차례나 지구촌 차원의 거대한 전쟁을 겪은 인류는 세계인권선언·유엔헌장·제네바협정이란 ‘인도주의의 3가지 기둥’을 세웠다. 특히 유엔헌장을 통해, 안전보장이사회에 국가 간 재래식 무기 거래에 대한 규제 장치를 마련하도록 위임했다. 하지만 이후 60년 세월 동안 안보리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념의 동과 서로 갈린 냉전의 시대가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탓이다.
냉전의 끝은, 다시 ‘열전’의 시대로 이어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빌미로 시작된 제1차 걸프전쟁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연방이 해체된 발칸반도에서도 포성이 불을 뿜었다. 르완다를 비롯해 중부 아프리카 일대에서도 내전이 꼬리를 물었다. 몰래 흘러든 재래식 무기 아래서 숱한 인명이 스러져갔다. 지구촌 시민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ATT 체결을 위한 첫 단추는 1993년 앰네스티를 비롯한 일부 인권단체가 마련한 ‘국제 무기거래에 관한 행동강령’ 초안으로 꿰어졌다. 그해 11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도 무기 수출과 관련한 일련의 원칙을 마련했지만, 그 이행을 회원국의 ‘자율’에 맡긴 탓에 실효성은 거의 없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오스카르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지원 아래 1996년 10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세계포럼(SWF)은 ATT 체결 운동의 전환점이 됐다. 회의에 참석한 세계 각국의 평화·인권단체 활동가들은 “독재와 인권유린을 자행하는 세력의 손아귀에 압제와 폭력의 수단을 쥐어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OSCE와 마찬가지로 법적 구속력을 갖추진 않았지만, 1998년 유럽연합(EU) 차원에서 무기 수출에 관한 ‘행동강령’을 마련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상원의원이던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이 무렵부터 ATT 체결을 적극 지지했다.
이란·북한·시리아만 끝까지 반대
본격적인 조약안 마련 작업은 2001년 시작됐다. 브라이언 우즈 앰네스티 군축·인권국장은 “핵심은, 국제 인권법과 인도주의 관련 협정에 따라 세계 각국에 이미 부과된 법적 의무에 기초해 재래식 무기 거래 제한의 법적 틀거리를 만들어내기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2003년 10월부터는 앰네스티와 다국적 인도지원단체인 옥스팸, 평화·인권단체 연대체인 ‘국제 소형무기 감시 네트워크’(IANSA) 등이 힘을 합쳐 100여 개국에서 ATT 체결을 위한 동시다발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2005년 초까지 줄잡아 50개 이상의 유엔 회원국 정부가 ATT 체결을 지지하기에 이른다.
이제 무대는 유엔으로 옮겨졌다. 2006년 7월 코스타리카·핀란드 등 7개국은 ATT 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마련해 유엔총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10월 유엔총회에 상정된 결의안은 153개국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러시아·중국 등 주요 무기 수출국을 포함해 기권표는 여럿이었지만, 반대표를 던진 것은 조지 부시 행정부의 미국이 유일했다.
총회 결의에 따라 ATT 체결을 위한 유엔의 공식 절차가 시작됐다. 2009년 10월 총회에선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미국도 “모든 회원국이 합의한다면, 미국도 ATT 체결에 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해 말 유엔 회원국 4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 절차가 개시됐다. 국제사회는 2010~2011년 다섯 차례의 준비회의를 거쳐, 지난해 7월 4주간에 걸친 최종 협상에 들어갔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ATT에 대한 각국의 반감은 크게 3가지 형태로 표출됐다. 첫째, 미국을 중심으로 조약의 규제를 받는 무기의 대상과 범위를 가능한 한 좁히려는 국가들이다. 실제 미국은 조약의 대상 무기에서 탄환을 배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둘째, 규제 대상 무기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인권이나 인도주의적 원칙이 규제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에 결사반대한 국가들이다. 중국·러시아 등이 이 부류의 대표 격이다. 셋째, 조약 자체를 거부하는 이란·북한·시리아 등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모두 무기 수출 대국
‘최종’이라던 2012년 7월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가을에 열린 유엔총회에서 다시 ‘최종 담판’을 위한 일정이 잡혔다. 하지만 지난 3월18~28일 열린 최종 회의에서도 당사국들은 만장일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조약안은 결국 유엔총회에 상정됐고, 4월2일 이뤄진 표결에서 찬성 154표, 반대 3표, 기권 23표로 통과됐다. 지난 20년 세월 지구촌 시민사회가 쏟아부은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게다. 끝까지 반대표를 고집한 것은 이란·북한·시리아였다.
스톨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3월 초 내놓은 자료를 보면, 세계 재래식 무기 시장의 규모는 연간 600억달러를 넘어선다. 2008~2012년 거래된 각종 재래식 무기는 2003~2007년에 견줘 17%나 늘었다. SIPRI는 “특히 아시아·아프리카 각국이 무기 거래량 증가를 주도했다”며 “앞선 4년에 견줘 2008~2012년에만 아시아에선 35%, 아프리카에선 무려 104%나 무기 수입이 늘었다”고 지적했다.
