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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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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가치를 택하자니 현실이 울고…

등록 2012-08-16 10:42 수정 2020-05-03 04:26
커피 전문가들은 대형 커피전문점들이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커피의 맛과 향에 낮은 점수를 준다. 커피를 잔에 따르는 모습. 한겨레 박미향

커피 전문가들은 대형 커피전문점들이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커피의 맛과 향에 낮은 점수를 준다. 커피를 잔에 따르는 모습. 한겨레 박미향

미국 제6대 대통령을 지낸 존 퀸시 애덤스는 외교관 출신이다. 전임자인 제임스 먼로 대통령 시절엔 국무장관까지 지냈다. 1823년 12월2일 먼로 대통령은 의회 연설을 통해 미국 외교정책의 원칙을 담은 이른바 ‘먼로 독트린’을 선언했다. 이를 기초한 게 애덤스다. 앞서 1821년 7월4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하원에 출석한 에덤스는 이렇게 강조했다.

“자유와 독립의 깃발이 세워졌거나 앞으로 세워질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미국의 마음과 축복과 기도가 함께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괴물을 찾아 쓰러뜨리기 위해 해외로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모든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소망하지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투사로 남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 시험에 든 ‘아랍의 봄’

국제정치학 교과서는 미 외교정책의 흐름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소개한다. 이른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다. 이상주의가 ‘가치’를 앞세운다면, 현실주의는 ‘국익’을 중시한다. 애덤스의 표현을 빌려보자. ‘괴물을 찾아 쓰러뜨리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이 이상주의라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투사’로 남는 것은 현실주의다. 이상주의를 ‘개입주의’로, 현실주의를 ‘고립주의’로 해석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라크 침공의 명분으로 ‘민주주의 확산’을 내걸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3년7개월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2009년 6월4일 오후 오바마 대통령이 이집트 명문 카이로대학 그랜드홀에서 연설에 나섰다. 자신이 직접 초안을 잡아 전세계 13억 무슬림을 향해 내놓은 이날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제목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50분여에 걸친 이날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모두 7가지 주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네 번째로 등장한 주제가 ‘민주주의’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최근 몇년 동안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을 두고 논란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이라크전쟁과 맞닿아 있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어떤 형태의 정부도 어느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강요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세계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정부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권리, 법에 따른 통치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는 신념,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지 않는 투명하고 깨끗한 정부,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이는 비단 미국적 가치만이 아닌, 인류 모두가 누려야 할 인권이다. 전세계 어디에서든, 미국은 이를 적극 지지할 것이다.”

그로부터 1년6개월여 만인 2010년 12월18일, 오랜 독재의 겨울을 보낸 중동 지역에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알 타우라트 알 아라비야’, 이른바 ‘아랍의 봄’이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의 열기는 이집트와 리비아, 예멘에서 차례로 독재자를 무너뜨렸다. 바레인과 시리아에선 여전히 ‘싸움’이 진행되고 있고, 알제리·이라크·요르단·쿠웨이트·모로코 등지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난 외침이 거리에서 메아리쳤다. ‘민주주의’와 ‘새로운 시작’을 강조했던 오바마 대통령으로선 반길 만한 일이었을 터다. 그런가? 사례를 살펴보자.

발목잡는 이슬람주의, 종족갈등 변수

2009년 6월 대통령 선거 직후 시작된 이란의 민주화 시위는 이듬해 2월 중순까지 장기간 이어졌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2011년 1월 이집트 민주화 시위 때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점거시위가 시작된 1월25일엔 언급을 피했지만, 나흘 뒤인 1월29일엔 ‘질서 있는 권력이양’을 주문했다. 이어 1월31일엔 “의미 있는 권력이양 절차를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수위를 높여갔다. 비슷한 시기 터져나온 리비아의 민주화 시위가 내전으로 치달았을 때는 완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등 보좌진의 반대에도, 적극적으로 군사개입을 추진했다. 사안에 따라, 대응이 엇갈렸단 얘기다.

“아랍의 민주화가 ‘국익’과 ‘가치’를 둘러싼 오바마 행정부의 고민을 키우고 있다.” 는 지난 7월27일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이 매체가 짚은 ‘고민거리’는 크게 3가지다. 첫째,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의 부상이다. 민주화 이후 치러진 튀니지·이집트 선거에서 미국의 중동정책을 비판해온 이슬람 세력이 잇따라 집권에 성공했다. 시위대가 무너뜨린 벤 알리(튀니지)와 호스니 무바라크(이집트) 정권은 아랍권의 대표적인 친미파였다. 가치와 국익의 충돌이다.

둘째, 여전히 버티고 있는 친미 성향의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있는 민주화 세력의 위협이다. 바레인이 대표적이다. 바레인에는 미 해군 제5함대 사령부가 자리를 잡고 있다. 페르시아만 일대 미 군사전략의 핵심이다. 오바마 행정부로선 부패한 하마드 알할리파 왕정을 두둔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는 상황이란 얘기다. 다시, 충돌이다.

셋째, 절대권력이 흔들리자 고개를 들기 시작한 종족 갈등도 불길해 보인다. 사례는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가 절대다수의 수니파 국민을 억압하고 있는 시리아에서 찾을 수 있다. 1년7개월째 불을 뿜고 있는 내전에서 수니파 반군이 승리할 경우, 집권 알라위파에 대한 보복에 나설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는 “(시리아 내전이) 자칫 이란으로 대표되는 시아파 진영과 터키·사우디아라비아로 대표되는 수니파 진영 간 대리전 양상으로 치달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간 미국이 시리아 반군 지원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온 이유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는 8월9일치 에 쓴 기고문에서 이른바 ‘오바마 독트린’의 특성을 두 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미국의 안보와 직결된 사안에 대해선 단호하게 무력을 사용하는 반면, 직접적 연관이 없는 문제에 대해선 행동에 나서기 전에 동맹국과 협의한다”는 게다. 파키스탄 영토 안에서 오사바 빈라덴 사살 작전에 나선 것이 전자의 사례라면, 아랍연맹과 유엔의 결의를 통해 합법성을 갖춘 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과 함께 무장 개입한 리비아는 후자에 해당한다. 국익과 가치, 어느 것을 우선한 건가?

 

 “콩고나 수단에 왜 미군을 보내지 않느냐” 

오바마 대통령은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시절이던 2002년, 일찌감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2008년 대선 후보 결정을 위한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 현 국무장관과 차별성을 둘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른바 ‘인도적 개입’을 강조한 클린턴 장관은 상원의원 시절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에 찬성표를 던진 바 있다. 경선 당시 그는 “학살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투입해야 한다면, 콩고나 수단에는 왜 미군을 보내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기도 했다. 그는 ‘현실주의자’인 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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