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키리아쿠. 1964년 8월9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샤론에서 태어났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중동학을, 같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미 중앙정보국(CIA) 간부를 지낸 지도교수의 눈에 들어, 대학원을 마친 뒤 ‘첩보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2007년 방송 출연해 물고문 폭로
‘입사’ 이후 8년여를 내리 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중동 지역 정보 분석에 매달렸다. ‘일급비밀’을 다룰 수 있는 자리였다. 1998년 ‘대테러 작전요원’으로 업무가 바뀌어 ‘현장’에 투입됐다. 2001년 9·11 동시테러가 벌어지자 파키스탄 현지 대테러작전 책임자로 임명됐다. 테러범 소탕 작전이 주 업무였는데, 2002년 3월 알카에다의 3인자로 꼽히던 아부 주바이다를 생포한 게 최대 성과였다.
2004년 CIA를 떠났다. 14년여 근무기간 동안 받은 각종 훈포장만도 10개가 넘는다. 베테랑 정보요원에 대한 ‘수요’는 많았다. 민간 기업에서 정보·정세 분석 업무를 맡기도 했고, 2006년부터 1년 남짓 <abc>에서 테러 관련 뉴스 전담 해설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민주당 존 케리 의원(현 국무장관)이 상원 외교관계위원장에 오른 2009년부터는 중동정책과 국제테러 등을 전담하는 선임 연구위원으로 2년여 의회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2011년 다시 ‘민간인’ 신분이 됐다. 한 정보컨설팅 업체 간부로 재직하며 방송 고정 출연도 재개했다. 인터넷 매체 에는 중동 문제나 테러 관련 뉴스에 대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이 정도면 무난하다, 할 만한 삶이었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2007년 12월10일 키리아쿠는 <abc>에 출연해, 아부 주바이다 생포 작전과 이후 심문 과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성행했던 이른바 ‘강화된 심문기업’으로 불리는 ‘워터보딩’(일종의 물고문)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도 이때다. 당시 키리아쿠는 “아부 주바이다에게 한 차례 가벼운 형태의 물고문이 가해졌다”며 “그럼에도 고문은 고문이며, 고문을 통해 얻으려 했던 정보가 과연 ‘고문국가’란 오명을 뒤집어쓸 만큼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후 밝혀진바, 아부 주바이다는 적어도 83차례 이상 물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CIA는 그에게서 이렇다 할 정보를 빼내는 데 실패했다. 키리아쿠는 2010년 펴낸 자서전 에서 “아부 주바이다 심문 과정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며, CIA 동료들을 통해 전해들은 정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사실이 있다. 철저히 가려져왔던 ‘물고문’의 실체를 처음 폭로한 것은 키리아쿠다. 그의 첫 증언 이후 관련 정보가 속속 드러나며, 테러 혐의자에 대한 고문이 ‘정권 차원에서 벌인 일’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이런 걸 두고 ‘내부고발’ 또는 ‘공익제보’라 부른다. 용기 있게 나선 이들을 귀히 여겨 보호하는 건, 민주국가의 의무다. 키리아쿠는 어땠을까?
키리아쿠가 고발한 ‘범죄’는 부시 행정부 시절 저질러졌지만, 그를 기소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였다. 미 법무부는 오랜 법률 검토 끝에 지난해 4월 키리아쿠를 ‘정보요원 신분 보호법’(IIPA)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고문을 증언하는 과정에서 ‘첩보요원의 신분을 공개했다’는 게다. 미 버지니아주 동부지방법원은 1월25일 키리아쿠에게 징역 2년6개월형을 선고했다.
유죄판결 받은 건 그가 유일
부시 행정부 시절 CIA가 저지른 고문과 관련해 지금까지 기소돼,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단 1명이다. 고문을 가한 심문요원도, 이를 지시한 간부도, 고문의 ‘합법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법률가도, 고문의 증거를 파기한 세력도 아니다. 고문이 자행됐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외부에 고발한 사람이다. 세상, 참….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abc></a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