최대 무기 수입국은 인도·중국·파키스탄·한국·싱가포르 순으로 나타났다. 이들 5개국이 전체 거래 무기의 32%를 수입했단다. 주요 수출국은 미국·러시아·독일·프랑스·중국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들 5개국의 무기 수출 규모는 전체의 75%를 넘어섰다. 영국이 근소한 차이로 6위를 차지했으니, ‘거부권’을 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모두 무기 수출 대국이란 얘기다. ATT 표결 통과 자체가 장해 보인다.
유엔 군축국(UNODA)이 펴낸 자료를 보면, 조약이 포괄하는 규제 대상은 소총 등 소형 화기부터 탱크·장갑차·대포·전투기·전투용 헬리콥터·군함·미사일 등 사실상 모든 ‘재래식 무기’를 망라하고 있다. 여기에 ”무기 수출(판매) 또는 이전에 앞서 해당 무기가 인권을 유린하거나 반인도적 범죄에 사용될 가능성이 없는지 면밀히 평가해야 한다”는 규정도 마련됐다.
문제는, 재래식 무기가 ‘대량살상무기’로 둔갑하는 것을 찾아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이다. 2004년 안보리 결의에 따라 구성된 ‘코트디부아르 전문가 그룹’(CEG)이 2011년 3월17일 안보리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이런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보고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2010년 12월 말에서 2011년 1월 초 사이, CEG 쪽은 북쪽으로 국경을 맞댄 말리와 부르키나파소를 통해 막대한 양의 총기와 탄환이 코트디부아르로 유입되고 있는 정황을 포착했다. 흘러든 무기의 최종 목적지는 북부 일대를 장악한 반군인 ‘포스누벨’(신세력) 쪽이었다. CEG는 보고서에서 “어느 나라에서 생산된 무기가, 어떤 경로를 거쳐 포스누벨 쪽으로 흘러든 것인지 파악할 만한 정보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코트디부아르 학살의 책임은 누구
앞서 2009~2010년에도, 규모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비슷한 움직임이 포착됐단다. CEG는 보고서에서 “당시엔 2가지 단서를 확보하고 추가 조사를 벌였다”고 밝혔다. 첫째, 포스누벨 반군이 지녔던 총기는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일련번호가 지워져 있었는데, 우연찮게 번호가 남아 있는 총기가 몇 정 발견됐다. AK47을 복제한 중국산 ‘56식 소총’이었다.
CEG 쪽은 즉각 유엔 주재 중국대사관을 통해 소총의 유통 경로를 물었다. 넉 달여 만에 날아온 답변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단다. “1990년대 제3국으로 정상적인 통로를 거쳐 수출한 총기다. 이미 오래전 일이어서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CEG 쪽은 ‘제3국’이 어디인지 재차 물었지만, 중국 쪽은 “자료가 없다”며 답변을 피했다.
둘째, 일련번호는 지워져 있었지만,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았던 폴란드산 ‘AKMS 소총’이 다수 발견됐다. CEG 쪽은 역시 유엔 주재 폴란드대사관 쪽에 질의서를 보냈다. 폴란드대사관 쪽은 “1996년 부르키나파소에 한 차례 수출한 일이 있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역시 “오래전 일이라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말로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단다.
포스누벨 쪽으로 다량의 무기가 흘러들 무렵, 코트디부아르의 정세는 격랑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2010년 11월28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알라산 우아타라 전 총리가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을 꺾고 승리했지만, 그바그보 대통령은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각 대통령 취임식을 열었다. 내전의 음습한 그림자가 다시 코트디부아르 전역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CEG가 안보리에 보고서를 제출한 지 12일 만인 2011년 3월29일 우아타라 대통령을 지원한 포스누벨 반군이 치열한 교전 끝에 그바그보 진영이 장악한 중서부 두에쿠보를 장악했다. 반군이 도시로 들어선 직후 약 1천구의 주검이 발견됐다. 희생자 대부분은 그바그보 대통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구에레족이었다. 당시 유엔 쪽은 “우아타라와 그바그보 양쪽 모두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양비론을 폈다. 두에쿠보 학살의 배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포스누벨 반군 쪽으로 흘러든 무기의 출처도 마찬가지다.
“변화를 만들 기틀은 마련된 셈”
1차 세계대전 직후 시작된 재래식 무기 거래 규제를 위한 첫걸음은 내디뎠다.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조약안에 찬성표를 던진 나라들도 자국 내 의회 비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조약 발효까지는 여전히 한참이 걸릴 것이란 얘기다. 발효 이후에도, 서명국 정부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를 따를지는 알 수 없다. 조약의 ‘실효성’은 여전히 미지수인 게다. ATT 체결을 위한 최종회의 의장을 맡았던 피터 울콧 유엔 주재 오스트레일리아 대사는 <bbc> 등과 한 인터뷰에서 “불법적으로 거래된 무기로 스러져간 수백만 인류의 희생이 있었기에 ATT 통과가 가능했다”며 “시간은 걸리겠지만, 국제사회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기틀은 마련된 셈”이라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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