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스라엘 극우의 불길한 결집

이란 전쟁 불사론 외치는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 극우 베이테누당과 합당해 조기 총선으로 돌파구 노려… 중동에 감도는 전운
등록 2012-11-09 19:34 수정 2020-05-03 04:27

기억조차 가뭇없다. 그럴 만하다. 그새 19년2개월여가 흘렀다.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오슬로 평화협정’에 서명한 때는 1993년 9월3일이다. 쉽게 말해 ‘땅’과 ‘평화’를 맞바꾸자는 게 당시 협정의 뼈대였다. 무장저항단체이던 PLO는 이로써 정치조직으로 탈바꿈했고, 이스라엘군이 물러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들어섰다. 딱, 거기까지였다.

오바마 재선에 대비한 포석
2012년의 301번째 날인 지난 10월28일은 히브리력으로 5773년 8월(헤슈반)12일이었다. 꼭 17년 전 그날(1995년 11월4일) 텔아비브에서 열린 평화집회에서 연설을 하던 라빈 총리가 유대근본주의에 경도된 극우 청년의 흉탄을 맞고 비명에 갔다. 이후 해마다 헤슈반 12일이면 이제는 ‘라빈 광장’으로 이름이 바뀐 암살 현장에서, 그의 넋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올해 행사에도 평화운동가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2만여 명이 참석했다.
예루살렘에서도 따로 추모행사가 마련됐다. 라빈 총리의 ‘동지’였던 시몬 페레스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도 행사에 참석했다. 현지 은 페레스 대통령이 추모사에서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쪽과 이뤄가야 할 미래의 평화를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전혀 딴소리를 했다. 그는 이날 행사에서 “(라빈 전 총리는) 이란이 이스라엘의 안보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며 “그의 죽음 이후 친이란계 세력이 팔레스타인의 절반(가자지구)을 장악했고, 이제 나머지 절반(요르단강 서안)까지 넘보고 있다”고 강조했단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지난여름부터 ‘조기 총선’ 카드를 만지작거리던 네타냐후 총리가 마침내 ‘패’를 꺼내든 것은 10월9일이다.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간단했다. “의회에서 예산안을 제때 처리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게다. 이게,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다.
2009년 총선 결과, 의회 120석을 13개 정당이 나눠가졌다.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당은 27석을 얻어 중도 성향의 카디마당(28석)에 이어 원내 제2당을 차지했다. 하지만 카디마당이 연립정부 구성 협상에 실패해 극우파를 포함한 보수 진영을 한데 모은 리쿠드당이 집권에 성공했다. 소수파가 정국을 주도해나가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재신임’을 묻는 방식으로 총선을 앞당겨 치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터다. 물론 조기 총선의 이유가 그뿐만은 아닐 게다. 네타냐후 총리가 고려했을 법한 변수를 두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미국 대선’이다. 백악관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이스라엘 정가에도 어김없이 ‘변화의 후폭풍’이 몰아친다. 네타냐후 총리는 개인적으로 이를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1996년 총선에서 페레스 현 대통령이 이끈 노동당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한 그는, 3년여 뒤 치러진 총선에서 에후드 바라크 현 국방장관이 이끈 노동당에 다시 정권을 내줘야 했다. 이유는 여럿이었지만, 당시 평화협상 과정에서 빌 클린턴 행정부와 불협화음을 냈던 게 컸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안팎으로 비판 받는 ‘이란 전쟁 불사론’
2009년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한 네타냐후 총리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미 대선이 본격화하면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밋 롬니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11월6일 미 대선에서 롬니 후보가 당선되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정치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역풍’을 최소화하려면 야권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아야 한다. 총선을 앞당겨야 한다는 계산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이란 변수’도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급등하는 물가와 치솟는 실업률 등 산적한 국내 문제를 강경한 대외정책 기조로 가려왔다. 그간 “이란의 핵무장 움직임이 ‘레드라인’을 넘어섰다고 판단하면, (미국의 지원이 없더라도) 독자적으로 군사공격에 나설 것”이라고 을러댄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라빈 전 총리 추모행사에서 새삼 ‘이란’을 거론한 이유를 알 만도 하다.
문제는 네타냐후 총리의 ‘전쟁 불사론’에 대한 안팎의 반대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바라크 국방장관(노동당)을 비롯한 연정 파트너들도 “아랍의 봄 이후 중동 정세가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며 ‘전쟁 불가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아예 “이란을 겨냥한 군사작전에 필요한 예산을 배정하지 않을 것”이란 경고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미국 역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영국 은 10월31일 인터넷판에서 “바레인에 해군 제5함대 사령부를, 카타르·쿠웨이트·오만 등지엔 공군기지를 두고 있는 미국으로선 이스라엘의 ‘돌출행동’이 자칫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미군의 작전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며 “마틴 뎀프시 합참의장을 비롯한 미군 지도부가 최근 부쩍 이란을 겨냥한 이스라엘의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경계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래저래 곤란한 처지에 몰린 네타냐후 총리로선 ‘돌파구’가 절실했을 터다.
“두 당이 합쳐지면 외부의 군사적 위협에서 이스라엘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 힘을 바탕으로 사회·경제적 변화를 주도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지난 10월25일 네타냐후 총리는 극우 성향의 ‘이스라엘 베이테누’(우리 집 이스라엘·이하 베이테누)와 리쿠드당의 합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연정 파트너인 베이테누는 아비그도르 리에베르만 외교장관이 1999년 러시아계 이민자를 지지 기반으로 창당했다. 당시 선거에서 고작 4석을 얻는 데 그친 베이테누는 창당한 지 불과 10년 만인 2009년 총선에서 15석을 얻으며 일약 원내 제3당으로 떠올랐다.
당시 베이테누 쪽이 내건 으뜸 구호는 ‘충성 맹세 없이, 시민권 없다’였다. 이스라엘 시민권을 지닌 팔레스타인계 주민들을 겨냥한 ‘선동’이었다. 이스라엘 통계청(CBS)이 내놓은 최신 자료를 보면, 이스라엘 인구 788만여 명 가운데 약 20.6%에 이르는 162만여 명이 아랍계다. 유권자 5명 가운데 1명을 ‘적’으로 만들고도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셈이다.

