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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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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땅 이라크, 쟁탈전은 계속된다

세계2위 평가되는 이라크 원유 노리는 다국적 정유회사 경쟁 뜨거워…미군 점령 8년10개월 뒤, 여전히 물과 전기는 부족하고 치안은 불안해
등록 2012-01-19 15:42 수정 2020-05-03 04:26

마지막 미군이 이라크를 떠난 것은 지난해 12월18일이다. 이날 이라크 남동부 나시리야에 자리한 캠프 아더를 출발한 미군 500여 명은 100대의 장갑차량에 나눠타고, 남부 사막지대를 가로질렀다. 브래들리 장갑차를 실은 미군 트럭 25대도 경적을 울려가며 기세 좋게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은 그날 밤 쿠웨이트 국경을 넘었다. 2003년 3월20일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뒤이은 점령은, 그렇게 8년10개월여 만에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5분의 1 가구 물 부족, 4~8시간 전기 공급
점령 초기,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이라크의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재건·복구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일자리를 늘리고, 식수·전기 공급을 확대하고, 도로를 확충하고, 의료서비스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른바 ‘중동판 마셜플랜’이다. 9년에 가까운 점령 기간을 마감한 오늘, 이라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랍 위성방송 가 1월9일 인터넷판에 올린 바그다드발 기사는 미군이 떠난 이라크의 오늘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루 250만t의 식수를 생산한다. 지금도 매일 100만t가량이 부족하다. 생산량을 늘리려고 시설투자를 계획해놓고 있다. 늦어도 올해 말까지는 부족분을 메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는 하심 하산 바그다드 수도국 부국장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지난해 3월 유엔이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이라크 도심지역에 거주하는 5가구 가운데 1가구가 만성적인 물부족 사태로 마실 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여전히 하루에 많게는 8시간에서 적게는 4시간 정도만 제한적으로 전기가 공급되고 있다. 수도 바그다드 일대에서 소형 발전기를 이용한 ‘전기 노점상’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다. 자가 소형 발전기를 돌려 하루 12시간씩 220가구에 전기를 공급하는 나빌 투피크는 와 한 인터뷰에서 “암시장에서 디젤을 구해다가 발전기를 돌리고 있다”며 “부패로 얼룩진 정부가 조만간 전력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오랜 기간 사업을 계속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군이 떠난 직후인) 지난해 12월22일을 전후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폭력사태가 지난 한 주 소강상태를 보였다. 인명피해 규모만 놓고 보면, 최근 몇 달 새 가장 좋은 상황이다.”
영국에 본사를 둔 인터넷 매체 가 매주 발행하는 ‘이라크 치안 상황 보고서’ 최신호(1월6일치)는 이렇게 보도했다. 구체적으로 보자. 1월 첫주 동안 이라크 전역에서 벌어진 폭탄 공격으로 12명이 숨지고 40명이 다쳤다. 소형 총기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0명, 부상자는 3명이다. 이 밖에 로켓포·박격포 공격으로 인한 사상자도 속속 보고됐다. ‘최근 몇 달 새 가장 좋은 상황’이 이 정도다.
“정치적 안정 없이 치안이 안정을 되찾을 수 없다.”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가 미군 철수 이후 아랍권 언론과의 잇따른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그런데 말리키 총리가 택한 ‘안정화’ 전략이 생뚱맞다. 미군 철수 종료를 기념해 ‘이라크의 날’로 지정된 지난해 12월31일, 공식 기념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말리키 총리가 이끄는 시아파 정치인들뿐이었다.
수니파와 쿠르드족 정치인들이 이날 행사의 ‘보이콧’을 결정한 이유가 있다. 최근 타리크 알하셰미 부통령에게 테러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됐기 때문이다. 영장 발부 직후 쿠르드족 자치지역으로 몸을 피한 하셰미 부통령은 수니파 출신 최고위급 정치인이다. 말리키 총리는 의회에 살레 알무틀라크 부총리 불신임안까지 제출해놓은 상태다. 이에 따라 의회 325석 가운데 82석을 차지하는 수니파 정치조직 ‘이라키야’가 의사일정 보이콧에 나섰다. 쿠르드족 정당들도 이에 동참해, 이라크 의회는 사실상 마비 상태다.

