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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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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레전드, 기이한 무가베

33년째 집권 중인 짐바브웨 89살 무가베 대통령, 그의 생일 딴 ‘2·21 운동’ 벌어져… 독립영웅이었지만, 집권 뒤 정적 암살하고 부정선거 자행한 사나이는 왜 무너지지 않나
등록 2013-03-02 14:22 수정 2020-05-03 04:27

“2월21일 오후 1시부터 2시29분까지, 우리 모두 89분 동안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에 나서자.”
짐바브웨의 집권 여당인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연합-애국전선(ZANU-PF)의 시데 압솔롬 시코사나 청년국장은 지난 1월19일 현지 일간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제안했다. 그는 “모든 짐바브웨 국민이 그 시간에 학교나 병원, 고아원 같은 곳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거나, 집과 거리를 청소하거나, 나무를 심는 등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면 좋겠다”며 “정해진 시간에 ‘좋은 일’을 하기 어렵다면 편한 시간을 골라 하는 것도 괜찮다”고 덧붙였다.
검거된 영웅, 출발은 정의로웠으나
시코사나 국장은 짐바브웨 젊은이들이 중심이 돼 움직이고 있는 ‘2월21일 운동’의 의장이기도 하다. 이 단체는 3월2일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북동쪽으로 약 88km 떨어진 빈두라의 치파드제 경기장에서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의 보도를 보면, “참석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짐바브웨 10개 주 전역에서 교통편이 제공될 예정”이란다. 무슨 행사일까?
2월21일은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의 생일이다. 1924년생이니 올해로 89살이 된다. 시코사나 국장이 ‘2월21일 89분 동안 봉사하자’고 제안한 이유다. ZANU당의 외곽조직인 ‘2월21일 운동’의 이름도 무가베 대통령의 생일에서 따온 게다. 말하자면, 무가베 대통령을 젊은이들의 ‘롤모델’로 삼자는 게 ‘운동’의 취지란다. 3월2일 행사도 무가베 대통령의 89번째 생일을 축하하려고 마련한 자리다. 이거, 참.
아프리카 남부의 내륙국가 짐바브웨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것은 1965년이다. ‘로디지아’란 국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소수 백인정권에 맞서 14년여에 걸친 다수 흑인들의 핏빛 저항이 이어졌다. 내전은 1979년 12월 ‘랭커스터하우스 합의’로 막을 내렸고, 영국의 관리·감독 아래 무장을 해제한 저항세력은 선거를 통해 독립 공화국의 기초를 세웠다. 1980년 2월 치러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것은 ‘독립영웅’ 무가베 대통령이 이끈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연합’(ZANU)이었다.
마침내 1980년 4월 짐바브웨 정부가 수립됐다. 카난 바나나 초대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국가 수반이었다. 모든 권력은 초대 총리로 취임한 무가베 대통령이 쥐고 있었다. 이어 1987년 소수 백인에게 의회 의석을 할당해주는 제도를 폐지하는 한편, 대통령중심제로 권력 구조를 바꾸려는 개헌이 이뤄졌다. 그해 12월 취임 이래, 무가베 대통령은 지금껏 ‘현직’이다. 총리 시절을 포함하면 33년, 대통령직만 따져도 26년째 집권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유재산제는 사라지게 될 것”
무가베 대통령은 애초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독실한 가톨릭식 교육을 받았던 성장기에 그의 유일한 친구는 ‘책’이었단다. 예수회 계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자격을 딴 그는 유학길에 올랐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탄자니아 등지에서 수학한 그는 1955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잠비아·가나 등지의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가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건 36살 되던 해인 1960년 민족민주당(NDP)에 입당하면서부터다. NDP는 이후 조슈아 응코모가 이끄는 짐바브웨아프리카인민연합(ZAPU)으로 탈바꿈했다. 여기서 떨어져나온 이들이 1963년 ZANU를 결성했는데, 무가베 대통령도 이에 합류했다. 로디지아 백인 정권의 탄압이 거세지던 때였다. 결국 ZANU·ZAPU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던 1964년 무가베 대통령도 체포됐다.
