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귀환한 차르, 제2의 스탈린 꿈꾸나?

내년 러시아 대선 입후보 수락해 대통령 복귀하는 푸틴…
민주주의 후퇴, 신냉전 부활 우려 속 부정부패 등 난제 많아
등록 2011-10-07 14:39 수정 2020-05-03 04:26

2006년께부터였다. 2000년 5월 취임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8년 5월 두 번째 임기가 끝나기 전에 3선 연임을 금지한 헌법을 뜯어고칠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그러다 2007년 초 푸틴이 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총리로 물러나겠다고 밝힌 이후로는 결국 그가 대통령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주장이 쏟아졌다. 당시 푸틴의 권력 승계는 서방 언론의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까지 겹쳐 음모설처럼 떠돌았다. 음모설 같던 예측이 결과적으로 맞았다. 메드베데프가 9월24일 집권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전당대회에서 내년 3월 대선에 푸틴이 입후보할 것을 제안하고 푸틴이 수락한 것이다. 선거는 치러지지만 푸틴의 당선은 떼놓은 당상이다. 2008년 3월 대선에서 여당 후보 메드베데프는 70%의 압도적 지지율로 선출됐다.

푸틴, 연임하면 대통령만 20년
외신들은 ‘차르의 귀환’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따져보면 지난 4년간도 푸틴은 최고 권력에서 떠나지 않았다. 애초부터 총리 푸틴은 ‘상왕’이라 불렸고, 메드베데프는 헌법상 실권자인 대통령이지만 ‘허수아비’로 인식됐다.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미국의 외교 전문은 푸틴을 ‘배트맨’, 메드베데프를 배트맨의 조수인 ‘로빈’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했다.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메드베데프가 자동차 앞 좌석에 앉아 이것저것 만져본 뒤 운전대를 잡으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그때 뒷좌석의 푸틴이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며 이렇게 말한다. “운전은 내가 한다.” 이런 러시아의 권력구조를 놓고 언론들은 ‘2인용 자전거’라고 자주 표현해왔다. 러시아를 방문한 국가 최고지도자들은 메드베데프만 아니라 푸틴도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메드베데프의 얼굴이 그려진 인형을 하나 벗기니 그 안에서 푸틴이 나오는 러시아 전통인형(마트료시카)이 두 사람의 관계와 지금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푸틴은 내년 5월에 공식 1인자로 복귀한다. 러시아 차기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다. 연임이 가능하니 푸틴은 최대 12년, 2024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직할 수 있다. 이미 8년간 대통령을 했으니 대통령만 20년을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푸틴은 소련의 지도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18년)나 이오시프 스탈린(31년)에 비유되기도 한다. 한국에선 이승만 대통령이 1948~60년까지 약 12년, 박정희 대통령이 1962~79년까지 약 17년간 최고지도자 자리를 누렸다. 9월24일 전당대회에서 푸틴은 자신이 대통령으로, 메드베데프가 총리로 자리바꿈하는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래에 어떻게 할지에 대한 합의는 우리 사이에 몇 년 전에 이뤄졌다.” 국가 최고지도자를 누가 맡을지를 자신들끼리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몇년 전에.
메드베데프가 왜 이렇게 맥없이 물러났을까 의아스럽기도 하다. 그가 대통령에 올랐을 때, 권력의 속성상 푸틴의 복귀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메드베데프가 일단 최고 권좌에 앉으면 최측근을 앉힌 뒤 권력을 다지고 결국 푸틴을 제거해 최고 권좌를 틀어쥘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차례 공개적으로 연임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서도 권력 장악에 실패했다. 메드베데프는 러시아를 개혁하리라는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지지도는 30%를 밑돈다. 푸틴의 지지도는 70%에 이른다. 유약했기에 푸틴이 4년간 잠시 대통령 자리를 맡았다가 넘겨줄 인물로 그를 골랐다는 분석도 많았다. 푸틴은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총리에게 강한 권력을 준 적이 없었다. 결국 메드베데프는 총리가 되더라도 존재감이 사라질 것으로 점쳐진다.

자유 억압했지만 사회 안정화 신뢰
어찌됐든 두 사람의 권력 교체와 푸틴의 대통령 복귀가 어떤 면에서 국민이 원하는 안정은 최소한 가져다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지난 4년간 애매한 권력관계가 더 불안했지만, 이제 권력관계가 명확해짐에 따라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저명 정치사회학자인 올가 크리스탄노프스카야는 “러시아에는 절대주의, 전제정치라고 불리는 전통적 정치문화가 있다”며 “이런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강력한 1인 통치 시스템이 무너지면 대혼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뿌리 깊은 두려움이 있다”고 분석했다. 푸틴이 자유를 억압하고 시민사회를 무력화했지만, 1990년대 붕괴 위기에 있던 러시아를 안정시킨 데 대해 국민이 감사하고 신뢰를 보낸다는 것이다. 러시아 여론조사기관인 레바다센터의 데이스 볼코프 연구원은 9월26일 인터뷰에서 국민이 푸틴을 지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3분의 1은 그가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고, 3분의 1은 그가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나머지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며 “이런 상황이 인위적으로 러시아 정치 시스템에서 대안 부재를 만들어냈고, 미디어는 최고 자리에 있는 사람을 계속 지지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푸틴의 복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럴 줄 알았다’는 러시아 국민의 반응에 비하면 서방의 우려는 커 보인다. 그동안 푸틴은 자주 웃통을 벗은 모습을 세계에 보여왔다. 맨몸에 총을 든 채 사냥하는 모습이나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사나이’의 모습이다. 그의 근육질 몸매는 그만큼 강경한 러시아 대외정책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담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토미 비터 대변인은 “누가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일하든지 미국과 러시아, 세계에 이익이 된다고 믿으므로 관계 재설정 과정을 계속 만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푸틴의 귀환이 미국 정책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9월26일 기사 제목은 서방의 우려를 잘 보여준다. 푸틴은 대통령 재직 당시 폴란드와 체코에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를 구축하는 문제 등을 둘러싸고 서방과 갈등을 빚어 ‘신냉전’이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푸틴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 의해 국가보안위원회(KGB) 후신인 연방보안국(FSB) 수장에서 총리로 발탁됐다. 서방에 대한 불신이 깊다.

