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0일 오전 9시,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시 중급 인민법원.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구카이라이(53·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 부인)가 법정으로 들어섰다. 예전에 비해 놀랄 만큼 살이 찐 모습이었다. 두 배 이상 불어난 몸집 탓에 얼굴 윤곽을 비롯해 전체적인 외형은 이미 예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각에서는 ‘대역’을 썼다는 논란이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변한’ 모습이었다.
‘견해’도 ‘양심선언’도 없이
이날 재판은 지난 8월9일 심리재판 이후 두 번째 열린 선고공판이었다. 구카이라이는 지난해 11월13일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측근 장샤오쥔과 공모해 살해한 죄로 ‘사형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재판 결과에 대해 담담한 표정으로 “받아들인다”며 항소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지금 너희가 처치하려는 것은 마오 주석이야. 우리 고향에서는 ‘개를 때리려면 주인의 얼굴을 보라’는 말이 있어. 나를 치는 건 곧 마오 주석을 치는 거야. 나는 마오 주석의 한 마리 개였다고!”
문화대혁명의 주범으로 잡혀 ‘4인방’과 함께 재판을 받았던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이 1980년 12월24일 재판을 받을 당시 법정에서 내뱉은 말이다. 당시 장칭은 변호사 선임도 거절한 채, 자신의 기소문은 모두 ‘헛소리’라며 직접 작성한 변론문 ‘나의 관점’을 장장 2시간 넘게 읊어댔다. 그가 쓴 최후의 변론문 ‘나의 견해’는 “나는 마오 주석의 한 마리 개였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돼 지금까지 널리 회자되는 ‘명문’으로 꼽힌다.
구카이라이 재판은 장칭에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두 번째 ‘거물급 부인’의 재판이자, 좌파와 우파를 비롯해 태자당과 상하이방, 공청단 등 각 정치 파벌의 이전투구가 맞물린 ‘세기의 정치재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선고공판에서 구카이라이는 자신을 변호할 어떤 ‘견해’도 제출하지 않았으며, 재판정을 향해 ‘나는 보시라이의 개였다’라고 독을 품은 ‘양심선언’을 하지도 않았다. 또한 기소문 어디에도 보시라이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액의 재산을 해외에 은닉하고 남편의 권력을 이용해 치부한 권력형 경제범죄 사실은 누락된 채 단지 아들의 신변 안전을 걱정해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형사사범‘으로만 기소됐다.
구카이라이는 전 총정치부 부주임이자 신장 지역 제2부서기였던 구징셩 장군의 막내딸이자, 전직 충칭시 당서기였고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던 태자당계의 핵심 인물 보시라이의 둘째부인이다. 이런 막강한 집안과 남편이 아니더라도 그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고,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내건 가장 영향력 있는 로펌의 대표였다. 중국 전통악기인 비파와 피아노 연주도 수준급인데다, 다방면에 걸쳐 재주를 겸비한 그는 미모도 출중해 중국의 ‘재키 케네디’라고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여걸이었다.
남편 보시라이 역시 집안 배경과 능력, 외모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지라, 이들 부부는 한때 중국 언론이 ‘가장 이상적인 정치인 부부’로 선전하기도 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한 아들 보과과와 더불어 중국의 개혁과 개방 이미지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고위 정치인 가정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보시라이의 최측근이던 전 충칭시 공안국장 왕리쥔의 망명 사건과 뒤이은 보시라이 부부의 온갖 추문과 부패, 심지어 살인 행각 폭로로 한순간에 ‘제2의 린뱌오’ ‘제2의 장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IMAGE2%%]중요한 것 위해 덜 중요한 것 희생하는
구카이라이의 재판 과정이 뉴스와 언론을 통해 보도된 뒤, 중국 내 주요 여론 형성 통로가 된 인터넷과 소셜커뮤니티에서는 사형 집행 유예라는 결과를 둘러싸고 갖가지 논쟁이 봇물을 이뤘다. 대다수 중국 언론매체는 중국 사법부가 구카이라이의 특수한 신분에도,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사법정의에 입각해 사형 집행 유예를 선고한 것은 적절한 판결이었다는 식으로 여론몰이를 했다.
대표적으로 중국공산당 기관지 산하의 는 사설을 통해 “이번 판결은 법률의 정상적인 양형 범위에 속하며 대중의 예측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며 “하지만 보시라이 아내라는 특수한 신분으로 인해, 이번 사건은 어떤 판결이 내려졌든지 간에 논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이어 “일반적인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신중한 사형 선고’라는 사법 원칙을 생각해본다면 논쟁의 여지는 훨씬 줄어들 것”이라며 판결의 ‘적절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각종 마이크로블로그와 소셜커뮤니티 등 인터넷 공간에서는 “구카이라이가 만일 보통 사람이었다면 당장 사형이 선고됐을 것”이라며, “정당방위 살인에도 사형이 선고되는 마당에 고의로 계획적인 살인을 한 구카이라이에게 사형 집행 유예가 선고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더군다나 남편 보시라이의 사건 연루 가능성이 농후한데도 보시라이의 이름은 기소장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카이라이가 조사 과정에서 자백한 것으로 알려진 거액의 재산 해외 은닉과 불법 축재 과정 등 부패·비리 혐의는 제외하고 오로지 고의살인죄로만 기소된 대목도 입길에 올랐다.