애초 징역 1년형에 처해졌던 그는 형기를 다 채울 무렵 9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끝을 기약할 수 없는 구금이었다. 1966년 말 3살 난 아들이 말라리아로 숨졌음에도, 그는 가석방이 허락되지 않아 장례식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는 새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4년 옥중에서 ZANU 최고지도자로 선출된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중재 노력 속에 그해 말 동지들과 함께 석방됐다.
석방 이후 잠비아를 거쳐 모잠비크에 근거지를 마련한 그는 백인 정권에 맞선 게릴라전을 지휘하며 독립 이후를 준비했다. 랭커스터하우스 합의에 따른 총선에 앞선 1980년 1월27일 그는 열렬한 대중적 환영 속에 귀국했다. 이어 치러진 선거에서 무가베 대통령이 이끈 ZANU는 전체 80석 가운데 백인에게 할당된 20석을 제외하고도 57석을 얻는 압승을 거뒀다. 그해 3월4일 그는 의회에서 초대 총리로 선출됐다. <upi>은 1980년 3월5일 ‘로디지아의 새 지도자’란 제목의 기사에서 무가베 대통령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새로운 국가에서 사유재산제는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백인에게 주어졌던 특권도 폐지될 것이다. 백인들이 새로운 흑인 정부를 따를 준비가 됐다면 머물러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을 떠나야 할 것이다.”
세월은 무시로 흘렀다. 집권 초기부터 옛 동지들과 갈등이 불거지고, 정권 친위부대가 ZAPU 지도부를 조직적으로 살해한 이른바 ‘구쿠라훈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때 연평균 20% 성장세를 기록했던 경제는 1990년대 들어 주춤하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곤두박질쳤다. 장기간 이어진 가뭄과 수요 감소에 따른 광물자원 수출 부진, 이로 인한 환율 급등이 꼬리를 물면서 상황을 더욱 어렵게 했다.
토지개혁을 둘러싼 안팎의 논란도 짐바브웨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주요 이유다. 백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토지를 헐값에 매입해 분배하는 과정에서 반발이 격렬했다. 외국인 투자가 위축됐고, 생산량은 줄었다. 국제사회는 각종 제재로 압박해 들어왔고, 덩달아 관광객도 급감했다. 이 모든 과정이 2000년대 중반 이후 짐바브웨가 경험한 연평균 10만% 넘는 천문학적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다. 결국 짐바브웨 정부는 2009년 자국 화폐를 폐기하고 미 달러화를 공식 통화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무가베는 결코 지치지 않는다
2008년 치러진 대선 당시 1차 투표에서 무가베 대통령은 43.2%를 얻어 2위에 그쳤지만, 결선투표에서 무려 85.5%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1차 투표에서 47.9%를 얻었던 민주개혁운동(MDR)의 모건 츠방기리 후보는 결선투표에서 단 9.3%를 얻는 데 그쳤다. 명백한 부정선거였다. 그럼에도 무가베 대통령은 츠방기리 후보를 설득해 총리직에 앉히는 수완을 발휘하며 살아남았다.
3월16일 짐바브웨에선 개헌 국민투표가 예정돼 있다. 바뀌는 조항 가운데는 5년 임기의 대통령을 중임까지만 허용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개헌안이 통과되면, 90일 안에 대선을 치러야 한다. ZANU 쪽은 이미 2011년 12월 무가베 대통령을 차기 대선 후보로 지명해놨다. 는 지난 1월30일 인터넷판에서 텐다이 비티 재무장관의 말을 따 “이달치 공무원 임금을 지불하고 난 현재 정부 금고의 잔고는 단 217달러”라며 “외부 지원 없이는 선거를 치를 비용조차 마련할 길이 없다”고 전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u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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