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대한민국 법률 제5454호에 걸핏하면 등장하는 문구다. 1948년 제정돼 7차례나 개정을 거치면서도 용케 살아남아 12월1일로 예순세 번째 생일은 맞은 이 법의 이름은 ‘국가보안법’이다.
넬슨 만델라의 나라, 아프리카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꼽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하원은 지난 11월22일 법안 ‘B6-2010’호를 표결에 부쳤다. 집권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주도로 2008년 논의가 시작된 이래 3년여 만의 일이다. 투표 결과는 찬성 229표, 반대 107표, 기권은 2표였다. 2009년 총선으로 꾸려진 제25대 남아공 하원은 전체 400석 가운데 약 66%인 264석을 ANC가 장악하고 있다.
“공익 조항 빠져 내부고발 막아”
상원의 인준 절차를 거쳐 제이컵 주마 대통령이 서명하면 법안은 공식 효력을 얻는다. 상원 90석 가운데 62석을 ANC가 확보하고 있다. 주마 대통령도 ANC 출신이다. ‘이변’을 예상하긴 어렵다는 얘기다. 모두 13개 장, 57개 조항으로 이뤄진 법안의 공식 명칭은 ‘국가정보보호법’이다. 법안 제5장 12조를 비롯해 곳곳에서 낯익은 문구가 되풀이해 등장한다. “국가의 안전을 침해할 우려가 현저한 때에는….”
남아공 시민사회가 ‘비밀법’으로 부르는 ‘국가정보보호법’은 남아공판 국보법으로 부를 만하다. 어떤 기준에서건 국가기관이 안보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면, 어떤 정보든 △기밀 △비밀 △일급비밀의 3단계로 나눠 지정할 수 있다. 기밀 이상으로 분류된 정보를 담은 유·무형의 자료를 소지하거나, 공개하거나, 퍼뜨리는 행위는 최고 징역 25년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공익 조항’이 빠졌다는 점이다. 남아공 시민사회는 “내부고발자나 언론인의 탐사보도까지 막을 수 있다”며 “공익을 목적으로 국가기관의 정보를 공개하는 경우엔 처벌을 면하게 하는 예외 조항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강조해온 터다. 현지 인권단체인 ‘표현의 자유 연구소’ 엘스턴 시피 사무총장이 지난 11월22일 와 한 인터뷰에서 “비밀법은 남아공 사회를 1994년 이전으로 되돌려놓을 것”이라고 우려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94년’은 남아공 민주화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해다. 2년여의 협상 끝에 그해 4월27일 인종차별 없이 치러진 사상 첫 총선에서 ANC는 62.65%의 지지율로 집권에 성공했다. 이로써 1948년 입법 이래 남아공 사회를 옥죄온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는 공식 폐기됐고, 4월27일은 ‘자유의 날’로 명명돼 국경일이 됐다.
의문은 하나로 모아진다. ‘만델라의 정당’은 왜 ‘비밀법’을 밀어붙이는 걸까? 입법 과정을 주도한 ANC 소속 루엘린 랜더스 하원의원은 11월23일 <bbc>과 한 인터뷰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인) 1982년 백인 정권이 만든 악법인 ‘정보보호법’을 폐기하기 위한 대체입법일 뿐”이라며 “내부고발자와 언론은 기존 ‘정보공개법’ 조항을 통해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마 대통령 비리의혹 제기되자
시민사회에선 사뭇 다른 주장이 나온다. ANC 정부는 집권 이후 미화 48억달러 규모의 대형 전력증강 사업을 벌였다. 사업은 1999년 마무리됐지만, 이후 막대한 비자금이 ANC 쪽으로 흘러들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최근 제1야당인 민주동맹 주도로 의회 차원에서 이에 대한 재조사가 추진되고 있다. 당시 ANC 부의장과 부통령을 지낸 주마 대통령도 조사 대상자로 거론된다. 비밀법 통과를 전후로 등 현지 언론이 “비리 의혹 관련 내부 정보를 (비밀로 분류해) 덮어버리려는 것”이라고 꼬집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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