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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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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 담벽을 넘어 거리로

노조 불인정과 활동가 살해의 역사, 저임금 자랑하는 정부에 저항해 거리로 나선 인도네시아 노동자… 최저임금 인상, 정규직 전환 성과 낸 ‘모두를 위한 사회 안전망’ 캠페인, 아시아의 희망으로 떠올라
등록 2013-01-04 23:55 수정 2020-05-03 04:27

2012년 12월17일 오후 5시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동부 버카시의 치카랑 강에 놓인 간이 교량 위로 오토바이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우기가 한창인 때, 해 질 녘 세차게 퍼붓는 빗소리도 퇴근길 오토바이 행렬이 토해내는 소음에 가려질 정도다. 30만 명가량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버카시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업지구다. 간이 교량 건너편에 자리한 대형 텐트가 눈길을 끈다.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의 상징 격인 ‘오마부루’(노동자의 집)다.

2012년 12월5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가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하청고용 금지와 노조탄압 중단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마친 뒤 대통령궁까지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사진기자 에카 니크마툴후다(Eka Nickmatulhuda) 제공

2012년 12월5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가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하청고용 금지와 노조탄압 중단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마친 뒤 대통령궁까지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사진기자 에카 니크마툴후다(Eka Nickmatulhuda) 제공

 

한국 회사, 폭력배 동원해 탄압

오마부루는 최근 한국 삼성전자의 제품을 조립하는 현지 하청공장 해고노동자들의 아지트가 됐다. 이날도 2011년 11월 초 노동조합에 가입하자마자 쫓겨난 노동자 25명가량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오마부루에서 서로의 근황도 챙기고, 정보도 공유하고, 노조에서 주최한 노동법 강의도 듣는다.

“후회하지는 않아요.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테니까.” 비르만(34) 역시 한 달 전 노조에 가입했다가 해고됐다. 그의 일터는 홈시어터 조립공장이었다. 3개월, 6개월, 1년씩 단기계약직과 사내하청 등으로 ‘신분’만 바꿔가며 무려 13년을 일했던 곳이다. 비르만은 “우리가 해고된 뒤, 남아 있는 이들 중 2년 이상 근무한 사람을 대상으로 정규직 계약이 시작됐다”고 달라진 현실을 말했다. 물론 노조에 가입하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쓰는 조건이 붙기는 했단다.

최근 버카시 공단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조 가입이 급격히 늘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막으려는 회사도 늘고 있다. 현지에서 활동 중인 한 노동변호사는 “얼마 전 한국 회사 쪽이 고용한 폭력배들이 각목을 들고 와 오마부루에서 노조 조끼를 빼앗아가기도 했고, 출근길 노조원들에게 뭇매를 퍼붓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오마부루를 찾는 노동자들 가운데는 ‘반한 감정’이 쌓인 이도 있단다.

노동운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버카시 공단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2012년 5월1일 자카르타 남부 붕카르노 체육관에서 7만5천여 명의 노동자가 모여 ‘인도네시아 노동자총회’(MPBI)를 조직한 이후,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노동자들의 집회와 시위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2012년 6월12일 한국의 고용노동부 격인 ‘인력이주부’ 청사 앞에서 노동자 5천여 명이 행진을 벌였고, 9월27일엔 보건부 앞에서 1만5천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또 10월3일엔 노동자 240만 명이 참여해 전국적으로 동맹파업을 벌였다. 11월22일 대통령궁과 의회 앞에서 열린 집회에도 3만5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사회복지는 엉망인 상황인데도, 정부는 저임금 노동을 자랑처럼 국가 홍보 브로슈어에 소개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스불라 타브라니 국립인도네시아대학 교수(보건의료학)는 과 한 인터뷰에서 “인도네시아에선 정부의 부정부패로 새나가는 돈이 워낙 많아 경제성장에 따른 이른바 ‘낙수효과’도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며 “최근 노동자들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빈발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말했다.

 

공장 밖에서 결정되는 노동자 현실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성장의 열매’를 공평하게 나누자는 것이다. 연평균 6%에 이르는 경제성장률에도, 노동자들의 팍팍한 삶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2012년 11월까지 버카시 공단의 한 전자제품 조립회사에서 일했다는 밤방(30)은 “한 달 평균 생활비는 210만루피아(약 25만원) 안팎인데, 월급은 법정 최저임금인 150만루피아 수준이다. 매달 은행에서 대출을 받거나, 추가 근무 수당을 받기 위해 자진해서 잔업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노동운동 진영에서 △의료보험·연금 등 사회 안전망 개선 △최저임금 현실화 △불안정 노동 반대 등 크게 세 가지 의제를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간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을 가로막아온 것은 문화·제도적 억압이었다. 수하르토 독재정권 시절(1967~98년) 정부가 인정한 합법노조는 단 하나였고, ‘노사 문제는 공장 안에서 해결하라’는 정부 지침은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수하르토의 집권에 앞선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활동가들이 대거 살해당한 경험도 노동운동 진영을 움츠러들게 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10년 시작된 ‘공장에서 거리로’ 캠페인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로니 페브리안토 인도네시아 금속노조(FSPMI) 부위원장은 “노동자를 둘러싼 모든 현실이 공장이 아닌 의회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노동 문제는 정치적이고 법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거리로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중앙통계청(BPS)이 2011년 8월 내놓은 자료를 보면, 인도네시아의 실질 노동인구는 약 1억1700만 명에 이른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의 ‘활약상’은 벌써 이웃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타브라니 교수는 “예전에 아시아 노동계가 주목한 것은 한국이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가장 적극적이었고, 실제 많은 변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현재 아시아 각국 노동자들은 저임금 노동과 불안정 고용 등의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서고 있으니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노조 연대단체 ‘인더스트리올’의 타이 담당 활동가인 아랸야 파카팟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인도네시아 노동계가 적극 추진하고 있는 ‘모두를 위한 사회 안전망’ 캠페인은 현재 아시아 지역 노동운동의 모델이다. 타이 노동운동가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2012년 12월 초 타이의 가스·제지·인쇄·화학산업 노조 활동가들이 ‘현장학습’을 위해 버카시 공단 노동조합과 오마부루를 찾았다. 찻차이 파이야센 타이 가스업노조연맹(TIG LU) 사무총장은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이 5년 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효과적인 조직사업과 캠페인 전략을 배우려고 노조 실무자들과 버카시를 찾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 틀 안에서 연대에 성공한다면, 세계 노동운동의 모범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세안의 운명 가를 2015년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는 2013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거리투쟁을 통해 실제 ‘성과’를 이끌어내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노동계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결과, 2013년 버카시 지역의 최저임금이 기존 147만루피아에서 210만루피아로 인상됐다. 또 버카시 지역 하청노동자 3만5천 명이 직접계약이나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페브리안토 부위원장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추진하고 있는) ‘아세안 경제공동체’가 출범하는 2015년을 가장 중요한 해로 보고 있다. 역내 노동과 상품 이동이 잦아질 테고, 그땐 지역 차원으로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지역 내 노조와의 국제 연대를 강화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이슬기 통신원 skidolm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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