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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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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등록 2012-10-09 18:26 수정 2020-05-03 04:26
‘역사가의 역사가.’ 지난 10월1일 새벽 영국 런던의 한 병원에서 95살을 일기로 삶을 마감한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이자 불굴의 사회주의자였다. 사진 한겨레 자료

‘역사가의 역사가.’ 지난 10월1일 새벽 영국 런던의 한 병원에서 95살을 일기로 삶을 마감한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이자 불굴의 사회주의자였다. 사진 한겨레 자료

“과거를 파괴하는 것, 현재의 경험을 과거 세대의 경험과 연계시키는 사회적 기제가 파괴돼버린 것이 20세기 말 가장 도드라지면서도 암울한 특징이다. 남들이 잊어버린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역사학자들의 역할이 더욱 긴요한 이유다.”( 중에서)

정작 소련에선 한 권도 출판되지 않아

1992년 6월28일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옛 유고 연방의 수도 사라예보를 예고 없이 찾았다. 이미 불붙기 시작한 ‘발칸전쟁’의 심장부에서, 그 전쟁의 심각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총탄이 날아드는 현장에서 존경받는 노정치인이 내놓은 ‘경고’는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그는 왜 그날을 택해, 그곳을 방문했을까?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 한복판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됐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경도된 무모한 젊은이가 총질을 한 게다. 그로부터 꼭 한 달 뒤인 그해 7월28일,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세계대전’이 터졌다. 미테랑 전 대통령의 사라예보 방문에 담긴 ‘무게감’이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과 ‘사라예보 사건’을 떠올릴 만큼 충분히 오래 산 극소수 노인을 제외하고는, 당시 ‘그날, 그곳’의 의미를 떠올린 이들이 거의 없었단다. 새삼, 홀연히 떠나버린 ‘대가’의 부재가 뼈아프다.

지난 10월1일 새벽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영국 런던의 로열프리병원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숨을 거뒀다. 그의 딸 줄리아 홉스봄은 이날 <bbc>과 한 인터뷰에서 “몇 년 전부터 백혈병 투병을 해왔으나, 외부에는 이런 사실을 극구 숨겨왔다”고 말했다. 향년 95.
에릭 존 어니스트 홉스봄은 1917년 6월9일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계 영국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제가 지중해 연안에 건설한 그 도시는 서기 641년 이슬람 세력이 정복할 때까지 1천 년 이상 이집트 왕국의 수도였다. 온갖 물산과 정보가 넘쳐났다. 미래의 역사학자가 태어나기에 좋은 곳이었다.
1917년 2월 러시아에선 차르의 압제가 군중혁명으로 무너졌다. 10월엔 혁명을 주도했던 공산주의자(볼셰비키)가 마침내 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첫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평생을 올곧은 사회주의자로 살아갈 인물이 태어나기에 좋은 때였다.
홉스봄이 2살 때인 1919년 그의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인 빈으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평화로운 유년기를 보내던 그는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2년 만에 숨을 거두자, 1931년 베를린의 삼촌에게 맡겨진다. 유럽을 호령하던 ‘제국의 심장부’를 옮겨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낸 게다. 당시 베를린에선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가 태동하고 있었다. 영민한 소년은 카를 마르크스의 을 읽고, 사회주의 학생단원 활동을 시작했다.
히틀러가 ‘제3제국’의 총통에 오르기 직전인 1933년 홉스봄은 본국 발령을 받은 삼촌을 따라 다시 런던으로 이주했다. 1936년 이른바 ‘귀족 지식인 사회의 거점’으로 꼽히는 케임브리지대학(킹스칼리지)에 입학한 그는 같은 해 영국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는 소련과 동유럽권의 몰락과 함께 영국 공산당이 해체된 1991년까지 당적을 버리지 않았다. ‘빨갱이 에릭’ ‘스탈린의 치어리더’ ‘회개하지 않은 공산주의자’ 따위 점잖치 못한 별칭이 평생 따라붙은 이유다. 그러나 정작 소련에선 그의 저작이 단 한 권도 출판되지 않았다.

