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해적당이 인터넷 시대의 차세대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다. 해적당은 9월18일 치러진 베를린 시장 및 시의회 선거에서 8.9%를 득표해 시의회 진출에 성공했다. 창당한 지 5년 남짓 된 신생 정당이 광역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한 것이다.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특수성도 작용했다. 베를린은 독일의 다른 도시들보다 실업률(14%)이 훨씬 높고 이주민, 동독인, 서독인, 대학생, 젊은 예술가 등이 함께 살아가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이런 베를린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해적당의 득세에 기여했다. 이로써 해적당은 연방의회 진출까지 꿈꿀 수 있게 됐다. 최근 공영방송 (ZDF) 여론조사에 따르면 해적당 지지율은 4%로 늘어나 의회 진출 득표율인 5%에 가까워졌다. 다음 총선의 판을 갈아엎을 진짜 ‘해적’들이 나타난 것이다.
‘리퀴드 데모크라시’ 표방
2006년 스웨덴에서 처음 만들어진 해적당은 2009년 스웨덴 유럽의회 선거에서 7.1%를 득표해 유럽의회에 진출하며 돌풍을 몰고 왔다. 구호는 인터넷의 자유였다. 해적당은 인터넷 검열과 과도한 저작권 적용을 반대한다. 당 이름은 불법 음반 등을 ‘해적판’이라 부르는 데서 붙여졌다. 이들의 출현은 30년 전 녹색당 창당 시절을 연상시킨다. 당원들은 격식을 차린 옷보다는 편안한 차림을 선호해 모자 달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다. 주위에서 보는 젊은이의 흔한 모습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베를린 시의회 152석 가운데 15개 의석을 차지한 의원들도 공식석상에 거리낌 없이 티셔츠와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난다. 독일 유력 일간 은 해적당 성장의 이유를 한국에서 ‘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대의 저항으로 해석했다. 독일 젊은이들도 이전 세대보다 경쟁이 심해지고 좀더 시달리며 살고 있다. 한 템포 빨라진 사회는 젊은이에게 빠른 진학과 졸업, 취업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성세대는 인터넷 등과 거리가 멀고 세대 간 라이프스타일 격차가 벌어져, 기존 정당들은 젊은 층의 감성과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선거 일주일 뒤인 9월26일, 해적당 대표후보였던 안드레아스 바움(33)을 인터뷰하려고 베를린 중심지 미테에 있는 해적당 당사를 찾았다. 당사는 주택가 한 오래된 건물의 1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점포로 쓰이는 공간이어서 안이 다 들여다보였다. 유리 진열장에는 이번 선거 포스터를 붙여놓았다. 기다리다가 안을 들여다보니 누군가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유리문을 두드리니, 부스스한 긴 머리의 30대 남자가 일어나 문을 열어줬다. 당사 사무실은 책상 몇 개와 의자가 전부였다. 바움은 예의 추리닝 윗도리에 운동화 차림의 텔레비전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산업전기공인 그는 시의원으로도 활동하지만 일주일에 20시간은 생업에 종사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당원과 임원들은 모두 자원봉사로 일한다.
