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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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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식량값 폭등 사태 오나

1930년대 미국 ‘더스트볼’ 연상시키는 극심한 가뭄, 옥수수 선물 가격 6월에만 50% 폭등… 러시아, 스페인 등 가뭄 이어져 기후변화가 가뭄 낳고 가뭄이 식량난 낳는 악순환 구조화
등록 2012-07-31 17:12 수정 2020-05-02 04:26

‘더스트볼’(Dust Bowl).
1930년대 7년여 동안 이어진 미국의 대가뭄 시기에 등장한 표현이다. 지표면의 메마른 흙더미가 강력한 폭풍을 타고 먼 거리를 날아다녔다. 콜로라도주 남동부와 캔자스주 남서부, 오클라호마와 텍사스주 일부를 중심으로 한 중서부 대평원 지대가 먼지폭풍의 진원지, 곧 ‘더스트볼’이다. 가뭄 초기인 1932년에만 14차례, 1933년엔 무려 38차례나 거대한 먼지폭풍이 대평원 일대 곡창지대를 덮쳤다.

옥수수값 50% 오르면 식료품값 1% 상승
이 무렵의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1935년 4월14일 발생했다. 그날 오후 4시께 오클라호마주 북서부의 작은 마을 비버를 시작으로, 보이시와 애머릴로 등지를 ‘검은 폭풍’이 잇따라 덮쳤다. 약 30만t 규모의 토사를 동반한 거대한 흙먼지 더미는 인근 텍사스주까지 날아가 사위를 온통 암흑 천지로 바꿔놨다. 이른바 ‘검은 일요일’이다.
폭풍이 잦아든 뒤 10여 일 만인 그해 4월27일 미 의회가 농무부에 ‘토양보존국’을 신설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법률 제74-46호’를 서둘러 통과시킨 것은 당시 먼지폭풍의 파괴력을 짐작하게 한다. 잇따른 먼지폭풍은 여러 해에 걸쳐 비옥했던 농토를 황무지로 바꿔놨다. 7년여 이어진 가뭄 끝에 대평원 일대 곡창지대를 빠져나간 인구만 줄잡아 250만 명에 이른다. 대공황의 농촌판이었다.
지난겨울부터 이어지는 메마른 날씨 속에 최근 미국에서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가뭄 상황을 전하는 언론 보도에 심심찮게 ‘불길한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게다. 는 지난 7월4일치에서 “이미 일리노이와 미주리주 등지에서 농민들이 가뭄으로 발육이 부진한 옥수수밭을 아예 갈아엎고 있다”며 “인디애나·켄터키·오하이오 등지 곡창지대에서도 심각한 가뭄이 이어지자, 농민들은 1930년대 ‘더스트볼’을 입에 올리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미 농무부는 지난 7월12일 26개 주 1016개 카운티를 ‘가뭄으로 인한 재해지역’으로 선포했다. 단일 자연재해로는 미 역사상 최대 규모란다. 문제는 정작 심각한 국면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점이다.
“햄버거값 상승에 대비하세요.” 지난 7월19일 은 인터넷판 경제 섹션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여러 달째 가뭄이 미 중서부 곡창지대를 휩쓸어, 곡물값 상승이 주도하는 식료품값 전반의 상승세가 불가피해졌다”는 게다. 방송은 “미 전역에서 재배되는 옥수수의 40%가량이 가뭄으로 발육이 부진한 상태이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30%포인트나 늘어난 수치”라며 “이로 인해 수확기 가격 상승이 불가피해 보이자 지난 6월 한 달에만 옥수수 선물거래 가격이 (전달에 견줘) 무려 50%나 치솟았다”고 전했다.
다음 단계는 뭘까? 미 농무부에 딸린 경제연구청이 최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옥수수값이 50% 오르면 전체 식료품값은 1% 오른단다. 그다지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파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장 옥수수를 먹이로 사용하는 소·돼지·닭고기와 계란값도 큰 폭으로 동반 상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7월에도 1.4 달러 이상 가파르게 상승
가뭄이 심각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전미육우협회(NCBA) 등 업계에선 올해 쇠고기 소맷값이 4~6%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가뭄이 길어져 옥수수값 상승세가 이어진다면 쇠고기값 역시 지난해에 견줘 적어도 10% 이상 상승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마이클 밀러 NCBA 선임 부회장은 과 한 인터뷰에서 “(목축업자들이) 모두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옥수수값 상승세가 이어지는 시장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다”며 “(이른바 ‘콘벨트’로 알려진 미 중서부 곡창지대에서) 이 정도 심한 가뭄이 발생한 것이 워낙 오랜만의 일이니, 시장이 요동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미 미 농무부는 올해 옥수수 생산량 전망치를 연초보다 12% 낮췄다. 가뭄이 지속된다면, 수치는 더욱 낮아질 터다. 생산량 감소는 고스란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중순을 기점으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옥수수 선물가격은 7월 들어서도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지난 7월 초만 해도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부셸(약 27kg)당 6.5달러 이하로 거래됐던 12월 인도분 옥수수 선물가격은 7월25일 부셸당 7.88달러까지 치솟았다. 밀과 콩 등 기타 곡물값도 7월 들어 가파른 상승 곡선을 이어가고 있다. 옥수수·밀·콩 등의 곡물은 미국이 세계 1위 수출국이다. 미국발 식량값 폭등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인류가 가장 최근에 지구촌 차원의 식량값 폭등 사태를 경험한 것은 지난 2008년이었다. 2006년 말부터 일부 지역에서 시작된 가뭄이 원윳값 상승과 맞물려 위기를 키웠다. 치솟은 원윳값은 비료·운송비 등 농업 생산비용 상승으로 이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막대한 양의 옥수수와 콩 등 작물이 커져만 가는 바이오연료 시장의 수요를 맞추느라 식량시장에서 사라졌다. 경제 규모가 커진 중국·인도 등 신흥개발국에서 육류 소비가 급증한 것도 사료용 곡물 수요를 키워 식량 위기를 부채질했다.
당시 식량값 폭등으로 인해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식량위기국가’로 지정한 나라는 아프리카 21개국을 포함해 모두 36개국에 이른다. 유엔 회원국 5개국 중 1개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영국 는 2009년 1월18일치에서 “식량 부족과 지구온난화, 원윳값 상승과 인구 폭발이란 변수가 맞물려 21세기 인류 최악의 위기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위험의 세계화’다.

악순환이 ‘정상적’으로 보일 미래
‘2008년 위기’가 재연이라도 되려는 걸까? 우려스런 소식이 속속 들려온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최근 이상고온 현상을 동반한 가뭄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등지에서도 곡물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스페인도 ‘반세기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어, 올 유럽연합(EU) 전체의 밀 수확량이 줄어들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서아프리카에선 최근 때아닌 메뚜기떼가 극성을 부리고 있단다. 도처에서 아우성이다. 프란체스코 페미아 미 기후안보센터(CCS) 소장은 지난 7월18일 인도적 지원 전문 인터넷 매체 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에서 발생한 전례가 없는 가뭄은 기후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런 극한 이상기후는 기후변화로 인해 앞으로 더 자주 벌어질 것이다. …기후변화가 가뭄을 낳고, 가뭄이 식량난을 낳았다. 심각한 식량난은 종종 정정 불안으로 이어진다. 불안정한 기후가 지구촌 차원의 안보 위협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이 갈수록 ‘정상적’으로 보이게 될 것이란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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