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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차베스의 시대

심각한 합병증으로 취임식 연기된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야권과 서구 외신들의 ‘도발’, 전환기에 접어든 남미
등록 2013-01-19 18:17 수정 2020-05-03 04:27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유고’가 길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27일 건강검진을 이유로 쿠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그는 열흘 만인 12월7일 일단 귀국했지만, 이튿날 “암이 재발해 2차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쿠바 아바나로 향했다. 그때 이후 차베스 대통령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1월10일로 예정됐던 취임식은 무기한 연기됐다. 야권은 헌법을 들먹이며 재선거를 요구하고 있다. 집권당 내부에서조차 ‘포스트 차베스’를 입에 올리는 이가 하나둘 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의 구심점 노릇을 해온 베네수엘라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의 회복 여부와는 별도로, 이미 모종의 전환기에 접어든 모양새다.
 
2011년 첫 암 수술 뒤 항암치료 여러 차례
1월10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중심가에 자리한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앞으로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애초 이날로 예정됐던 차베스 대통령의 취임식 대신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린 게다. 친정부 성향의 인터넷 매체 는 “거리마다 (차베스 대통령과 집권 사회당의 상징인) 붉은색이 물결을 이뤘고, 집회 참석자들은 ‘내가 차베스다’라고 적힌 깃발을 연방 흔들어댔다”고 전했다.
라틴아메리카 27개국 정부도 이날 집회에 대표단을 파견해, 새로운 임기(2013~2019년)를 시작하는 차베스 대통령을 축하했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과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 등 차베스 대통령의 ‘동지’들은 아예 직접 집회장을 찾았다. 지난해 6월 야권의 기습적인 탄핵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페르난도 루고 전 파라과이 대통령은 연설에 나서 “누가 차베스 대통령의 유고를 말하느냐”며 “그는 지금 여기에, 우리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대한 축하연’이었다.
지난해 10월 치러진 대선에서 차베스 대통령은 55.07%의 득표율을 올리며 무난히 당선됐다. 야권 단일후보로 나선 엔리케 카프릴레스 후보와 초박빙 승부를 벌일 것이란 예상을 깨고, 지지율 격차를 두 자릿수로 벌린 제법 여유 있는 승리였다. 무려 4선째, 하지만 6년의 새로운 임기를 시작하려는 그의 발목을 재발한 암세포가 다시 한번 붙잡았다. 앞서 2011년 6월 첫 번째 암 수술을 받은 차베스 대통령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쿠바를 방문해 항암치료를 받아왔다.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는, 회복이 매우 더뎠다. 수술 9일 만인 지난해 12월20일엔 ‘호흡기 계통에 새로운 합병증이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어 12월30일엔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 명의로 공식 성명을 내어, 차베스 대통령의 건강 상태를 제법 소상히 전달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저를 비롯한 정부 대표단이 12월28일 쿠바 아바나에 도착해 입원 치료 중인 ‘코만단테(사령관) 차베스’를 만났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저희 대표단에게 베네수엘라 인민들께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현재 차베스 대통령은, 수술 이후 발생한 호흡기 계통의 합병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일정한 ‘위험’이 동반돼 있는 건 사실이지만, 특유의 신체·정신적 힘으로 이 어려운 상황과 맞서고 계십니다. 저희 대표단은 아바나에 좀더 머물며 대통령의 용태를 살피기로 결정했습니다.”
새해 들어선 좀더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됐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1월3일 “차베스 대통령이 호흡곤란에 따른 합병증으로 폐에 심각한 감염이 발생해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공개된, ‘최고 수위’의 정보였다.
 
