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에 ‘보편 관할권’(Universal Jurisdiction)이란 개념이 있다. 재판을 거치지 않은 처형과 학살, 고문과 전쟁범죄 등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선 ‘국경’이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개별 국가의 주권에 속하는 ‘사법 관할권’쯤은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1998년 10월10일 스페인에서 발부된 영장으로, 일주일 뒤 영국 런던에서 체포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떠올리면 되겠다.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돼
칠레의 은퇴한 독재자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한 인물은 스페인 최고형사법원의 발타사르 가르손 수사판사다. 피노체트 집권 당시 칠레 거주 스페인 시민권자에게 자행된 살인과 고문 등 반인도적 범죄가 영장 발부의 근거였다. 가르손 판사가 ‘보편 관할권’에 기대 반인도적 범죄자의 뒤를 쫓은 사례는 여럿이다. 특히 2009년 3월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자행된 불법 고문을 근거로 앨버토 곤잘러스 전 법무장관을 비롯한 이른바 ‘부시 6인방’을 기소하려 했던 사건이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8월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마드리드 주재 미 대사관의 관련 외교전문(2009년 5월14일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지난 4월29일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가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 미국이 고문을 저질렀다는 혐의에 대해 조사하겠다고 밝혔음. 부시 행정부 고위 인사 6명에 대해 조사를 수행하겠다는 뜻을 강제로 접게 된 뒤 나온 발언임. 이 건은 스페인 검찰의 요구에 따라 형사법원의 다른 수사판사에게 배당됐음. 현재 이 건은 후속 처리가 중단된 상태임. 스페인 검찰청장은 본 대사관 쪽에 관타나모 건에 대한 가르손 판사의 움직임을 막아낼 것이라고 전해왔음.”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처벌은 ‘시간’도 뛰어넘는다. 인류애를 저버린 범죄에는 공소시효를 두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불처벌 불가’와 ‘시효 부적용’의 원칙은 국제법으로 확립된 바다. 2002년 7월 발효된 로마협약에 따라 상설기구로 들어선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이런 국제사회의 원칙을 확인해준다. 가르손 판사가 2008년 10월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정권 시절(1936~75년) 스페인에서 벌어진 각종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단죄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쉽지 않았다. 독재의 잔영은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프랑코 정권 시절의 만행은 1977년 발효된 총사면령에 따라 면죄부까지 받은 터다. 가르손 판사는 “반인도적 범죄는 사면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소신을 꺾지 않았지만, 범죄 조사는 곧 중단됐다. 급기야 2009년 9월 한 극우단체가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가르손 판사를 고발했다. 스페인에선 현직 판사에 대한 재판을 대법원이 진행한다. 안팎의 거센 비난에도 이듬해인 2010년 4월 가르손 판사는 정식 기소됐다. 그해 5월 판사 직무도 정지됐다.
오랜 법리 공방 끝에 스페인 대법원은 지난 1월24일 가르손 판사에 대한 첫 공판을 시작했다. 재판에 앞서 스페인 검찰청은 가르손 판사에 대한 재판을 기각해달라고 대법원에 공식 요청했다. 휴먼라이츠워치·앰네스티인터내셔널 등 국제 인권단체도 일제히 성명을 내어 “가르손 판사를 재판하는 것은 사법부의 수치”라고 비판했다.
프랑코 정권 잔악상 증언 기회 오나
가르손 판사의 변호인단은 재판이 계속되면, 프랑코 정권 시절 국가폭력 피해자 유가족 22명을 증언대에 세울 계획이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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