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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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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이들의 힘을 보여주다

슬리퍼 훔쳤다는 혐의로 갇힌 ‘샌들보이’ 구명운동 벌어진 인도네시아… 약자한테만 강한 공권력 향한 시민들의 분노 SNS 넘실
등록 2012-02-03 11:39 수정 2020-05-03 04:26

제법 굵은 빗발이 날리던 지난해 12월28일 저녁 어스름, 10대 남매가 자카르타 중심가 멘탱(이른바 ‘대사관 거리’)에 자리한 인도네시아 아동보호기구(KPAI) 사무실 앞뜰로 걸어 들어왔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였다. 남매는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술라웨시섬에 있는 AAL에게 우리 슬리퍼를 전해주세요. AAL에게 힘내라고도 전해주세요.”

AAL 대신 우리가 슬리퍼를 보상하자
이날은 경찰의 낡은 슬리퍼를 훔쳐 신었다는 이유로 징역을 살 처지에 몰린 15살 청소년 AAL을 위해 슬리퍼 모으기 캠페인이 시작된 첫날이었다. 남매는 술라웨시주 팔루경찰서 유치장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또래 친구에게 슬리퍼와 응원의 말을 남기고는, 맨발로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시민들이 그렇게 신고 왔던 슬리퍼를 벗어놓고 갔어요. 캠페인 소식을 접하자마자, 어린이보호기구 사무실로 곧장 사람들이 몰려왔지요. 요즘은 우기라서 매일 비가 오는데…. 첫날 왔던 남매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AAL을 위한 ‘슬리퍼 모으기 캠페인’을 기획한 어린이 인권단체 ‘SOS 어린이 마을’의 부디 쿠니르아완 홍보팀장의 말이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안팎의 언론 보도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진 AAL의 사연은 흔히 ‘샌들보이 사건’으로 불린다. 사연은 이렇다. 이름의 약자를 따 ‘AAL’로 불리는 ‘샌들보이’는 지난해 5월 어느 날, 하교길에 동네 어귀에서 낡은 슬리퍼를 발견했다. 소년은 주택가 담장 밖에 놓인 슬리퍼를 버려진 것으로 생각해 주워서 집으로 가져갔다. 그로부터 6개월여 뒤, 소년이 슬리퍼를 주운 골목에서 ‘슬리퍼 주인’ 경찰관 아흐마드 루스디 하라할과 마주쳤다. 그는 자신의 슬리퍼를 신고 있던 AAL을 붙잡아 술라웨시 중앙경찰서에 절도 혐의로 넘겼다. 며칠 뒤 “15살 난 아이가 3만루피아(약 4천원)짜리 슬리퍼를 훔쳤다는 이유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으며, 최대 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 인도네시아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샌들보이 소식 들었어? 너무 황당하지 않아?”
트위터를 통해 소식을 접한 수치아티 에카(24·변호사)는 즉시 트위터와 블랙베리 메신저로 친구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단다. 장문의 기사는 전자우편, 페이스북 등을 통해 지인들 사이에서 공유됐다. 그는 “샌들보이는 법 집행기관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슬리퍼 모으기 운동을 기획한 부디 팀장 역시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지인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분노, 경찰·사법부의 무리한 법 집행에 대한 불만을 어떻게든 표현해야 했죠. 우리가 AAL 대신 경찰에게 슬리퍼를 보상해주면 어떻겠느냐고 친구들에게 제안하면서, 자연스레 캠페인이 시작됐습니다.”

오만한 공권력에 저항 잇따라
지난해 12월27일 언론 보도를 통해 ‘AAL을 위한 슬리퍼 1천 켤레 모으기 캠페인’의 공지가 나간 뒤 불과 일주일 만에 자카르타·솔로·팔렘방·발리 등지에서 1200켤레가 모아졌다. “텔레비전에서 AAL 뉴스를 보는 순간 분노가 치밀더라고요. 부정·부패 공무원들 처벌은 가볍게 넘어가면서, 슬리퍼 한 켤레 주워간 어린아이한테는 그렇게 무겁게 죄를 묻다니. 모든 게 거꾸로 됐잖아요. 불공평해요.” 지난 1월 초 만난 주부 헬미나(44)는 목소리부터 높였다. 네 자녀를 둔 그이는 이웃들과 함께 슬리퍼 25켤레를 모았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시민들이 공권력의 불공평한 집행에 분노해 연대와 지지 운동에 나선 것은 샌들보이 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에 벌어진 ‘프리타를 위한 동전 모으기 운동’과 ‘비빗-찬드라 지지운동’ 때도 불의에 분노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줄을 이었다.
2008년 8월 반텐주 탕게랑의 유명 병원인 ‘옴니국제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은 주부 프리타 물랴사리(34)는 친구에게 한 통의 전자우편을 보냈다. 병원의 오진과 치료 부작용에 관한 내용이었다. 문제의 전자우편 내용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삽시간에 인터넷에 퍼졌고, 병원 쪽은 프리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병원 쪽이 요구한 손해배상금은 2억루피아(약 2500만원)였다. 2009년 12월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동전 모으기 운동’에 나섰고, 짧은 기간 안에 3억루피아(약 3900만원)가량을 모아냈다.
이보다 두 달여 앞선 2009년 10월 벌어진 ‘비빗-찬드라 지지운동’은 인도네시아에서 SNS를 통한 시민참여·연대운동의 첫 사례로 꼽을 만하다. 국가부패방지위원회(KPK) 소속 공무원 비빗 사마드 리안토와 찬드라 함자가 기업인 앙고로 위조조의 비리를 조사하던 중 그의 형에게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비리 조사를 막기 위한 전형적인 ‘물타기’였다. 조사 과정에서 이들이 ‘표적수사’의 희생양임이 속속 드러나자 온라인을 통해 지지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페이스북에는 ‘비빗-찬드라를 지지하는 100만 명 운동’ 그룹이 만들어졌고, 101만 명이 가입해 지지 메시지를 남겼다. 인도네시아 대법원은 결국 ‘비빗-찬드라’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인도네시아에선 1998년 민주화 이후 입법·행정부에 대해선 일정한 민주적 감시·견제 시스템이 갖춰졌지만, 사법부는 여전히 ‘무풍지대’로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 ‘폭력피해자·실종자 대책위원회’(KONTRAS) 하리스 아즈하르 활동가는 “시민들이 사법적 정의를 요구하는 직접 행동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에도 수마트라섬 시준중에서 모스크 모금함의 동전을 훔친 혐의로 붙잡혀 조사를 받던 10대 형제가 경찰서 화장실에서 목매어 숨진 채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며 “샌들보이와 비슷한 사건이 너무도 많이 벌어지는 탓에, ‘힘없는 사람들만 공권력에 휘둘린다’는 분노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범죄 사법처리 기준 마련돼야
지난 1월4일 인도네시아 대법원은 AAL에게 “가정으로 돌아가 반성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슬리퍼 모으기 캠페인’은 인도네시아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남겼다. 예기치 않은 폭우가 쏟아진 지난 1월13일, KPAI는 자카르타 폰독밤부에 자리한 아동·청소년범수감소에 슬리퍼 250켤레를 전달했다. 이 단체 무함마드 이흐산 사무국장은 “슬리퍼 모으기 운동에서 멈출 게 아니라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어린이·청소년 범죄에 관한 경찰 조사와 사법 절차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마련할 때까지 시민·사회단체가 연대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카르타(인도네시아)=이슬기 통신원 skidolm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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