고품질 노다지 나눠먹는 서구 열강
그 혼란의 빈자리를 비집고, 다국적 정유업체가 바삐 움직이고 있다.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과 중국 국영석유공사(CNPC)는 이라크 전체 원유의 약 15%(약 170억 배럴)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최남단 루마일라 유전지대를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다. 엑손모빌과 로열더치셸은 87억 배럴 규모의 서부 쿠르나 제1공구 채굴권을 따냈다. 44억 배럴 규모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주바이르 유전에는 이탈리아의 에니와 미국의 옥시덴털 등이 진출했다. 확인된 매장량만도 126억 배럴, 최대 230억~250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부 마주눈 유전은 로열더치셸의 몫이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이 2010년 9월 펴낸 자료를 보면, 이라크는 ‘세계 12위’ 원유 생산국이다. 하루 약 240만 배럴의 원유를 퍼올렸다. 매장량은 훨씬 많다. 확인된 매장량을 기준으로 하면, 사우디아라비아·캐나다·이란에 이어 세계 4위 규모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670억 배럴, 이라크는 1150억 배럴에 이른다. 하지만 좀더 적극적인 평가도 있다. EIA는 보고서에서 “이라크 남부와 서부 일대 사막지역에서 추가로 450억~1천억 배럴가량의 원유자원이 추가로 발견될 수 있다는 게 지질학자와 유전 전문가들의 대체적 분석”이라고 밝혔다. 이라크에 ‘세계 2위 원유자원 보유국’이란 수식이 붙는 이유다.
이라크 유전은 채굴을 위해 깊숙이 파고 들어갈 필요도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유 과정에서 비용을 잡아먹는 유황 함유량도 다른 지역 원유에 견줘 상당히 낮은 ‘고품질’이란 점도 잘 알려져 있다. 더구나 이미 발견된 유전조차 거의 개발이 안 된 상태다. EIA는 “이라크 원유 매장량 가운데 90%가량이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경제제재 등으로 개발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노다지’란 얘기다.
이라크 원유자원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사연이 있다. 1973년 제4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른바 ‘욤키푸르전쟁’) 당시 신생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미국과 서방국가에 대한 원유 수출 금지령을 내렸다. 다국적 정유사들이 이라크를 떠나야 했던 것도 그 무렵이다. 이어 등장한 사담 후세인 정권은 석유자원을 국유화하는 한편, 잇따른 분쟁에 휘말려들었다. 1980~88년 이란과 8년 전쟁을 벌였고, 1990년 쿠웨이트 침공 이후엔 미국 주도의 유엔 경제제재로 13년여 동안 외부와 차단된 채 지내야 했다. 세계 유수의 정유업체들이 이라크 땅에 다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2003년 3월 미국의 침공 직후였다.

이라크에 여전한 미국의 그림자
지난해 말 이라크 정부는 하루 원유 생산량을 오는 2017년까지 현재의 4배에 해당하는 1200만 배럴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현재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하루 산유량은 1천만 배럴에 그치고 있다. 이라크의 최대 원유 수입국인 미국 역시 보조를 맞추고 있다. 지난해 11월30일 미 백악관은 두 나라 사이의 ‘에너지 분야 협력 방안’을 담은 보도자료를 냈다. 이 자료에서 백악관 쪽은 “미국은 이라크의 에너지산업 개발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라며 “두 나라는 이라크가 산유량을 늘리는 데 필요한 주요 관련 시설 보호활동도 함께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철군을 마친 뒤에도, 미국의 그림자가 이라크의 ‘기름진’ 땅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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