2006년 해적당 창당 멤버인 바움은 해적당을 “투명성을 기본 강령으로 ‘아래로부터 위로’ 이뤄지는 의사결정, 곧 풀뿌리 민주주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당”이라고 소개한다. 해적당이 다른 당과 차별되는 지점은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정보 접근의 자유를 표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 인터넷 포럼을 통해 의사결정 과정을 철저히 민주적으로 이뤄내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의 중간 형태인 ‘리퀴드 데모크라시’(Liquid Democracy) 원리에 입각한 ‘리퀴드 피드백’(Liquid Feedback)을 도구로 사용한다. 모든 이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적 도구다. 당내에서 이뤄지는 토론·합의 등의 과정은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www.piratenpad.de). 밀실 결정은 있을 수 없다. 바움은 “녹색당도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하지만 이런 민주적 의사결정 도구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정치의 투명성을 지향하고 기술적인 도구까지 갖춘 우리 당이 앞으로 내용적으로도 더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당원 35명에서 12만명으로 성장
실제로 독일 해적당의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2006년 9월 베를린에서 해적당을 창당할 당시 당원은 35명이었지만, 현재 전국 당원은 12만 명에 이른다. 당원들은 20~30대 남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컴퓨터 관련 직종에서 일하거나 자연과학을 전공한 이른바 ‘너드’(Nerd)가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시의원으로 뽑힌 15명 중 여성은 단 1명뿐이다. 그래도 여성 할당제를 적용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대신 해적당이 더 알려지면 여성 당원도 늘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1년 당회비는 36유로(약 5만8천원)다. 비용은 기부와 회비로 운영해 재정이 열악한 상태임을 고려하면 이번 선거의 결과는 놀랍다. 해적당의 이번 선거비용은 3만5천유로였지만, 1.8%의 득표율로 베를린 선거에서 참패한 자민당(FDP)의 선거비용은 그 10배였다. 선거는 돈이 아니라 내용과 전략으로 치러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예다.
인터넷 정보의 자유를 원하는 해적당은 저작권 폐지가 목표일까? 바움은 “저작권을 폐지하는 게 목표는 아니다. 각 개인이 중립적으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건 매일 수천 명의 인터넷 사용자가 변호사로부터 엄청난 벌금을 요구하는 편지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 돈이 예술가들에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변호사들이 중간에서 엄청난 금액을 가져간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가령 우리는 인터넷 사용 음악 애호가가 음악가에게 사용료를 직접적으로 지불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성공한 이유를 자신 있게 ‘미래지향적 정책’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터넷·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세대와 계층을 아우를 프로그램을 갖고 있을까? 바움은 “우리는 장기적인 정책을 갖고 있다. 실업수당 대신 우리는 누구나 기본소득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업수당과 기본소득의 차이점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다. 이 정책은 우리 당뿐만 아니라 녹색당이나 자민당의 일부에서도 주장하므로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래에는 기술 발달로 점점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본수입을 가져야 한다. 지금도 주부나 자원봉사, 사회노동 분야에서 많은 분들이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며 “미래에는 산업기술의 발달과 경제구조의 변화로 누구나 국가로부터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는 정책이 실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밖에도 무료 대중교통 이용도 선거 공약이었다. 무임승차 승객 관리, 자동판매기 등의 비용을 따지면 누구에게나 무료 대중교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정돼 있지 않은 유토피아
해적당이 추구하는 이상적 사회에 대해 바움은 “해적당이 지향하는 유토피아는 고정돼 있지 않다. 그저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해적당 활동이 앞으로 세계적으로 크게 확산될 것을 기대했다. 바움은 “이미 52개국에 해적당이 결성돼 활동하고 있고, 이번 선거가 다른 나라의 해적당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며 “최근 아랍 지역의 상황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지는 만큼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베를린(독일)=글·사진 한주연 통신원 juyeon@gmx.de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명태균 녹취에 확신”…전국서 모인 ‘김건희 특검’ 촛불 [현장]
[영상] “국민이 바보로 보이나”…30만명 ‘김건희 특검’ 외쳤다
해리스-트럼프, 7개 경합주 1~3%p 오차범위 내 ‘초박빙’
로제 아파트는 게임, 윤수일 아파트는 잠실, ‘난쏘공’ 아파트는?
거리 나온 이재명 “비상식·주술이 국정 흔들어…권력 심판하자” [현장]
노화 척도 ‘한 발 버티기’…60대, 30초는 버텨야
“보이저, 일어나!”…동면하던 ‘보이저 1호’ 43년 만에 깨웠다
에르메스 상속자 ‘18조 주식’ 사라졌다…누가 가져갔나?
이란, 이스라엘 보복하나…최고지도자 “압도적 대응” 경고
구급대원, 주검 옮기다 오열…“맙소사, 내 어머니가 분명해요”