말년에 그의 눈길 끈 ‘아랍의 봄’
제2차 세계대전의 혼돈이 여전하던 1947년 그는 런던대학(버크벡칼리지)에서 사회경제사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대서양 건너 미국 스탠퍼드대와 뉴스쿨을 오가며 강단에 선 이력만도 무려 60여 년을 헤아린다. 그는 2004년 펴낸 자서전 (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에서 “나만큼 오래 산 사람은 역사의 힘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뼈저리게 느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0년 동안 세계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느낌은 똑같은 기간으로 따졌을 때,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급격하게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그 기분이 어떤가 하는 것은 오직 우리만이 말해줄 수 있다”고 썼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암울하다. 홉스봄은 지난해 말 <bbc> 등과 한 인터뷰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재미없는 시대’가 최선일 테지만, 역사가 입장에선 당연히 정반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 ‘가장 별스럽고 끔찍한 세기’라고 표현했던 20세기의 격동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또 기록한 몇 남지 않은 역사학자였다. 은 10월1일 인터넷판에서 홉스봄이 숨지기 며칠 전 지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오래 살다보니 (1930년대에 이어) 지구촌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는 상황을 두 번이나 보게 됐다”며 웃었다고 전했다.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뿌리내린 홉스봄의 대표작은 단연 ‘~시대’ 연작이다. 그는 프랑스대혁명(1789년) 시대부터 소비에트의 몰락(1989년)에 이르기까지 200년의 역사를 △혁명(1962년) △자본(1975년) △제국(1987년) △극단(2004년)이란 열쇳말로 풀어 네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자유주의 사학자인 나이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사학)조차 10월2일치 에 보낸 헌사에서 “내가 아는 한, 근현대사 연구자라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이라고 썼다.
그는 지난 역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현실 정치에 대한 날선 비판자로 평생을 살아왔다. ‘변혁운동’에서 멀어져만 가는 영국 노동당에 대한 그의 혹독한 비판은, 1990년대 이른바 ‘뉴레이버 운동’으로 불린 당내 개혁의 ‘배후’로 평가된다. 이런 그를 두고 닐 키녹 전 노동당 대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평가했지만, 정작 그는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총리 시절 노동당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자 “바지를 입은 대처 정권”이라며 날을 세웠다.
생의 막바지에 그의 관심을 끈 사건은 ‘아랍의 봄’이었다. 그는 지난해 12월23일 <bbc>과 한 인터뷰에서 “아랍권 전역으로 혁명이 확산돼가는 과정이, 1848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이탈리아·독일·합스부르크 제국 등 유럽 전역으로 혁명이 번져간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며 “노동자 계급이 아닌 중산층과 교육받은 젊은이들이 주축이 돼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으로 효과적으로 저항을 조직해내는 과정을 흥분과 기대감 속에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숨지기 직전까지도 병상 곁에 신문을 쌓아두고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노학자의 열정이었다. 숨지기 불과 열흘 전인 지난 9월21일에도 에 저명한 산업사회학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도로시 웨더번의 부음 기사를 기고하기도 했다. 맏딸 줄리아 홉스봄은 10월1일 <ap> 등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 ‘손자들에게 남기실 말씀이 없느냐’고 물었다. ‘호기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이라시며.”

“ 권할 때 두 눈 반짝”
7명의 손자와 1명의 증손자들이 읽기를 바라는 책 세 권도 추천했단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과 영국계 미국 시인 와이스턴 휴 오든의 시집, 그리고 마르크스의 이었다. 줄리아 홉스봄은 “마지막 책을 권할 때는 두 눈을 반짝이셨다”고 덧붙였다. 그러니 자연스럽다. 그는 자서전을 이런 문장으로 맺었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ap></bbc></bbc></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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