야권, 헌법에 기대 ‘영구적 유고’ 주장
문제는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취임식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베스 대통령의 건강 상태로는, 1월10일로 예정된 취임식에 참석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야권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의 건강 상태라면, 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을 디오스다도 카벨로 국회의장에게 넘긴 뒤 선거를 다시 치러야 한다”고 연일 맹공을 퍼부었다. 인구의 80~90%를 신자로 두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보수적 가톨릭 교회까지 나서 ‘선거 무효’를 외쳐댔다.
이게, 아주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헌법 제231조는 “대통령 당선자는 선거가 치러진 이듬해 1월10일 국회에 출석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취임 선거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제233조에선 “대통령이 사망하거나 사임한 때, 또는 대법원이 지명한 의료진이 정신 또는 육체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할 때에는, 국회의 승인을 거쳐 그 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정해놓고 있다.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 자체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는 ‘영구적 유고’에 해당한다”는 야권의 주장인 게다.
집권여당인 사회당 쪽도 헌법에 기대 반론을 폈다. 역시, 법적 근거는 충분해 보인다. 헌법 제234조와 235조에 “대통령이 일시적으로 그 직을 수행할 수 없는 경우, 국회의 승인에 따라 최대 90일까지 ‘일시적 유고 기간’으로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대통령직은 마두로 부통령이 대행하게 된다. 차베스 대통령의 복귀가 늦어지더라도, ‘국정 공백’ 사태는 없다는 논리인 셈이다.
사회당이 장악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국회가 차베스 대통령의 취임식 연기를 승인한 뒤에도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결국 1월9일 대법원이 나섰다. 대법관들이 만장일치로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취임식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차베스 대통령은 2013~2019년 임기를 시작할 법적 권한을 확보하고 있다”며 야당의 주장을 일축한 게다. 루이자 에스텔라 모랄레스 대법원장은 “대선에서 승리한 현직 대통령의 임기는 연속성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야권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대법원의 결정은 ‘미리 치밀하게 준비된 각본에 따른 사법 쿠데타’란 게다. 야권의 대변인 격인 베스탈리아 삼페드로는 기자회견을 열어 “취임식도 없이 정권을 이어가는 것은 명백한 현행법 위반”이라며 “대법원의 결정으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베네수엘라 국민을 다스리게 됐다”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의 일간 은 사설에서 “공화국 역사상 최악의 위기가 닥쳤다”고 강조했다.
대선에서 패배한 엔리케 카프릴레스 후보도 빠질 수 없다. 그는 대법원 결정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지금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이들은 마두로 부통령을 포함해 단 1명도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지 않았다”며 “법적 권한이 없는 자들에게 국정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야권은 애초 총파업과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정국을 마비시키겠다고 공언했지만, 대법원의 결정 이후 이를 일단 취소했다. “비상한 시국에 무책임한 행동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게다.
 
좌파 내에서도 그의 사후 논의 시작
이런 가운데 주류 외신들은 새해 들어 ‘포스트 차베스’ 시대를 염두에 둔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들 매체 대부분은 지난해 대선에 앞서 카프릴레스 후보의 당선을 점쳤었다. 은 “차베스 대통령이 사망하면, 집권 사회당 내부가 카벨로 국회의장과 마두로 부통령 세력으로 갈려 권력 다툼을 벌일 것”이란 관측을 내놨다. 는 “야권의 대선 가능성이 높아지면 헌법 절차를 어기고 대선을 무기한 늦출 수 있으니, 미국이 나서 베네수엘라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내보내기도 했다.
쿠바 관영 이 1월3일 “차베스 대통령이 위중한 가운데서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의식도 뚜렷하다”고 전했음에도, 서구 주류 외신들의 ‘도발’은 이어졌다. 는 1월3일 8명의 전문가를 등장시켜 ‘(차베스 없는) 베네수엘라의 미래’를 논했다.
베네수엘라 통상산업부 장관을 지낸 모이즈 나임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은 “그간 베네수엘라는 생산보다 소비가 지나치게 많았다”며 “차베스 정권의 막대한 재정지출의 여파로, 향후 엄청난 규모의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정치학자 프란시스코 토로 역시 “막대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차기 정부는 긴축재정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차베스가 만들어낸 신화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라틴아메리카 전문가인 마크 웨이스브로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소장은 에 보낸 기고문에서 “차베스 대통령 취임 이후 치러진 14차례 전국 단위 선거에서, 베네수엘라 사회당은 13차례나 압승을 거둔 바 있다”며 “차베스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더라도, 사회당 정부는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안팎의 ‘호들갑’과 달리, 정작 베네수엘라 사회당 내부에선 별다른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차베스 대통령의 ‘유고’가 길어지면, 마두로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한다. 차베스 대통령이 숨지면, 헌법에 따라 카벨로 국회의장이 권한대행을 맡아 30일 안에 대선을 치른다. 이럴 경우, 마두로 부통령이 사회당 대선 후보로 나선다. 이미 지난 대선 직후 차베스 대통령이 직접 제시한 ‘후계 구도’다.
물론 좌파 진영 내부에서도 서서히 ‘차베스 없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논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건 사실이다. 좌파 매체 는 1월7일치 칼럼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1년 정도 대통령직에 복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사망할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간 마두로 부통령도, 카벨로 의장도 차베스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장기적으로 사회당의 정국 장악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전과 다를 ‘차베스 없는 베네수엘라’
미래는 알 수 없다. 역사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차베스 없는 베네수엘라’는 분명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차베스 없는 라틴아메리카’도 마찬가지다. 임박한 그의 부재 앞에서, 베네수엘라는 물론 라틴아메리카 전역이 비상한 전환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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