2기 푸틴은 1기 푸틴과 다를까
미국은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에 오른 뒤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왔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09년 3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회담한 뒤 “미국은 러시아와의 관계에 리셋(재설정)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출발을 할 것”이라며 ‘리셋’이라는 뜻의 러시아어가 적힌 붉은색 버튼이 달린 상자를 선물했다. 당시 ‘리셋’이라는 러시아어 대신 ‘과부하’ ‘충전 과다’라는 글자가 잘못 적혀 있었지만 웃음보를 터뜨리고 화해 의사를 전달하는 데는 성공했다. 실제 지난해 4월 미국과 러시아는 전략핵무기의 30% 감축을 뼈대로 한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에 서명했다. 올해는 아프간 주둔 미군의 보급로로 러시아를 통과하는 길을 열었다. 러시아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일정한 압력을 행사했고, 미국은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지지하는 등 관계에 진전이 이뤘다. 이런 관계 개선은 적대적인 푸틴이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미국외교협회(CFR) 조지 케넌 선임연구원은 “메드베데프는 모두에게 맞는 해법을 찾아보라고 하는 식이라면, 푸틴은 군이나 정보기관의 미심쩍어하고 피해망상적인 견해에 더 귀기울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피해망상에 근거를 둔 외교정책을 수립할 수는 없다”는 메드베데프의 발언은 푸틴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서방이 푸틴에 대해 지나친 우려를 한다는 분석도 있다. 곧 지난 4년간 메드베데프의 정책은 푸틴의 전반적인 동의 없이는 실행되기 어려웠고, 2기 푸틴의 정책은 1기와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푸틴 역시 메드베데프를 내세운 상태에서 많은 정책 전환을 실험했다는 것이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고든 한 선임연구원은 “국내적으로 전체주의,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로 러시아가 돌아갈 것이라는 비관적 기사가 넘쳐나지만 겁에 질릴 필요가 없다”며 “메드베데프가 펴온 경찰 개혁과 부패 추방, 야권 시위 허용 확대, 국영기업 민영화, 미국 및 외국 자본과의 공조 강화 등은 푸틴의 전반적 지지 없이는 시작될 수 없었던 만큼 두 사람의 자리 교체는 메드베데프 시절과 변화보다는 연속성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푸틴의 서방 불신과 권력 지향에 맞서 미국이 러시아의 권위주의 체제나 인권침해, 이란과의 핵협력, 러시아-조지아(그루지아) 갈등, 무기 통제와 미사일방어 등에서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면 미국 행정부의 ‘리셋’ 정책은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푸틴 앞에 놓인 힘겨운 과제들
푸틴이 다시 전면에서 이끌 러시아는 국민이 바라는 대로 확실히 안정을 가져다줄까? 문제는 대외관계보다는 내정에 있다는 시각도 있다. 푸틴의 복귀로 경제 개혁 및 민주화가 지체되고 결국 국민의 불만이 폭발하며 푸틴 정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는 9월27일 교육받은 중산층이 정치 엘리트의 만연한 부패와 부 축적에 진저리를 치며 최근 몇년 사이에 100만 명 가까이 러시아를 떠났다고 전했다. 지배 엘리트는 물론 중소 기업가들까지 국내에 투자하지 않는 등 심각한 자본 도피가 벌어지고 있다. 현재 높은 원유 가격 등 원자재값 호황에 의존해 러시아 경제가 버티고 있지만 세계경제 전망이 어둡고 인터넷 사용자 증가 등으로 정부에 대한 불만도 커지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이제 3명 중 1명꼴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 싱크탱크인 유럽외교관계이사회(ECFR) 앤드루 윌슨 선임연구원은 “푸틴이 대통령 재임시에 안정과 국가 권위 회복 등을 이뤘다고 하지만 상당히 과대평가된 것이고 경제가 어렵고 북캅카스 지역 등에서 무정부 상태가 심각한 상황에서 복귀함에 따라 이런 성과도 위협받게 됐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고등경제교육원 유릴리 니스네비치 교수는 인터뷰에서 “무엇이 불을 당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폭발이 있을 것이며 소련처럼 무너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30년,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은 42년간 권력을 누리다 결국 국민의 저항으로 쫓겨났다. 이래저래 새로운 푸틴의 시대는 푸틴 자신과 국민, 세계 모두에 힘겨운 시기를 예고하고 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