이번 재판 역시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항간에는 사형 집행 유예가 선고될 것이라는 예측이 파다했다. 여론의 초점은 중국 사법부가 과연 그들 부부의 범죄행위의 동기와 구체적인 내용을 어디까지 밝혀낼 수 있을지였다.
이와 관련해 중국 정법대학 양판 교수는 싱가포르 와의 인터뷰를 통해 “사건 심리의 공개 정도가 불충분했고 많은 증거가 공포되지 않았다”며 간접적으로 사법부의 ‘정치재판’을 비판했다. 민간인 사업가 리샹타오는 “이번 재판 결과는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희생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모략가들의 책략과 같은 결정”이라며 “전형적인 중국식 정치재판”이라고 일갈했다. 즉, 문화대혁명의 주범이자 중국을 혼란으로 빠뜨린 주범이 마오쩌둥인데도 그의 모든 죄와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쓴 장칭의 전례처럼, 구카이라이 역시 정치적 타협을 통해 재판 과정에서 최대한 ‘정치적 색채’를 빼고 개인적 원한 관계가 빚은 범죄행위만을 부각시겼다는 것이다.
그동안 다롄과 충칭 등에서 권력을 남용해 온갖 비리와 축재를 저지른 증거들과 심지어 유명 배우 장쯔이와의 성 스캔들까지 언론에 흘리며 보시라이 죽이기에 나섰던 중국 당국 역시 최근 들어 보시라이와 관련된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구카이라이 판결 등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때 그사이 보시라이 문제 처리와 관련해 각 파벌 간에 모종의 정치적 타협이 이뤄지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천시퉁의 길 갈까, 은근슬쩍 덮을까
구카이라이가 선고받은 사형 집형 유예는 중국 형법제도에만 존재하는 다소 특수한 제도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나 고위급 인사의 재판에서 주로 이용되고 있다. 즉, 죄질이나 여론에 비추어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사안이거나 고위급 인물일 경우 비판 여론과 적절한 사법 심판이라는 형식에 부합하면서도 피고인들에게 적절한 ‘탈출의 길’을 열어주는 제도로 종종 활용되고 있다. 그동안 죄질이 나쁜 부정부패 등을 저지른 고위급 정치인들 중 상당수가 사형 집행 유예를 받은 바 있다.
구카이라이도 사형 집행 유예 기간인 2년 동안 별다른 일이 없는 한 2년 뒤에는 무기나 유기징역으로 감형되며, 감형 뒤 정신질환이나 신체적 질병 등을 이유로 보석 신청을 해 풀려날 수 있는 다양한 ‘탈출 방법’이 열려 있다.
구카이라이 관련 재판이 일단락되자 중국 정계의 관심은 오는 10월에 열릴 예정인 제18대 공산당 당대표 대회로 쏠리고 있다. 8월 초 개막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 지도부들의 연례회의인 베이다이허 회의가 종료된 직후 열린 구카이라이 재판 결과는 사실상 ‘정치적 타협물’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다. 보시라이 문제와 관련해 각 파벌 지도부들 내에 정치적 합의가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베이징 정가에서는 서로 엇갈린 두가지 전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보시라이가 과거 장쩌민의 정적이던 베이징시 시장 천시퉁과 얼마 전 낙마한 상하이시 서기 천량위 등과 같은 경로를 밟게 될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당 기율 등 위반 혐의로 당적과 지위를 박탈당한 뒤, 정식 기소절차를 밟아 수감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보시라이는 당 기율 위반과 부패 혐의로 수감된 천시퉁이나 천량위와 달리, 아내를 비호했거나 혹은 공모해 헤이우드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형사법으로도 기소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번 구카이라이 재판 결과가 암시하듯 중국 정치 지도부는 올해 초 왕리쥔 사건으로 불거진 보시라이 문제를 더 이상 확대시키길 원치 않으며,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짓고 18대 당대회를 앞두고 당내 단결과 안정을 더 우선시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지난 7월 중순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주요 간부 토론회’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보시라이 사건을 염두에 둔 듯 ‘당내 단결과 사상 통일’을 강조한 바 있다. 보시라이 사건 이후 중국 내에서는 실제로 좌·우파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으며, 좌파 인터넷 사이트가 속속 차단되는가 하면 좌파 지식인에 대한 간접적인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1600명 이상의 좌파 지식인이 주축이 돼 원자바오 총리의 해임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이를 인터넷에 공개한 사건도 있었다. 그만큼 사건의 파장이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때문에 중국 지도부는 섣부른 정치적 처벌보다는 당내 개혁과 단결을 도모할 타협책을 모색하고 있다. 권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제가 없는 한 ‘보시라이 사건’은 언제든지 다시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 개혁의 계기 될지도
1998년 신화사 다롄 주재 기자로 있을 당시 보시라이와 관련된 수많은 부정·비리를 폭로한 대가로 수감 생활을 한 뒤, 지금은 캐나다에서 임시 거주하고 있는 언론인 장웨이핑은 와의 인터뷰에서 “보시라이 사건은 중국 정치의 방향을 돌렸고, 문혁의 극좌 노선으로 가는 것을 피하게 했으며, 미래 정치 행로를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며 “다음 단계는 아마도 정치체제 개혁을 가동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시라이 사건이 중국 정치 개혁의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베이징(중국)=박현숙 통신원 phschina@naver.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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