유대계 절반, “아랍계 시민권 박탈” 지지
리에베르만 장관은 애초 리쿠드당 청년조직에서 정치를 배웠다. 네타냐후 총리가 당 대표에 오른 1993년엔 당 사무총장을 맡았고, 1996년 집권 이후엔 총리실장을 지냈다. 둘 사이가 엇갈린 것은 네타냐후 총리가 클린턴 행정부의 압박에 밀려 오슬로 협정 이행을 위한 세부 계획을 담은 ‘와이리버협정’(1998)에 합의할 무렵이다.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을 ‘무원칙한 타협’이라 몰아세운 리에베르만 장관은 당내 불만세력을 이끌고 탈당해 베이테누를 창당했다.
두 정당의 합당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2004년 5월 베이테누 쪽이 내놓은 이른바 ‘리에베르만 계획’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랍계 주민이 몰려 사는 지역은 아예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쪽으로 넘기는 대신, 헤브론 등 유대인 정착촌이 밀집한 요르단강 서안의 일부를 넘겨받자는 게 계획의 핵심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국경선이 확정된 이후엔 “이스라엘에 충성하기로 맹세한 이들을 제외한 아랍계 주민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베이테누 쪽은 강조했다. ‘충성 맹세’와 ‘시민권’을 등치시킨 구호는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민심’은 어떨까? 지난 10월22일 이스라엘 일간 는 눈길을 끄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텔아비브대학에 딸린 ‘다이얼로그 여론조사센터’(DPC)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47%가 ‘아랍계 주민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쪽으로 넘겨야 한다’고 답했단다. 유대계 주민 절반가량이 ‘리에베르만 계획’을 지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랍계 주민과 같은 건물에서 거주하기 싫다’는 응답과 ‘자녀가 아랍계 학생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응답도 각각 42%나 됐다. 응답자 3명 가운데 1명(33%)은 ‘아랍계 주민에게 투표권을 줘선 안 된다’고 답했다. 또 향후 요르단강 서안 지역이 이스라엘에 합병된다면, 250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투표권을 줘선 안 된다는 답변은 10명 가운데 7명이나 됐다.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8%는 ‘이스라엘에서 이미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이 시행되고 있다’고 답한 것도 무리는 아닌 게다.

“팔레스타인 돕는 이집트 수장시키자”
“네타냐후 총리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이스라엘의 안보를 걸고 도박판을 벌이고 있다. 자칫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리쿠드당 온건파가 2005년 떨어져나와 창당한 카디마당의 치피 리브니 전 대표는 10월28일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날 리쿠드당 중앙위에서 합당을 공식 확정된 뒤, 네타냐후 총리가 “국방장관을 포함해 (리에베르만 장관이) 원하는 어떤 부서라도 맡길 것”이라고 말한 것을 겨냥한 경고다. 리에베르만 장관은 한때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나일강의) 아스완댐을 폭파시켜 이집트를 수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중동의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롬니 압도적 선호하는 유대계 이스라엘인들
바깥세상과의 더 많은 ‘소통’필요해

사방이 온통 ‘적’이다. 고립된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건 오로지 미국이다.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해, 1948년 5월 ‘독립’ 이후 미국이 이스라엘에 지원한 예산만도 약 1230억달러에 이를 정도란다. 유대인들이 미 대선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들이 생각하는 2012년 미 대선의 ‘판세’는 어떨까?
는 지난 10월28일 “유대계 이스라엘인의 절대다수가 밋 롬니 공화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이스라엘민주주의연구소’(IDI)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따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21.5%에 그친 반면, ‘롬니 후보를 지지한다’는 응답은 57.2%나 됐다”고 전했다. 롬니 후보가 ‘이스라엘의 국익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게 지지 이유란다.
아랍계 주민들의 반응은, 글쎄 유대계와는 정반대였다.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답변이 절반에 가까운 45%에 이른 반면, ‘롬니 후보를 지지한다’는 응답은 15%에 그친 게다. 앞서 지난 9월 말 미국 내 유대인 단체들이 실시해 내놓은 설문조사 결과, 유대계 미국인들은 압도적으로 오바마 대통령(63%)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롬니 후보를 지지한다는 응답은 27%에 그쳤다.
지구촌 차원에선 어떨까? 전세계 21개국에서 모두 2만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평화지수’ 여론조사 결과는 ‘아랍계 이스라엘인’이나 ‘유대계 미국인’ 쪽에 가깝다. 영국 <bbc>의 보도를 보면, 오바마 대통령은 전세계적으로 평균 50%의 지지율을 올린 반면 롬니 후보는 단 9%를 얻는 데 그쳤다. 중동에서 ‘섬’처럼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바깥세상과의 더 많은 ‘소통’인지 모른다.
</bbc>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